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래너 미터 지음, 기세찬.권성욱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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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출신의 영국 역사학자인 래너 미터는 영국 켐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뒤, 미국 하버드에서도 단기간의 체류를 통해 자신의 전공 연구를 지속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중국 역사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연구로 명성이 높기도 한데요. 이를 통해 현재 옥스포드의 정치국제관계학과에서 중국의 정치와 역사 그리고 국제관계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불어 중국과 관련된 이슈와 관련해 영국 정부에 조언을 하는 등 영국 내에서는 꽤 전도유망한 중국 관련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 책은 지난 2013년 원제 “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45 for publication in the US”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0년 3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래너 미터의 이 글은 엄밀히 따지자면 존 키건이나 제러드 L. 와인버그와 같이 각각의 전략과 전술을 담은 전쟁사로 보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한 관점이라면 제목대로 중일 전쟁의 전쟁사적 측면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장제스와 국민 정부(혹은 국민당 정부)가 이끄는 당시 중국의 정치와 국제 관계 그리고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의 행적과 해석이 매우 상세히 담겨 있는 복합적인 역사 서술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글 초입에는 독자가 상당히 오해가 들도록 장제스와 왕징웨이에 대한 대결 구도가 중점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온전히 장제스를 중심으로 이 글은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서구의 인종주의적인 장제스의 분석에서 좀 더 탈피해 그에 관한 꽤 인간적인 면모와 정치적 갈등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물론 이러한 시도가 장제스의 정치적 과오를 덮는데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가 결정한 여러 정치군사적 행위 중에 후안무치하고 도덕적 기준까지 내다 버린 황허강 제방을 붕괴시킨 것과 후난성의 성도 창사가 지리적으로 취약해 일본군이 점령하기 전에 도시 자체를 초토화 시킨 이 두 가지 사건 만으로도 장제스가 얼마나 자기-권력적 인간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선 황허강 제방을 붕괴시켜 84만 4489명을 수장시키고, 480만명의 이재민을 만든 것은 그가 과연 인간 백정과 다를게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이후, 중국에서 등장한 많은 정치지도자 가운데 쑨원은 꽤 주목할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실 권모술수가 능한 인물들에 의해 속임을 당한 것을 꼬집어 그가 순진한 인물이 아니었는가에 대해 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백하게 당시 중국에 있어서 매우 필요한 정치지도자 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그가 너무 급작스럽게 병으로 쓰러지고 난 이후에 그의 정치적 후계자로 장제스가 등장한 것은 결국 중국 현대사에 있어 불행했던 일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불리웠던 왕징웨이 역시 자신의 권력 욕구는 분명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우유부단하고 또한 이후 매우 잘못된 결정을 통해 한간(우리의 친일파와 같은 취급)으로 격하된 것은 국가에 통제되지 못한 채 각 지방의 군벌들의 존재처럼 일본과의 대전을 앞둔 그 시점에 지지하고 따를만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은 다수의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미터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오쩌둥의 한계 역시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데요.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은 소위 정풍운동이라는 것을 통해 무고한 이들과 반대자들을 숙청하고 더욱이 일반 국민들에게 마오쩌둥의 사상을 암기하게 하는 등의 당시에 전혀 쓸데없는 일이나 벌인 점 역시 비판 받을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최종적으로 1949년에 중국의 일당 지배에 성공한 것으로 인해 승자의 역사로 미화해 그의 행적들을 다소 미담으로 만든 경우도 있으나 미터가 밝히는 역사의 진실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1937년 7월 7일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과 유사한 빌미가 된 루거오차오 사건 이후, 1931년 이래 만주의 실질 지배를 하고 있던 당시 일본 제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게 됩니다. 당시 중국을 통제하고 있던 장제스의 국민 정부는 그의 카리스마와 통제력 밑으로 수많은 군벌들을 정치적으로 조율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군벌 국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937년 이전까지 중국에 군사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독일 무관들의 훈련 지원으로 장제스 휘하에 87사단과 같은 상당한 정예 사단이 있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는 각 지방의 군벌들을 제어할 만한 충분한 힘이 장제스에게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그나마 장제스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속으로 다른 생각을 품으면서도 군벌들이 그의 명령에 듣는 척이라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북부와 산동 지방을 손쉽게 일본군에 빼앗겼던 연유에는 물론 일본군에 비해 장비와 훈련이 열악한 측면도 있었으나, 지방에 혼재해 있던 권력들이 스스로 딴주머니만 차려고 하는 무능과 통제력 상실이 주요한 연유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애초에 장제스는 베이핑과 우한 그리고 난징을 잇는 거대한 삼각 방어를 실현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으나, 최정예 부대를 투입하고서도 실패한 상하이 방어는 이러한 말뿐인 전략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그 끔찍한 난징에서의 비극을 뒤로 하고 장제스는 충칭으로 자신의 정부를 이전하기 까지 합니다. 특히, 이 난징에서의 학살 소위 ‘난징의 강간’을 서술한 이 책의 7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그에 못지않게 군대 양성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냅니다. 강력한 훈련과 최신의 장비 지급은 일본군이 최소한 과거 봉건 국가들에서 볼 수 있던 약탈과 폭력, 강간 등은 그래도 스스로는 다르다고 여겼으나, 난징에서의 그 참혹한 사건은 그 이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이 사건에 대해 한가지 통찰을 보여주는데요. 