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역사 - 거래,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진실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재에 이르러 대단한 냉전 역사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존 루이스 개디스는 미국 텍사스 주 커튤라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난 후, 의외로 텍사스 대학에서 현대 철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후, 영국 옥스포드와 미국 프린스턴 대, 그리고 핀란드 헬싱키 대학 등지에서 방문 교수를 역임하며 비로소 그의 명성에 걸맞는 세계 현대사와 냉전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더불어 ‘냉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조지 케넌과의 밀접하고 돈독한 관계는 아마도 냉전사와 미국 현대 외교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넘어 천착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또한, 그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원고가 될지도 모르는 ‘조지 케넌’의 전기의 집필은 냉전사를 비롯한 미국 현대사에 대한 이 노학자의 집념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여기에 따로 저자인 개디스가 언급했던 이 책을 펴내게 된 목적의 변을 적어보고 싶은데요. 이제는 냉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많아진 만큼 이 냉전을 일반적인 교양 수준에서라도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는 그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번역 출간된 마이클 돕스의 글과 함께 같이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5년, “The Cold War : A New Histor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 살아남았다”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그의 소회가 이 냉전을 여실히 평가하는 문장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베를린 장벽과 구소련이 붕괴한 1989년과 마지막 1991년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첨예한 냉전의 기간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는가냐고 질문을 한다면 1945년의 분단과 1950년의 한국 전쟁으로 귀결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개디스의 이 글 역시 진정한 냉전의 시작을 바로 의도치 않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실용적이었던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중에 소련을 동맹국으로서 환영했다”는 문장은 전후 스탈린의 비타협적인 소련의 팽창을 루즈벨트가 어느 정도 인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관된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보인 처칠과는 달리 스탈린은 “그의 겉모습 뒤에 신중한 타산, 야심, 권력욕, 질투, 잔인성, 그리고 교활한 복수심이 숨어 있음”을 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전후 그리스에서의 혼란에 영국이 재빠르게 책임을 뒤로하고 바통을 이어 받은 미국에 이 그리스 카드를 이용해 스탈린은 전후 구상인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우선권’을 따내게 됩니다. 물론 상당히 민주주의가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에 스탈린이 붉은 군대를 파견한 것은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더욱이 냉전 시기 동안 NATO의 존재와 함께 다루었던 다소 배타적인 핀란드 문제는 다수의 서유럽 국가들이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와는 구별되게 이 글 1장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이 오로지 바랬던 것은 바로 “안전보장”이라고 언급됩니다. 1949년까지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했던 미국이 자신의 안전보장을 추구했다는 것은 약간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근래 읽었던 많은 미국 정치와 관련된 책에서 미국 유권자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시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스탈린의 구상에 반항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입니다. 사실상 모스크바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티토는 이후 소련의 징벌을 받을것이라고 여겨졌으나, 오히려 그는 워싱턴과 가까워지면서 역사의 확신을 거부합니다. 바로 이후, 마오쩌둥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나있다고 여긴 스탈린은 “차이나 핸들러”로서 당시 김일성에게 한국 전쟁을 승인하고, 이후 전세의 영향에 따라 중국을 지원카드로 내세우는 등의 방안을 마련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신속한 참전에 다시금 냉전의 서막을 일깨우게 됩니다. 고작 작은 땅덩어리 남한을 공산화시키는 것을 모욕이라고 여겼던 트루먼은 아주 재빠르게 (전쟁이 발발한지 거의 12시간도 안되어) 참모들을 소집하고 더 나아가서는 유엔에 회부하는 등의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이 한국 전쟁은 그동안 재건에 나서고 있던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 보장이라는 측면의 외통수였으며, 애치슨 라인을 차치하더라도 워싱턴은 이를 마냥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전쟁 와중에 “워싱턴의 유럽 동맹국들은 확전을 생각하면서 겁을 먹고 제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언급에서 맥아더가 부르짖었던 핵무기 사용과 더불어 한반도 무력 통일이 왜 불가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맥아더는 이를 인식하는 동시에 수용하고 이후 워싱턴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글의 후반부인 5장에서 이 냉전을 요약하는 “전쟁 억지 전략가들은 방위 대책이 전혀 없이 차라리 미사일 수만개를 즉시 발사되도록 배치해 놓는 것이 국방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확신했다”는 개디스의 평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1983년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연합 훈련인 “에이블 아처 83 Able Archer 83”의 두 번의 핵전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상호확증파괴 MAD는 차치하더라도 아예 민간인들의 절멸까지 인식하는 두 강대국의 핵대결은 물론 냉전을 종전시킨 세 명의 트로이카, “로널드 레이건, 마가렛 대처, 레흐 바웬사”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기 전까지 아마도 우리에게는 거의 생존의 문제였을 겁니다. 