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견뎌낼 수 있을까
놈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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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노엄 촘스키 (혹은 놈 촘스키)는 전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언어학자이자, 철학자, 인지과학자, 역사가, 사회비평가, 정치철학자 및 저술가의 직함을 갖고 있는 진정한 학자이자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미국의 티파티를 비롯한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촘스키가 끊임없이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하는데요. 이처럼 촘스키는 엘리트-테크노크라트주의적인 기존의 국가 권력 체계에 대중의 종속만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매우 비판적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지식인의 진정한 역할이 요구된다고 그는 매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쥘리앙 방다로부터 최근의 ‘엘리트 독식 사회‘의 아난드 기리다라다스가 주장한 ‘지식인들이 엘리트들과 아주 강하게 결속해 결국 일반 다수의 이익에 반하게 되는 경제 엘리트들과 정치 엘리트들의 홍보 역할˝을 자임하는 지성적 퇴보에 이르게 되지 않았나 고민해 봅니다. 이런 학계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거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 바로 노엄 촘스키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근래 촘스키의 글로 서평을 쓰면서 자주 인용했던 것이 그가 장기간 CIA의 감시를 받아왔다는 점입니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지식인, 권력이 떨떠름하게 여기며 마땅히 사회와 격리시키고 싶은 지식인이 바로 이 노엄 촘스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4년 원제, ˝Masters of Mankind Essays and Lectures : 1969~2013˝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촘스키의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정치철학적 편역본(혹은 발췌본)은 원제대로 1969년부터 2013년까지 공개 강의와 몇몇의 시론을 묶어 출판한 글입니다. 여기서 독자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국내 출판사에 의한 편집 출판이 아니라, 원래 미국에서 이러한 시도대로 출판된 논저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총 7장의 주제로 생태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전지구적 환경 문제와 정치철학적으로 기본적인 도덕적 원리에서 ‘보편성의 원칙‘을 기반으로 미국 국내 정치와 미국의 (불법적인) 국제정치적 개입, 테러리즘, 선제공격론 및 현재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여러 분석과 비판을 글에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러한 글의 논증 가운데에는 중요한 지식인의 역할론인 ‘오로지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가감없이 폭로‘ 하는 일종의 겸허한 책무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서문을 작성한 마커스 래스킨에 의하면 현재의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겉으로는 민주주의지만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는 반민주적인 엘리트 계급에 의해 국가와 사회가 ˝부자와 권력자를 섬기는 강력한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일찍이 미국 건국의 기초를 닦은 제임스 매디슨에 의해서도 ‘다수로부터 부유한 소수를 보호해야 하며‘, 함께 ‘원칙없는 대중에 의한 정치 참여에 대한 공포‘를 어떻게 하면 제어할 수 있는가에 자신의 사상을 건국 기초에 녹아내기도 하였습니다. 촘스키도 이 부분에 대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이런 제임스 매디슨의 사상을 연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매디슨이 생각해 낸 해결책은 ˝사회를 조각내고 대중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것이었다˝고 그는 분석합니다. 이 점은 분명하게도 촘스키가 강조하는 ‘어떻게 하면 사회의 파편화를 방지하고 이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7장의 논증과 상반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제임스 매디슨을 먼저 이렇게 인용하게 된 것은, 알렉시스 토크빌을 거쳐 존 듀이가 강조해 온 ‘조건들의 평등‘에 위반되는 소수 권력을 위한 안배를 이렇게 중요시 했다는 점은 단순히 혁명에 대한 두려움이나 군중의 봉기를 넘어서 왜 미국에서 ‘개인의 자유‘가 이처럼 중요하게 세대를 거쳐 내면화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인식적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제가 무분별한 상업 경제에 의한 민주정치에 대한 부식과 같은 존 듀이의 해석을 아주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경제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까지 받아들인 이 자유의 신봉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과 재산을 (헌법을 초월하여) 지킬 수 있는 지렛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개인적으로도 인간 자유의 기본 권리를 지지합니다만 초기 계몽주의 시대에서 자유의 이념은 근본적으로 진보주의적이었으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떤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소수의 기득권층과 거대 자본가가 이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고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면밀한 개념화에 이르러야 한다는 점은 매우 명확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도덕적 기본 원리로서의 보편성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2차대전 이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하여 촘스키는 보편을 다른 국가, 특히 적국에게 적용하는 ‘정의로운 계몽된 국가들‘에 의해 진행된 이 재판이 ˝그 이후에 올바른 결론이 내려졌다면, 패전국만이 아니라 승전국도 처벌 받았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마찬가지로 이후에 있었던 미국 CIA에 의한 쿠바의 피그만 침공으로 인해 쿠바의 주권이 침해되었다면 마땅히 당시 쿠바 군부가 마이애미나 뉴저지에 공격을 가할 수 있지 않겠느냐와 같은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케네디 행정부 때는 동맹국이나 우방국 뿐만 아니라 적국에도 무기를 파는 상행위에 대해 아무런 고려가 없었으며, 니카라과와 파나마에 있었던 미국 정부의 불법적인 개입 그리고 칠레에 민주정부를 무너뜨리고 피노체트를 권좌에 앉히게 된 그 끔찍한 결과에 까지 미국이 어떠한 책임을 졌는가에 대해 지난 역사로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국제정치가 헨리 키신저에 의도대로 현실과 이상의 차이로 인한 괴리와 조지 H. W. 