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 -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신호들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최이현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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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북부 지역인 세인트 존스 우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줄곧 성장한 데이비드 런시먼은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거쳐 현재 켐브리지 정치학과 교수로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은 ‘정치적 위신’, ‘정치’, ‘대표’ 등의 6개의 주요 저작과 더불어 여러 영국 언론에 글을 기고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토킹 폴리틱스’에서 토마 피케티, 주디스 버틀러, 존 란체스터 등을 초대해 정치적 현안과 시대적 요구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구성한 바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전에 서평을 쓴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에 이어 두 번째 글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How Democracy Ends”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근래인 2020년 4월 초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인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런시먼의 이 글에 대한 한줄 평가를 다음과 같이 먼저 하고 싶은데요. 아주 간략히 말해, 이 책은 ‘정치적 수사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저의 개인적 평가입니다. 이를테면 이 글 3장에서 주요 논지로 비판하고 있는 반동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평가 “싫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경멸감이 대안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보다 훨씬 크다”와 같은 수사적 비유는 꽤 시의적절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달리 말하자면, 앞의 비유는 ‘포퓰리스트 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고도 생각됩니다. 물론 이에 못지 않게 많은 정치학자들과 인문학자들의 논저들이 인용되고 있는데요. 이 점 역시도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덕이 단순한 단편 소설을 쓰더라도 그것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몇번이나 강조를 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글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이 글은 총 4장의 주제로 (논증적 측면에서) 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만,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태로운 지경에 빠트릴 수 있는 요소와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 뒤이어 대안과 해결방안이 포함된 결론”이 중요한 큰 틀이긴 합니다만 단순히 정치학적인 접근 뿐만 아니라 정치철학적 분석과 이에 대한 문제점과 현실 정치에서의 다소간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서로 연관되어 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경계가 구분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정치와 정치철학 및 사회구조학적 측면의 논증과 서술이 그렇습니다. 먼저, 1장에서 런시먼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에 빠트릴 수 있는 쿠데타의 가능성에 대해 먼저 그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런시먼은 이에 1967년의 그리스에서의 쿠데타와 비교적 최근인 2016년의 터키에서의 총리 에르도안의 친위 쿠데타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사망 선고에 이르게 하는 소위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역시 문제지만, 설사 “구경꾼 민주주의”가 아닌 실제 시민들이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종식시켰을 때, 그 파장으로 도래할 수 있는 보존된 기존의 권력에 의한“행정권 남용 내지는 행정권의 확대” 역시 민주주의의 위협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합니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기만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며,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마음을 일부러 비틀려고 작정한 독재자가 지배하는 (사실상의) 전체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이 시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이 시대에 쿠데타의 위협과 전체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점이겠죠. 사실 런시먼이 진단하는 쿠데타와 관련해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요소로 보는 것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쿠데타”입니다. 뭐 이 점은 보는 관점에 따라 허무맹랑하다고 볼 수 있겠으나 여기서 중요한 부분응 민주주의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사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취지입니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겠느냐에 대한 가능성은 부분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과연 보다 성숙한 민주 사회에서 과연 군부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본질적인 문제겠죠. 즉, 이집트와 터키와 같은 국가들 -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고 정치 체제상 권력 분산의 제도적 근거가 미약한 - 에게서는 그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자도 동의하듯이, 미국과 같은 국가가 군부 쿠데타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이 점은 미국이 군산복합체에 영향력이 전무하다고 볼 수 없다는 측면에서 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고안하고 제도적으로 200년간 지속되어 온 민주주의에 대한 제도적 견고함과 시민의 인식이 뿌리 내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우리에게 왜 민주주의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에 시작된 민주주의는 플라톤이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았지만 권력 분산을 효과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발견되지 못했거나 그 적절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겁니다. 이에 대해 런시먼은 이 글 4장에서 “실용주의적 독재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에서 이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고 있습니다. “중국 국민은 인도 국민보다 절대적 빈곤과 그 결과 (영양실조, 문맹, 조기 사망) 때문에 고통받을 가능성은 적지만, 무책임한 국가 공무원의 손에 희생당할 확률은 더 높다.”