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된 정신 - 정치적 반동에 관하여
마크 릴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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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릴라는 근래들어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정치철학자입니다. 최근에 제가 두루 읽었던 책들에서도 심심찮게 인용된 마크 릴라를 발견할 수 있었고 더욱이 미국 언론에서도 그의 동향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뉴욕 서평’과 ‘뉴욕 타임즈’에 기고하는 그의 이력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요. 특히 뉴욕 서평에 대한 마크 릴라의 집중은 꽤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의 인문학 교수를 맡으며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학문적 관심과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6년에 “The Shipwrecked Mind”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9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마크 릴라의 이 글은 일종의 비평집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마지막 3부를 제외하면 그가 밝히는대로 과거 “뉴욕 서평”에 게재했던 논고들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다르게 3부는 2015년 1월 7일에 있었던 ‘샤를리 에브도’지의 이슬람인들에 의한 충격적인 테러 사건에서 비극적인 영감을 받아 작성한 글로 언론인인 에리크 제무르와 소설가 미셀 우엘벡의 ‘복종’을 기반으로 한 글입니다.

흔히 우리는 보수의 반대를 진보라고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반동’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기에 마크 릴라는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며, 반동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대와 역사의 반동을 특유의 신랄함으로 써가고 있는 그는 ‘반동’을 약간의 처연한 시대착오의 감정으로 보고 있는 듯 싶기도 했습니다. 1부인 사상가들에서는 2차대전을 거쳐 유대주의와 유대교에 집중한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와 기독교에서 주변의 신앙과 종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기 위해 고도화 된 언설 내지는 이론으로 집약된 ‘그노시스주의’와 그 아래에 있었던 ‘학문주의적 다작가’ 에릭 뵈겔린 그리고 그의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다소간 잘못된 인식을 받고 있는 히틀러의 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친구, 레오 스트라우스를 중심으로 과거의 노스텔지어에 대해 저자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금 부끄럽게도 마크 릴라의 이 글을 통해 제가 갖고 있던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한 편향된 해석을 반성할 수 있었는데요. 그동안 네오콘의 대부로 알려져 있던 스트라우스에 대해 적지 않은 음모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스트라우스가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각종 원전에 능통하여 갓 인문학의 토대를 잡아가고 있던 당시 미국 대학의 많은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릴라가 소개한대로 기본적인 원전과 가감없는 문단과 해석에 집중했던 스트라우스의 교수 방식이 뭔가 그로데스크한 음모론을 만들어 낸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를테면 조지 W. 부시 시대에서 기력을 떨친 네오콘들이 자신들의 스승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남긴 어떤 원전과 숨겨진 지령을 갖고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비밀 결사와 같은 태도로 임하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해석 같은 것들 말이죠. 물론 이건 약간의 농담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실 겁니다.

아주 간접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마크 릴라가 해석하는 반동주의의 이면에는 아마도 직접적인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계몽주의가 신이 국가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문명을 처음 생겨나게 한 신격화의 관행을 철폐할 수는 없었다”는 그 특유의 한계와 마르틴 하이데거가 굳게 믿었던 “오늘날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파시즘이 인류와 존재의 신뢰 관계를 되찾아 줄 것”이라는 망상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것또한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논의가 확대되는 2부에서 과거 정교일치 사회인 중세 기독교에서 교황들간의 권력 투쟁, 현실 정치와의 갈등, 교회가 탐욕에 물들어 민중들을 피폐한 상태로 몰고간 이면에는 물론 교회의 타락이 존재하지만 계몽주의 자체가 가톨릭계의 최후 저지선인 양극의 조화 complexio oppositoru - 일견 모순적이고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서로 어울려 균형을 이룬다는 생각- 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일종의 역사가 반복되는 행태를 나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를들면, 2차대전 당시 교황 비오 12세가 히틀러에 대해 보인 태도를 보면 이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기독교가 숙명적으로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늘날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용인하는 개인들의 삶에 어떤 종교적 안식으로 기여하는 역할에 변화를 수용했다면 좀 더 일찍 인류가 ‘어둠의 시대’를 탈출했을지도 모릅니다. 굳이 ‘계몽주의적 프로젝트’가 아니어도 말이죠. 