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합들 - 갈등과 적대의 세계를 정치적으로 사유하기 사상가들 총서 1
샹탈 무페 지음, 서정연 옮김 / 난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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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도 자신을 ‘정치이론가’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 샹탈 무페는 전세계에서 많은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는 여류 학자입니다. 특히 번역된 이 책의 간행 취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정치학 및 정치철학 분야에서 최근의 무페 만큼 조명을 받고 있는 학자는 흔치 않기도 합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학문적 동반자이자 삶의 동반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사상적 경향이 여러모로 견고화되었고, 라클라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대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또한 두터워진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더불어 그녀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분석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근래 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학문적 소명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책은 지난 2013년, “Agonistics :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글의 서문에서도 무페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바탕은 그녀의 공개 강연과 발표가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글이 대체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정치 제도를 방치하는 전략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최근 세계의 문제적인 경향들과 다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학문적 목표 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무페는 ‘경합’이라는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요.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는 안된다”는 명제 아래 “모든 쟁점을 따져보고 다만 이를 서로 적대화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앞선 단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경합을 통해 무페가 바라는 점은 “사회가 완전히 총체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즉, 단일대오 아래 정치적 선명성이 거부되고 오로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주장으로 총체화 되는 것에 대한 완벽한 거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유민주주의 기조 아래에서 서로 대치되고 대비되는 정치적 상대자들이 서로 괴멸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어쩌면 정치이론가들 내지는 정치학자들의 사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최근의 미국 정치 무대에서 풀뿌리 정치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티파티 운동”이 미국내의 모든 진보주의 운동을 사실상 격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은 이렇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총 6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장에서는 경합적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와 함의, 2장은 만약 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하겠는가에 대해. 3장은 다소간의 인위적이고 배타적인 집합통일로의 선택에 놓여 있는 현재의 유럽과 국가인가 지역인가의 유럽 논의를, 4장은 사실상의 포퓰리즘을 시사하는 오늘날의 급진주의 정치의 현주소를, 5장은 경합적 정치로 도출되는 현재의 보완적인 예술의 가치와 실천을, 그리고 마지막 6장인 결론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선, 1장은 그동안 제가 집중했던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의 다원적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근거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정성은 정확히 갈등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에 있으므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근절할 수도 없고, 또한 근절해서도 안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대결을 혐오하면서 합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 참여에 대한 무관심과 불만을 야기한다”는 전자의 부정으로 초래될 수 있는 측면을 이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적 대의가 수많은 의견들의 총합을 기본으로 통일된 주장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조정된 각각의 의견을 도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점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혼란과 의견 불일치를 더욱 강화시켜 기본적인 현실 정치에서 역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는 반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굳이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인간의 권리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현재까지 고안된 여러 정치 사상이나 이론들 가운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민주주의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일찍이 스피노자가 밝힌 바와 같이 권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체제나 제도의 결함보다는 그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드는 인간들의 본질적인 욕망에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권력들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측면의 이 민주주의는 따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을정도로 다수의 이익에 효과적으로 수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이익에 집중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민주주의를 사실상 거부하고 시장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공공선을 아예 시장에 일임하는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는데, 지난 40여년의 이러한 이행 가운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아주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적대없는 다원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먼저 여기에는 무페가 강조하는 대로 “갈등이 적대적 형태로 출현하는 것을 먼저 피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버마스가 주장한대로 시민들의 건전한 공론장이 많이 마련되어야하며, 저자인 무페가 대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이라고 이해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가 부화뇌동하지 않는 건강한 이성과 이를 통한 여러 학습들을 통해 합리적인 정치성을 갖추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2장에서는 