부시와 조지 W. 부시가 그렇게 강조한 미국의 번영된 민주주의의 이식 또는 자유 민주주의의 맏형이라고 강조하는 프로파간다에 얼마나 어긋나는지 일일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동안 냉전 시기에 UN에서의 다수결에 의한 방안과 안건 토의가 미국이 ‘다수에 의한 결정‘에 의한 미국 국익의 침해를 들어 국제 연합을 불신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촘스키가 열거한, 쿠바 민항기 폭파를 비롯한 수많은 테러 행위를 일삼은 오를란드 보슈를 조지 H. W. 부시가 그에게 사면권을 부여한 것이라든지, 1999년 초에 있었던 동티모르 사태에 있어서 동티모르 인구 4분의 1을 학살한 인도네시아 정부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끊임없는 지원은 대체 미국의 국익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수의 엘리트-테크노크라트 지배체제에 대해서 촘스키는 1960년대에 이후 대중이 정치적 공론장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이들 엘리트들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많은 대중들은 권력 자체에 대해 소극적이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엘리트 기득권층은 그리 믿고 있었지만, 미국의 민주주의가 금권정치와 소수의 과두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오늘날의 네트워크 기반의 기술 발전으로 대중들의 정치 참여가 훨씬 더 강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다수의 지식인들이 이런 엘리트들과 결탁해 이러한 사회구조적 시스템의 옹호와 홍보를 더하고, 과거 우드로 윌슨과 같이 ˝소수 엘리트가 여전히 정치와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식의 읠슨 독트린의 논법은 이들의 정치적 가치관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촘스키도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지만, 많은 엘리트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 및 민주주의를 사실상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시스템적 안정과 설사 재분배의 실패와 불평등이 심화될지라도 현재의 고정되고 견고한 계급주의적 구조를 옹호하기 마련입니다. 단순히 아주 소소한 사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이들은 불만을 갖기 일쑤이고,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와 목소리가 나중에는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이르는 제한적인 혁명으로도 나갈 수 있다고 여기는 듯 합니다. 물론 이 점은 대단히 억측인게 많은 민주 사회의 헌법이 개인의 사유 재산을 충실하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동안 신자유주의화와 세계화에 따른 경제적 이행에 따라 이들 소수의 권리는 더욱 증대되어 왔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갈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근래에 급속한 양적이고 차별적인 자본주의화에 대한 촘스키의 비판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도 역시 갈수록 후퇴되어 가고 있는 민주 정치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단순히 민주주의의 쇠퇴에 대한 해법으로 다원주의적 가치를 먼저 제시하기 보다는 이 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인 ‘많은 지식인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에서 그는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제임스 매디슨으로 권력을 가진 소수에 대한 옹호와 배려에 대한 오래된 인식론과 그런 연유로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어떻게 평등의 문제가 계속 왜소화 되어 왔는지에 대한 면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확실히 그동안 진행된 시장 자유화에 대한 민주적 개혁이 필요한 것은 매우 타당하고, 그동안 정부와 기득권을 옹호해 온 거대 언론 재벌들과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다수의 언론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좀 더 대중이 네트워크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과 주장을 피력할 수 있는 대체재가 있어야 하는 점은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시급히 고려해야 되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40 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가 이런 오타를 수정하지 않고 책을 펴내는 것은 매우 실망스런 부분이라고 밝히고 싶군요.

어용 언론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노동계를 비난하고, 국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금융계와 산업계 거물들의 잘못을 얼버무리며 감추는 역할을 맡은 상업적 매체를 가리킨다

지식인들에게 예외 없이 내재된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성향에 과감히 맞서 싸우지 않으면, 이런 노력(사회 파편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무산되고 말 것이란 예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현재의 좌파에게는 현 사회와 사회 변화의 장기적인 추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 대안적 형태와 사회 조직을 만들어 낼 가능성에 대한 판단, 사회 변화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이 절실히 필요하다

냉전은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통합된 세계 경제를 건설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미국 정부가 시행하는 데 필요한 재원과 심리적 환경을 보장해 주기도 했다

노동자와 가난하고 약한 사람은 의회와 법원이 수립한 사회 정책에 실질적으로 종속된다

월터 리프만에 의하면,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행동의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자칭 계몽된 국가들을 제외하면 어떤 국가에도 그 권리(선제적 공격)가 부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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