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 문제 - 존 듀이의 민주주의론
존 듀이 지음, 홍남기 옮김 / CIR(씨아이알)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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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듀이는 미국 버몬트 주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및 교육학자로 당대와 뒤이어 후대에도 학문적 명성을 쌓은 학자입니다. 제가 단순히 학자라고 표현은 하고 있습니다만, 단순한 학자 이상의 지성인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는 정치철학자의 면모도 함께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는 토머스 페인과 거의 동등한 지적 및 학문적 위치를 미국 민주주의 역사와 정치에서 점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특히, 미국에서 탄생한 프래그머티즘과 관련된 그의 기여와 꽤 진보주의적인 교육론을 정립했던 것, 그리고 민주주의와 관련해 공중 piblic의 필요성과 이런 재교육화 된 공중이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밝힌 광범위한 정치 이론은 그를 위대한 지성으로 규정하는 학문적 업적임에 분명합니다. 특히 세계 2차대전 이후, 주류 경제학과 보수 정치인들에게 유일한 규범이 된 개인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과 경고로도 유명한 인물이 아닌가 여기 이 글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난 1926년 1월 미국 오하이오 주 케니언 Kenyon 대학에서 이뤄진 강연의 결과물로서, 이듬해인 1927년에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간단히 책의 번역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역자가 이 글을 번역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 꽤 지대하다는 점은 분명하나, 글의 문장이 기대만큼이나 수월히 읽혀지는 글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원전의 중요한 철학적, 사회학적 단어에 대해 원어를 첨부하고 부분적으로 괄호가 삽입되어 있는 점은 바로 앞선 문제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있는 경우이므로 이 정도의 언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은 “현대 민주주의와 정치 주체의 문제”로 표명되어 있습니다만, 원제에 따라 정확한 제목은 “공중과 그 문제”가 정확한 표기일 것입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고 들자면, 번역된 제목이 완전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겁니다. 존 듀이 역시 자신의 이 글에서 “조직화된 공중”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 반대의 경우에선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철학적인 문법이기에 독자들은 어느 정도 절충하는 이해가 다소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이 공중을 해석해 본다면, “공중의 조직화가 어느 정도 달성되어 공직자들이 구성되고 이에 공중의 이익을 돌보는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것”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즉, 스스로 재교육의 단계에 이르고,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제어하며, 다수의 이익에 기여하는 아주 고양된 형태의 집합주의” 정도로도 해석할 수 있을겁니다. 여기서 집합주의는 일종의 개인주의 대 집합주의로서의 극명한 대비라기 보다는 개인적으로는 건전한 대중의 발전된 형태로서의 해석이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여기에서 ‘대중’과 ‘민중’ 그리고 ‘군중’과 ‘공중’의 정치 및 사회철학적인 본뜻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텐데요. 이에 존 듀이는 이 글에서 ‘군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을 언급하며 이를 공중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대중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를 포함해 가브리엘 타르드 등이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정의를 내린바가 있습니다. 군중이 이 ‘개인과 개인들의 관계에 규합된 사람들’에 대한 가장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대중은 그 기본 의미나 사회철학적인 의미에서 다소 부정적이면서 가변적인 의미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존 듀이 이 글을 통해 규명하고자 하는 이 공중이 얼마나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자리매김했는지 글을 일독하면서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런 인상을 받게 한 여러 문장들 가운데, 3장 마지막에 “민주적 공중은 여전히 완성되거나 조직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는 것과 이 공중의 적절한 기준과 우리가 인정할 만한 수준의 조직화는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일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정하지 않고 있는 점은 ‘공중’을 면밀한 규모와 깊이에 있어 정의하기가 쉽지 않음을 명시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요. 또한, 6장의 ‘방법의 문제’에서는 이 공중과 민주주의의 형태들이 최소한 시민들의 활발한 토론과 동시에 이 시민들이 어느 정도의 지성적 수준을 갖춰야만 한다는 점에서 대중 정부 popular government 가 함의하는 ‘개선된 민주주의’에 대한 일면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킨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의 처음 도입이라 볼 수 있는 1장에서는 공중의 행위가 아닌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틀에 박힌, 충동적인, 그리고 무반성적인 행위들”에 대해 서술하고 “어떤 소수의 사람들이 대중적 힘을 이용하여 군중을 자신의 방식대로 이끌고 정치적 기구를 지배하고 기업을 경영하는 등”의 공중과 전혀 반대되는 파급을 초래할 수 있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존 듀이는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은 개인들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사회적 연결 고리를 필수불가결하다고 인정하고 “인간이 이를 통해 정치적 동물로 정의된다”고 주장합니다. 