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보편적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평등과 인민에 의한 지배, 즉 인민 주권의 이념을 특권화하는 이 민주주의 모델이 우리의 삶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강조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저자인 무페가 얼마나 강력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그녀를 사회주의를 품은 혁명주의자라고 급진주의와 같은 멋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전에 민주정치 아래에서 많은 좌파들이 지리멸렬한 것이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들에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민주제도를 답보하기 위함이라는 대의에는 실패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던 그녀의 이런 주장에는 앞선 논의들이 기반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가서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적 이상의 다층적 절합들, 종교와 정치가 다른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그런 절합들의 가능성을 구상하는 다원주의적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그녀가 진단하는 데에는 오늘날 대규모 이슬람 난민의 유입 사태에 놓여 있는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또한 이 점은 얼마나 우리가 효과적으로 다원주의적 사회를 향해 갈 수 있겠느냐에 대한 선결 과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3장은 앞서 간략히 설명한대로 오늘날 유럽의 선결 문제인 이슬람 난민들과 이주민들의 유입과 더불어 진정한 통합에는 거리가 먼 현재의 유럽 정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국가들의 유럽인가, 지역들의 유럽인가”라는 이번장의 소제목은 이렇듯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유럽연합은 주권의 담지자이자 민주주의 실행의 중심처를 제공하는 동질적인 데모스를 유럽적 수준에서 창안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는 제안을 상기해야 한다”고 먼저 저자는 언급하고 이러한 측면에서 사실상 오늘날의 유럽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좌파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유럽 연합의 틀 안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모델의 대안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반적인 이익을 위한 정치 제도화의 개변에 따른 지난 몇 십년간의 이행에 따른 다수의 고통에 눈을 감고 있는데요. 이것은 아직도 경제로 인해 사회는 진보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삶의 개선에 이르지 않았냐고 이들은 반문합니다. 즉,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 이행 자체에 대한 어떠한 결점도 없다는 식의 일방적인 수용화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탈정치화를 동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지는 4장의 오늘날의 급진정치 특히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이 앞선 3장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인 무페는 이 4장의 첫줄에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무소불위를 떨쳤던 날들이 다행히 저물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저는 여기에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러 출판계를 포함해 많은 학계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일겁니다. 그렇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우리의 비판에 의해 대안 가치의 부상으로 인한 쇠퇴인지, 그냥 그 반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대로 과거 좌파의 실패는 부정할 수 없고 이러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세력과 대안 세력이 전무한 가운데) 이어진 신자유주의화가 어떤식으로 나타났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다시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위와 탈정치화를 회복시켜 많은 시민들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조직하고 단일하게 만들 세력이 있는지는 부정확합니다.

따라서, “자유 무역이 진보를 이룬다는 잘못된 통념”을 얼마나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다중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겠는가”에 앞으로의 대안도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개인은 사회와 국가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절대적으며 환원 불가능한 존엄성을 지닌다”는 점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식의 민주 제도를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보여지는데요. 사실 장황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대해 쓸 글은 많지만 아주 중요하게 고찰해야 될 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신자유주의화가 마땅히 행해져야 했을 기본적인 민주적 가치를 외면하게 하고 시장이 무엇보다 우위를 점하는 식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구축시켜 왔다는 점에 있을겁니다. 여기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 인류가 얼마나 경제를 받아들였다고 애초에 인간과 경제가 같이 태어난것으로 여기는 경제학자들과 이러한 풍토에 비판했던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서 내리는 결론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적 공격을 함께 개시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저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정말 ‘일반지성’을 갖는 ‘자발적인 다중’이라면 최소한 현재의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적 인식은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많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이 현실에 맞는 이론들을 재정립화시켜야 하며, 시민들은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다원주의적 가치에 맞는 건전하고 힘있는 시민들의 권력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 앞으로 다음 세대와 전세계에 미래에 가장 필요한 해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이 책을 좀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의 일독이 무엇보다 필요한데요. 현재로선 절판되어 구할 수 없기에 이 점은 매우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시중에 다시 재간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민’, ‘인민주권’과 관련해 아직도 이데올로기적 가치관으로 투영해 보이는 외눈박이 분들이 있을텐데요. 얼마전에 국사를 가르치는 황현필 선생은 “이 인민이라는 글자는 사람인과 백성민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라는 취지로 강의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에 동의하고 더불어 우리가 장 자크 루소의 인민 주권과 그에 따른 공화주의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면 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이념적 단어로 몰이해하는 것은 이제는 그만해야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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