개디스는 본문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인간사의 피폐화를 무조건 답보하지는 않았다고 비평하고 있습니다만 일전에 스탈린이 자본주의 국가들 간에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이 마르크스 교조주의가 허구로 밝혀졌던 것만큼 전세계 민주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체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개디스는 “정당성과 정의는 다르다”는 헨리 키신저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 키신저를 비판했던 자유주의자들의 말에 문득 답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외 정책이 언제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고, 따라서 안정을 일순위로 추구하는 키신저의 냉소적인 태도를 비난했다”는 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이 첨예한 냉전 구도의 시기에서 미국의 CIA가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과테말라에서 1954년 아르벤스 구스만 정부를 몰락시키고, 1961년에 케네디 행정부가 벌인 쿠바 피그만 침공의 수포, 그리고 1970년 선거로 선출된 칠레 민주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3년간이나 몰락시키기 위해 고군부투한 당시 백악관과 후에 군부 쿠데타에 끝장난 칠레에 대해 헨리 키신저가 적잖이 안도했다는 회고를 붙인 것은 키신저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냉전 시기에 미국과 자유 진영의 생존의 사활적 이익이 달려 있다고 하더라도 CIA가 외국 정부를 몰락시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과거 매카시즘에 대한 것만으로 적당한 교훈을 미국인들이 얻었다면 스스로 민주주의의 맏형 국가를 자임하면서도 어떻게 선거로 당선된 민주 정부를 퇴출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양심에 의한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고찰이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을 키신저가 그냥 국제 외교에서의 단순한 낭만주의라고 취급하려고 하는 부분은 노련한 외교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닉슨이 벌인 일들로 인해 그의 하야 이후 법 위에 대통령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중차대한 헌법적 관념에 비해 CIA가 외국 정부에 벌인 일들을 그냥 위법 정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약간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레이건이 특유의 단순명료함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통찰을 보여왔다고 평가하는 것에서도 그가 닉슨과 같이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과오를 만들어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할겁니다. 더군다나 레이건 임기 말년에 이란-콘트라 게이트의 관련자들에게 연방 대통령령에 의거 면죄부를 쥐어준 것 또한 대비되는 레이건과 닉슨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지만 민영화와 더불어 진행된 신자유주의화에 대해서도 보이는 저자의 애매한 태도도 약간 아쉬워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강조하지만 상호 멸절의 대결 구도에서 “미소 관계에서 오로지 추구했던 것은 안정화”였던 만큼 그와는 다르게 반대로 진행된 대규모 핵무기 감축 조약과 더욱 개량된 탄도탄 미사일의 개발과 배치 등은 수없이 많은 우발적인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평화를 위한 노력과 서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미국 동맹국들에게서 진행된 민주주의적 이행이 좀 그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여기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키신저가 “세계는 2차대전 종전 이후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면모일 것입니다. 물론 개디스가 언급하는 민완 외교관인 키신저에 대한 꽤 긍정적인 평가가 글 곳곳에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역사가의 입장에서 백악관의 주요 행위자였던 헨리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측면의 진술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입체적인 분석은 스탈린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행적, 수많은 백악관과 크레믈린의 주인들을 통해서 이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은 저자인 개디스의 수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 첨언으로, 스탈린이 한국 전쟁에서 신속한 미국의 개입을 오판한 것은 당시 백악관이 대만으로 쫓겨난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구원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고 개디스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더불어 앞서 밝힌대로 트루먼이 이 남침을 미국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덕분에 과거 애치슨 라인에 대한 실제적인 외교적 평가가 그동안 공개된 여러 외교문서들로 인해 ‘개인적 의견’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은 뭐랄까요 역사의 드러난 선명성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는 분들에 따라서는 최근에 번역된 개디스의 “미국의 봉쇄전략”과 갈등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전반적인 내용은 전자가 더 상세하고, 여기의 “냉전의 역사”는 약간의 개론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분명 양자는 각각의 일독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번역은 후자가 좀 더 나아보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