고 비유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원칙적으로 꽤 실용적이고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독재 정치라고 하더라도 소수의 손에 어떠한 합법적 장치 없이 이행되는 정치 권력이 공공선이라든지 도덕적 원칙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는가에 대한 회의가 먼저 수반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런시먼 역시 “개인적 평안함이라든지, 부의 안락함” 등을 무조건 경멸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듯이 여기에는 양자 사이에 균형감각이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현재의 ‘공격적이고 만연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시대’에서 도리어 개인의 경제적 이익 추구나 그에 따른 안락함의 인정 등이 공공선의 측면이라든지 전통적 도덕주의적 환원을 비교적 등한시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과 같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획일적 강조를 기계적으로 요청하기 보다는 존 듀이가 일전에 언급한대로. “시민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재교육에 이르는 그 과정”이 자발적으로 필요한 것이 여기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대 정치 및 현대의 위협은 크게 기후 문제와 같은 민주주의가 해결하기 힘든 난제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미국의 트럼프의 정치 일선 등장은 참으로 복잡한 환경을 조성하게 되었는데요. 그가 파리 기후 협약을 탈퇴하고 소위 미국 우선주의로 스스로의 독트린을 만들어 낸 것은 사실 찰스 틸리가 말한 “예측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의 전형이라고 할만합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탄생이 현대 민주 정치의 종말이라는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트럼프의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즘과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불신하는 태도는 그것 자체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신념 체계로 작동하여 핵무기 사용과 같은 극단적인 단계에 이르러 과거 케네디와 흐루스초프와 같은 한발 물러섬을 과연 단순히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을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이러한 도널드 트럼프의 여정을 지켜봤을 때, 런시먼이 다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포퓰리즘’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정치의 사활적인 역설이라 할 수 있을겁니다. 단순히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불신과 경멸만 갖고는 포퓰리즘적 지도자의 카리스마에만 의존하는 것은 꽤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동안 왜곡되어 인식된 민주적 제도 하에 숨겨진 엘리트들의 의사 결정 과정만을 놓고 이것을 타도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도 지나치면 과두제에 이르게 만드는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비판을 그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만,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평가가 이어지는데요. “고학력자들을 포함해서 교육받은 사람들로 다른 사람들 만큼 자주 도덕적 정치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그가 무조건적으로 고학력에 대한 맹신과 더 나아가 엘리트 지배 체제를 쉽게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루즈벨트의 내각이 당시 정치경제적 위기를 극복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극도의 불안과 경멸만을 지닌채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본질을 우리가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카데와 같은 입장으로 런시먼 역시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고 있습니다만 원칙적인 측면에서 이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과 인사들이 문제일 것입니다.

발전된 기술과 지식인에 의한 통치 혹은 기술 관료 집단의 지배 체제라고 볼 수 있는 소위 테크노크라시가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하는 점을 밝힌 런시먼의 의도는 매우 명확합니다. 그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이긴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은 결국 지식인들이나 정치인들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책임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각계 각층의 이익이 충돌하고 서로에 대한 불협화음과 경쟁, 갈등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혼란한 상태를 만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큰 장점은 “특유의 정치적 포용력과 다원주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에 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영국의 어느 언론에서 내일 있을 우리 선거에 대해, “주요 민주주의 국가중 코로나 사태에 가장 먼저 치러지는 선거”라고 하는 점은 꽤 마음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30년이 조금 넘은 우리 민주주의 정치가 주요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은 우리가 이집트나 중국, 가나, 인도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라 할 수 있겠죠. 쓰다보니 이번에도 꽤 장황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만, 런시먼의 이 책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협과 앞으로 미래의 민주주의와 더 나아가 우리가 겪게 될 정치 체제에 대한 여러 가능성 등을 꽤 합리적인 근거로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도록 국가가 보호한다”는 논법이 옳다면 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의 민주제도라도 생각됩니다. 법과 제도로서의 국가와 다양성을 포용하고 권력의 분산을 효과적으로 이행하는 민주주의는 어찌됐든 매우 중요한 가치임에는 분명합니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불신하는 ‘질서와 통제를 우선하는 이들’에게도 그 필요성은 마찬가지라고 여겨집니다.


- 1. 본문에 핵 종말의 네기사 the four horsemen of the nuclear apocalypse 에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윌리엄 페리, 샘 넌 이 포함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키신저가 저기에 들어가 있다는 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four horseme은 성경 요한게시록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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