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
로버트 미지크 지음, 서경홍 옮김 / 들녘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로버트 미지크는 언론인이자 저술가 및 정치이론가로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국경을 넘어 독일까지 명성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지난날 독일 특파원으로서의 경력이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지금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정당 정치간의 이념적 차이가 극명하지만,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정당과 독일 정당간에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타게스차이퉁과 프로필과 팔터에 고정적으로 칼럼을 기고하고 있으며, 저술에 있어서는 글 형태상 보편적인 논저를 쓰기보다는 르포르타주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꽤 보기 드문 사상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게는 어쩌다 보니 그의 글 서평이 세번째이기도 합니다만, 미지크의 글을 평가해 본다면 다소 에둘러 표현하는 법이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특히, 이 책은 독일 공영방송 ZDF의 토론 프로그램 ‘철학 사중주‘에서 꼭 일독해야 할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Genial Dagegen, Kritisches Denken Von Marx Bis Micheal˝로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지난 2010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약간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 역시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먼저 원서의 제목과 달리 번역된 책의 제목을 이 정도로 밖에 쓰지 못한 출판사에 유감을 먼저 밝히고 싶습니다. ‘좌파들의 반항‘이라는 제목이 아마도 이 책의 판매고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짐작되는데요. 뿐만 아니라 뉘앙스 역시 썩 좋지 못해서, 오해를 살 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제목 평가는 이 정도에서 끝내고, 미지크의 이 책은 간단히 설명하면 일종의 문화비평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바탕은 21세기의 대량 생산의 포드주의와는 달리 변형되고 진화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이런 현실에 마찬가지로 변화를 맞고 있는 세계 좌파들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서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가볍거나 단순한 시대사회적 현상만을 수박 겉핥기 식으로 단순 나열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과 그 구성원들‘에 대한 꽤 세밀한 르포르타주인 것은 분명합니다.

