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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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리노이 주 워케건 출신의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는 전세계 에 두터운 SF팬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특히 연작 소설인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와 더불어 화씨 451 (Fahrenheit 451) 역시 미국 내에서 높은 판매고와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과 같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오로지 도서관에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자신 스스로를 교육’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브래드버리의 간략한 일대기를 읽는 도중에 문득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고전을 막론하고 소설 리뷰를 쓰는게 정말 오랜만이기도 한데요. 가장 최근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장편이었으니, 조금 오래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브래드버리의 이 화씨 451을 읽게 된 연유에는 지금 거의 다 읽어가는 줄리언 바지니의 ‘자유의지’에서 인용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책을 불태우는 방화사들이 나온다는 문구에 조금 혹하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꽤 여운이 남는 뒷 느낌과 함께 이 책을 일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Fharenheit 451’로 지난 195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여러 출판사 판본을 거쳐 2009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벌써 16쇄를 찍은 판본이었는데요. 이북으로 구매할까 헌책으로 구매할까 고민하다가 며칠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중고로 구입을 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을 SF 혹은 디스토피아적 사회소설로 받아들이고 계실텐데요. 다만, 개인들의 자유로운 지식의 습득이 터부시되고 금지된다는 측면에서는 사회 저변에 깔린 반지성주의화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지성인이란 말은 물론 들어도 마땅한 욕이 되었다”라든지, “이따위 책들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없어진 작자들이야”,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돼” 등과 같은 대사들은 매우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에게도 제법 적용될만한 수사라고도 느껴졌습니다. 사실 많은 일반인들 중에 책을 읽지 않는 대다수가 자신들과 다른 독서인들에게 갖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시민들 혹은 대중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수준과 의도 및 인식에 맞는 무언가를 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언제부턴가 일부에게는 독서라는게 매우 거리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기피되는 것은 어찌됐든 사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존 듀이는 시민들 스스로 자신을 위한 재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각자의 생계를 위한 목적이 먼저 충족되어야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 사회 구조로 계속 첨예화 되고 있어, 이것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 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인 가이 몬태그가 방화사라는 직업으로 일종의 책을 불살라내는 일을 하면서 그동안 이행되어왔던 ‘개인들이 지식을 스스로 구하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 사회적 봉쇄’에 대해 단편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변화의 틈에서 소설의 사건 진행과 나레이션이 시작됩니다. 이런 몬태그의 인식 변화를 불러 일으킨 매개가 된 것은 클라리세 매클런이라는 고등학생 나이의 어린 소녀였는데요. 그렇지만, 2부에서 몬태그가 마땅히 불살라버려야 하는 책들을 아내인 밀드레드 몰래 그 전부터 숨겨왔던 것으로 보아 클라리세와의 우연한 만남은 상황을 급진적인 전개를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몬태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그리 된 연유에는 1990년 이후 두 번이나 있었던 핵전쟁과 연관이 깊다고 추측되는데요. 시와 소설이 사람을 감상에 빠트려 자살에 이르게 한다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서술도 참혹한 전쟁 전후, 사회에 가중되는 압력 등을 고려해 본다면 생존을 위해 국가로 획일되는 사회구조를 수립의 목적으로 일정 부분 지식 말살에 전 국가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부분 기술발전은 이뤄냈는지 벽면을 가득채우는 텔레비전이라든지 과속과 다름없는 쾌속으로 스피드 감을 맛볼 수 있는 자동차의 존재, 로봇개 등 이런 전체적인 상황으로 짐작해 보면 몬태그의 사회는 테크노크라트가 정점으로 대신 시민들에게는 어떠한 재교육과 지식 습득은 거부하는 정부 기조와 그러한 분위기에서 대중들 역시 동조하게 되는 이중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단면에 의해 개인화 된 인물이 바로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거의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 하고 생각 자체를 아마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몬태그는 그런 자신의 아내에 대해 “자신의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2부에서 등장하는 파버 교수에게 살짝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 캄캄한 동굴 같은 신세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몬태그와는 달리 밀드레드는 아주 적절하게 그런 사회기조에 적응한 인물로 사실 여기에도 적응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반 자포자기와 현실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결혼 생활을 한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이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도 못하는 이 부부는 바로 스스로들의 ‘현실의 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이 전대의 수많은 인간들이 남긴 이 지식 유산들을 멸절의 대상으로 삼고 더욱이 이것들로 인한 사회가 나약해지거나 혼란스러워진다는 가정 하에 전면적으로 진행된 이러한 인간 개개인의 균질화는 마냥 이 소설을 디스토피아적 허구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뒷맛이 좋지 않기도 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그 자체로 허무맹랑한 일들이기 때문에 얼른 1984년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는 많은 미국인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듯이 스토리 라인의 전면에 있는 몬태그를 포함한 방화사 부서를 제외하면 많은 이 시대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만의 삶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단지 몬태그라는 인물 만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작은 실마리 삼아 손에 쥐고 있었지, 그 반대인 그의 상사 비티 서장이 자신은 충분히 이 세계를 인지할 만한 지식들을 머릿속에 집어 놓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현실에서 저항해내려고 하지 않고 몬태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자 했던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에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행동에 옮길만한 의지가 전무하다면 그 수많은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몬태그라는 이름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단어만으로 등장을 하는데요. 3부에서 쫓기는 몬태그의 이름인 ‘가이’가 처음 삽입되는 것으로 보아 몬태그의 운명과 그의 진정한 이름인 ‘가이’의 드러남은 뭔가 극적으로도 느꼈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또다른 핵전쟁의 불씨 등도 브래드버리가 삶을 살았던 1950년대의 핵전쟁의 공포가 어떠했는지 조금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핵무기 만큼 막강하고 공포스런 존재가 없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을 책과 지식의 그림자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벌였던 구조화가 꽤 높은 개연성으로 다가오는 이유 때문에 읽는 내내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쓸데없이 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접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브래드버리의 숨겨진 뜻이라고도 여겨지는 “적지 않은 이들은 개개인들의 지식 습득과 책읽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삶에서의 독서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교육하고 진실을 찾는 일에 매진하시기를 오로지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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