그리고 현 시대에서 가장 큰 문제인, 마찬가지로 저자인 마크 릴라도 인정하는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정합성의 도덕주의적 원칙”을 세우는데 기독교가 사실상 실패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의 폭력적 이행 가운데 인간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는 튼튼한 도덕적 원칙을 정립하는 데 실패로 귀결되어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후쿠야마와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은 탈기독교적 이행이 이러한 파행을 만들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의 본질은 기독교가 자신들의 밥그릇 싸움에 집중한 나머지 어린 양들을 돌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많은 신정보수주의자들처럼 대중영합주의적 전환을 시도한다”고 비판하는 것이 도덕적 다원주의의 혼란을 만들었다고 저자가 일침을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양가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게 앞선 계몽주의 프로젝트가 기존의 건전한 전통이 “도덕성을 뿌리내리는 일을 도맡아온 모든 건강한 사회의 노고까지도 무효가 되었다”고 마크 릴라는 평가합니다. 사실상 반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전통주의적 과거에로의 향수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종교의 측면에서도 현재의 가톨릭 고위층들이 터무니 없는 정교일치 사회로의 회귀를 부르짖는 것은 아닐지라도 좀 더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은 마음은 작든 크든 존재할 것입니다. 역대 교황들이 벌인 퇴조와 망령과 같은 일들에 대한 저자의 신랄한 풍자와 비판은 섣부른 과거로의 향수가 어떤 의미인지 짐작케 합니다. 뒤이어 2부 후반부에 저자는 프랑스와 유럽에서 보여지는 특별한 알랭 바디우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습니다. “알랭 바디우는 1970년대에는 급진적인 마오주의자이자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의 옹호자였으며, 이제 거의 여든이 다 되어서도 여전히 중국의 문화혁명을 따뜻하게 묘사하는 글을 쓴다”고 저자는 바디우의 가려진 본질을 설명합니다. 특히, 카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가차없는 분석과 곁들여 이에 바디우와 동질화시키고 있는데요. 마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을 단순히 ‘혁명의 노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낭만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자의 태도는 분명 아닐 것입니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평가에 따르면, “가장 현명한 철학자란 자신이 공동선을 생각하는 정치적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자다”라고 했을 했을 때, 그동안 바디우가 진보주의에 갖고 있던 영향과 가능성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아쉬운 면모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크 릴라가 진단하는 오늘날의 좌파는 “거의 전적으로 하계에만 존재하는 역설적 형태의 역사적 노스텔지어가 전부이며, 그것은 바로 ‘미래’를 그리워하는 노스텔지어이다”라는 뼈아픈 함축적 문맥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3부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관용의 가치에 살해와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앙갚음 했던 이슬람 교조주의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2015년 1월에 무함마드를 풍자했던 ‘샤를리 에브도’에서의 충격적인 테러 사건과 그 결과에 적극적으로 시류에 결탁해 나선 반동주의적 언론인 ‘에르크 제무르’를 꼬집어 저자는 분석하고 있는데요. 그는 ‘프랑스의 자살’이라는 책을 써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이런 이슬람에 대한 선동적인 문구로 죽음의 위협을 받아 경찰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미셸 우엘벡 역시 국내외에 특별한 관심을 받은 ‘복종’이라는 장편으로 프랑스 수상이 그를 비난해 나섰고 이후 증오의 대상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감상을 남긴 기고문이 수록된 것이 바로 3부가 되겠습니다. 앞선 제무르는 자신의 글로 수많은 독자들의 분노에 찬 절망감을 자극했고, 어쩌면 프랑스 극우주의가 원하는 논법을 때마침 제시해 준 것으로도 읽혀졌습니다. 또한 현재 유럽의 붕괴와 무슬림의 유럽 부흥을 비극으로 봐달라고 했던 우엘벡의 작품 역시 자신의 취지와는 상관없이 프랑스 사회에 격렬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이 책을 접했던 분들은 마크 릴라의 서평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논하는 것은 꽤 마술적이고 묘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갖가지 이론을 붙여 뼈와 살을 만들어 주요한 논제로 만드는 것 또한 지성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언급되는 인물들과 사건의 실체처럼 인류가 걸어왔던 노선에 후퇴를 초래하고 자신의 나르시스즘적인 만족에 치중해 다수에게 필요한 진실을 오도하게 만드는 반동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보수주의가 누리는 마땅한 근거성을 반동주의가 결코 바래서는 안된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현재의 절망감으로 비롯된 분절된 과거로에 대한 무분별한 향수는 반동 자체의 모순적 결론이며 그것의 파급은 가까운 미국과 프랑스에서 충분히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크 릴라는 우리에게 충실한 목격자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마크 릴라는 이 글에서 카를 슈미트의 ‘정치 신학’에 대한 고유한 비평을 하고 있는데요. 크게 참고할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레오 스트라우스 그리고 한나 아렌트를 비롯한 유대인 지성인들이 2차 대전 전후에 등장해 세계의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은 언제봐도 놀랄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특히 마크 릴라가 해석하는 하이데거와 스트라우스의 비교될만한 행적 역시 꽤 인상이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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