포스트 포드주의적인 상황으로 오늘날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꽤 놀라울 만한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이와 같은 면모에는 ˝인간이 생산한 물질 세계는 인간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을 적대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형성하며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탈인간화 된 존재‘를 창조한다˝고 미지크는 분석합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왜 개인주의를 신봉하게 되는지에 대한 일종의 사념적 근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글 서두에서 ˝자본주의는 얽히고설킨 개인들을 옭아매는 구속의 토대위에서 개인주의를 생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조금 관점이 벗어나는 얘기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이라는 미명하에 자유 시장 경제와 소극적 정부를 지지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이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개인주의가 사회적으로 성장했던 부분에는 인간이 어느정도 전통적인 권력에서 해방되고, 좀 더 면밀한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히 인정할 만합니다. 이것과 더불어 미지크가 글의 후반에서 피력하는 ˝참된 삶, 진실한 느낌, 내적인 풍요에 대한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지만 그 욕망은 인간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그것도 바로 현존하는 사회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점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산물의 열거를 통해 이것들의 역설을 찾아보려고 강력하게 애쓸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글의 목적이 저자인 미지크가 밝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렇게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적극적으로 내면화 되어 더할나위 없이 진행된 자본주의의 이행에 있어 그것과 동시에 현재 세계의 좌파들도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저는 그동안의 여러 서평을 통해 샹탈 무페와 지그문트 바우만의 입을 통해 ‘좌파의 지리멸렬‘에 대해 수없이 언급해 오기도 했는데요. 복잡한 사회 구조속에 자본주의가 강력하게 강요하는 규범들과 계급화에 대해 기존의 좌파들이 대중들과 시민들에게 괴리되어 있었고, 이들이 교조주의적이 되고 사변적으로만 틀 안에 갇혀 있었던 점이 그 반대에 있는 ‘배타적인 현실의 본류들(이를테면 시장 자유주의자들이나 자유 시장을 부르짖으며 자신의 이득을 찾으려고 하는 보수 정치인들)‘을 마땅히 견제해야만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엄혹한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시민들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이 문제가 시민들 손에 쥐어지기 전에는 바로 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의 비판과 설명이 있어야 했지만, 마찬가지로 지식인들의 자본주의적 영합도 충분히 소모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오늘날 밝혀지고 있는 좌파의 아이콘들은 정치적인 권력하에서 이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탈취하기 보다는 대중문화속에서 혹은 학술 강연과 시민 강의 등을 통해 시민들의 삶의 변곡점들을 살펴보고 이들이 더 나은 삶과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등의 노력으로 변화되어 왔다는 점을 미지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마이클 무어 현상과 ‘슈퍼스타‘ 슬라보예 지젝의 예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어는 하층 계급을 위로하고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이 시스템 전체를 공격하기 보다는 거대 기업의 소유자나 권력의 선두 주자 등을 희화화와 모욕 주기 등으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고, 세계화 된 자본주의 문화에 전반적인 불편한 심기를 보이면서 비판하는 지젝의 경우는 그가 많은 학계의 구성원들에게 때로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냉소가이자 광적이고 정치적으로 오류를 지닌 그가 한편으로는 위대한 도덕주의자˝라고 평가하는 점은 미지크가 보이는 곳곳에 드러나는 수사의 날것에 일부 독자들은 얼굴을 찌푸릴 수도 있지만, 그가 학자와 정치이론가 및 언론인의 여러 경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인물임을 감안한다면 크게 화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지젝에 대한 약간의 희화화에 대해 저역시 지젝을 사상적으로 크게 지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마냥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미지크가 지젝을 뭔가 팝스타처럼 묘사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에 대한 진정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작고한 바우만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인 소비 지상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자본주의가 전통주의적인 도덕적 원칙을 휴지통에 던져 버린 것 또한, 강하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이 소비 지상주의의 근거가 되는 개인의 합리성 원칙의 괴상한 초월은 몇몇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자아 표현과 개인의 만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본주의의 아주 낙관적인 현상이라고 간혹 설명해 내고 있습니다만, 이것의 결과가 지난 40여년간 어떠했는지는 모두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만연한 소비 지상주의에 대한 건설적 대안이라는 것이 그저 좀 더 덜 소비하는 것밖에 없는 시점에서 이것을 대놓고 비판하고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꽤 노곤한 작업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대로 이렇게 변화되고 변질된 우리의 자본주의는 ˝영원히 모순과 결부되어 있고, 지배를 원하며, 후기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타도라는 문제는 시스템 자체의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타도라는 데 있다˝고 카챠 디펜바흐의 입을 빌어 미지크는 좀 더 본질적으로 언급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좌파들의 변화가 과연 일시적일 것인가, 아니면 종래의 과격한 사회 변혁을 부르짖을 것인가에 대해 우리가 지금으로선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뒤에 미지크가 팝 문화에 대해 설명하듯이, ˝비즈니스에 반하는 노래를 부름으로써 더 좋은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는 다소의 역설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이를 통해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이 점을 자아실현과 연계하는 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가 ˝어떤 점에서는 이 구조들이 지닌 좀 더 많은 인간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적 삶에 더 깊이 파고든다˝는 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욕망, 재화로 측정되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값어치를 절대적으로 과신해 이를 자아 실현과 연계하는 보다 직접적인 자본주의의 내면화는 앞으로 이미 규명된 모순과 문제점을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좌파 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변화된 대응이 필요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네트워크 자본주의화가 거대 인터넷 기업들을 통해 진행되면서 이러한 변화 요구는 그 이전부터 요구되어 왔지만, 인터넷과 개인의 욕구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연계하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혼종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이에 대한 꽤 집요한 연구가 필시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미지크의 글의 후반부의 결말은 누구나 한번쯤은 꼭 일독해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이 책의 재간행이 있어야 할 텐데, 이 부분은 오로지 출판사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군요.


-글 중반부에 장 지글러와 체 게바라의 일화가 소개됩니다. 그가 1960년대에 2주간 체 게바라의 운전수를 했다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차갑고 합리적이며 모든 관계를 사물화 한다면 인간 ‘그 자체‘는 따스함, 친근함, 친절함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하고 낭만적이며 일견 보수주의적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들은 시장영역에서 신자유주의적인 주체들에게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새로운 반역도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폐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교류를 노골적인 현금 지불로 환원시킬뿐더러 그 밖의 다른 인간적 유대들을 해체시키고, 모두를 하나의 작은 경제단위로 간주한다

인간이 생산한 물질세계는 인간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을 적대하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형성하여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탈인간화된 존재를 창조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면서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지난 시절의 포드주의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일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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