확실히 이 점은 소수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결사체들의 존재 양식과 이러한 조건에서 분별력이 떨어지는 대중이나 군중이 국가 존재의 필요성까지 거부하게 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결국, 이와 반대되는 국가의 존재 이유란 수많은 공중들이 자신들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여하고 행동하는 많은 정치적 활동과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2장에서는 듀이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아담 스미스의 기여에 따라 많은 경제인들이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의문을 갖고 거의 무정부주의적인 교리를 가진 군중들의 의도에 휩쓸리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국가는 해로운 집단들을 약화시키고 그것들의 수명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이러한 서비를 수행하는 데 있어, 국가는 가치있는 연합의 개인들에게 더 큰 자유와 안전을 제공한다”는 이상적인 국가의 존재 목적론에 대한 겸허한 진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3장의 ‘민주적 국가’에는 앞선 ‘부권주의적 문제’와 관련해 특정 개인의 자유를 공익을 위해 통제하고 이를 평등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가에 대한 면밀한 이해가 담겨져 있습니다. 민주적 국가에서 각각의 시민-유권자로서의 공중의 역할론과 “최선의 공공복리로 그들의 다른 욕망들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이 민주적 대의 정부의 합목적성은 민주주의의 큰 대의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물론 개인의 자유를 공공의 이익과 도덕적 환원 문제로 이해하며 이를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글 전반에서 듀이가 밝히는 대로 “민주주의는 수많은 비판을 먹고 사는 체제”이므로 이에 대한 다수의 공중에 의한 견실한 토론이 수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은 저 역시 강하게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대중 선거권과 다수결을 통해 개인이 제한받지 않는 주권을 갖고 있다”는 인식은 바로 앞선 부분의 근거가 될 것이고, 이렇게 전체적인 맥락에서 국가의 유해를 언급한 허버트 스펜서에 대한 비판과 오로지 금전-관계로만 결합된 사회 개념에 대한 토마스 칼라일의 인용은 이를 뒷받침한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우리의 계몽주의적 역사에서 과거, 인간의 진보와 권리의 증진에 기여했던 ‘개인주의’가 이 시기에 도달해서는 “개인주의 철학은 새로운 시대의 요구들을 충족하고 새로운 동인들을 이끌기에는 매우 부적절하다”고 듀이는 일침을 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보수주의가 개인주의와 결탁한 사조에 대해서도 분명한 비판을 첨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4장에서는 ‘가려진 공중’과 더불어 “민주적 정부의 기초로서 ‘개인주의’ 이론을 너무 심각하게 고려했다”는 점을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에 존 듀이는 공리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한계에 대해서도 인용하면서도 민주주의 내에서 아마도 법과 제도와 관련해 이 개인주의적 남용을 우려하고 있는 듯 한데요. 물론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이 개인주의가 법의 지배라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먼저 전제하고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기관들의 존재”등과 같은 법 외의 기반한 모든 이념과 기구 내지는 집단에 대해 확실한 경고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즉, 이러한 이해에 있어 유권자로서의 명백한 공중이 이를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하며, 조직화되지 않는 공중들이 해당 사회에 만연할 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는 이 글에서 뿐만 아니라 많은 민주주의 담론서에서 그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선결되어야만 하는 앞선 민주적 요소에 반하는 것들 중에 사회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무관심주의’와 이를 조장하는 오락에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것과 시간 때우기 수단을 제공하는 일이 가장 높은 이윤을 거두게 되는 사회 구조에 대해서 존 듀이는 경고와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4장의 결론에서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증기, 전기, 기계 탓으로 돌리는 것”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많은 이상들이 손상되어 가는 도중에 도덕주의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무분별한 자본주의화는 모든 먹고 사는 문제를 악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사회를 오로지 경제 논리로 몰아세웠던 점은 잊지 말아야 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 글에서 인용된 존 스튜어트 밀의 “어떤 사회적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여전히 인간들이다”의 의미대로 이 사회에 있는 우리가 더 나은 정치와 국가주의를 위해 열정을 갖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 민주주의적 가치를 계승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군중이 아니라 공중이 되어야만 하며, 스스로를 재교육하고 지식과 더욱 가까워지고, 우리 모두가 지성의 꿈을 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립된 개인이라는 이념, 인공적인 정치적 법칙과 자연적 경제적 법칙이라는 이념의 결과는 민주적 형태가 비틀리고 편향되고 왜곡되는 것”이라는 파행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리주의 경제 이론은 실천과 별개로, 민주적 정부 이론의 발달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 P93

만약 공중이 없다면 어떻게 그러한 공직자들이 공적인 공직자들일 수 있는가? - P115

우리가 국가에 대해 요구할 수 있는 최대치는 국가가 부당한 간섭을 하지 않고 사적 개인들의 아이디어 생산을 용인하는 것이다. - P65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내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허버트 스펜서는 이에 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 P68

대화의 결과들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둘을 넘어 확대되어서 다른 많은 이들의 복지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대화 행위는 공적인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단적으로 사회적 지식이 여러가지 사회과학 분과 학문으로 나뉘게 된 사실은 사회적 지식의 퇴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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