분명 변명은 되지 않으나 이어지는 극심한 전투를 통해 분노가 극에 달한 일본군이 거의 조장된 분위기에 따라 민간인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무고한 젊은 청년들을 참수하고 난징을 인세의 지옥으로 만든 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서구에 지원이나 도움을 바란다 하더라도 저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판단입니다. 다음 쉬저우 공방전과 황허강 제방 붕괴 이후 속속들이 일본군에 투항하는 중국인들이 등장하고 여기에 왕징웨이의 난징 부역 정부가 들어선 것으로 장제스의 무능과 그의 곁에서 제대로 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인간의 부재는 이러한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은 중국이 일본 육군 60만을 늘어지고 있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티베트와 버마를 통한 물자 지원을 확대시키고 있었습니다만, 버마에 지배권을 갖고 있던 영국의 비협조와 중국 내부에 있던 미국의 정보 조직인 OSS와 장제스에 대한 극심한 불신은 장제스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정치적 난맥상이 분명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장제스를 대신할 대안이 없다는 점이 심각한 수준이었고, 그저 일본군의 진격을 받으면서도 군벌의 통제를 강화하는 것보다 소련 스탈린의 도움이나 바라고 충칭에 들어 앉아 영국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만을 바라기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습니다. 물론 그가 여러 사건이 지난 이후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소회를 밝히는 것을 저자는 소개하면서 어쩌면 그의 무능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당시의 정치시대적 상황이 장제스에게 녹록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나 자신의 부인인 쑹메이링을 비롯한 처가가 권력에 나서는 것을 위협으로 느끼고 그가 간혹 울음까지 터트린 것을 보면 실로 그를 편만 들 수 없는 상황임은 확실합니다. 여기에다 앞선 부분에서 설명한대로 그가 저지른 몇가지의 심각한 비도덕적이고 비인도적인 결정은 과연 권력 앞에는 어떠한 것도 우선되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언급이 실로 진실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장제스와는 반대로 전쟁 당시 심각한 기근에 휩싸인 민초들을 설명한 14장의 허난성 대기근도 주목할 만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농촌 마을의 장정들이 자신들의 허기를 견디지 못하고 길을 가던 부녀를 납치해 내장을 드러내고 어떻게 삶아 먹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당국의 혹독한 고문을 통해) 이를 자백했던 것으로 보입니디만 이러한 사람들의 식인 행위가 꽤 뚜렷하게 있었고 이를 증언하는 사례가 이 책에서도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런 총체적 난국이 당시 비평가인 시어도어 화이트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군이 과거 수십 년 동안 중국을 휩쓸었던 대다수 군벌들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이렇게 사리사욕만 채웠떤 군벌들이 중국의 상황을 가일층 악화시켰고 이러한 실정(식인과 같은 비참한 상황)이 비로소 미국에 알려졌을 때, 장제스와 중국에 대한 동정 여론이 돌기는 커녕, 다수의 미국 지식인들을 포함한 미국인들이 혐오에 마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1941년부터 전쟁 막바지에 이르는 시기에는 장제스가 치뤘던 몇가지 정치적 손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 군사 고문 조지프 스틸웰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틸웰은 미국 군부 가운데에서도 꽤 유명한 중국통으로 아마도 1942년 전까지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를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버마 작전을 포함한 전략적 실행 순간에 장제스와 스틸웰은 사사건건 대립했고, 장제스의 부인 쑹메리잉이 7개월간의 미국 방문 시기에 여러 실질적 검토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말 안듣는’ 스틸웰을 소환시키려 하였으나, 참으로 어이없게도 장제스 대원수는 스틸웰과 잠정적 화해를 하게 됩니다. 이런 그의 착오의 결단은 가까운 미래에 윈난성에 쌓여 있던 비축 물자의 반출을 스틸웰이 거부함으로써 장제스에게는 또 한번의 패착으로 귀결됩니다. 특히, ‘버마의 실패’인 스틸웰을 소환시키지 않고 화해하게 된 연유에는 분명 어떤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이나, 스틸웰이 자기 정치와 자기 이미지에 몰두한 인간이라는 것을 이해해보면 장제스와 스틸웰의 재결합은 결국 파국을 예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끝으로, “충칭에서 동쪽 저 너머로 향할수록 국민 정부(장제스 정부)가 서류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휴지조각이 된 지폐 이상의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워졌다”는 14장에 나와 있는 저자의 평가는 이 불행한 시기에 또 얼마나 더 무능하고 불행한 정부가 다수의 백성들을 피폐한 삶의 고통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을 겪게 만들었는지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잘 목도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저는 여기에 영국의 처칠이 주요한 거악을 독일에서 일본으로 향하게 만들지는 않겠다는 취지의 노력이 루즈벨트에게 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순히 그저 장제스의 중국이 일본 육군의 바짓가랑이만 잡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의 내각은 장제스로부터 만주국을 승인받고 (물론 이는 왕징웨이의 손에 이뤄졌지만) 노몬한 사태 이후 소련과의 불안한 중립과 중국 전선에서의 안정이 결국 진주만 사태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진주만 공습을 위해 중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는 확대 해석이 아니라 이러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자마자 미국을 손봐줘야겠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어리석은 결정을 초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명목상은 미국 정부의 일본에 대한 금수 조치이기는 합니다만, 육군에 비해 실적이 미미했던 일본 해군이 주도하는 진주만의 공습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귀결되고 말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고도 말씀드리고 싶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 글을 내내 읽으면서도 번역이 정말 탁월하여 막힘없이 술술 진도를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번역자들의 노력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근래 재출간 된 A. J. P. 테일러의 글과 함께 래너 미터의 이 글 역시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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