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의 세기 - 독일 망명자들과 냉전의 이데올로기적 토대
우디 그린버그 지음, 이재욱 옮김 / 회화나무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이 글의 저자 우디 그린버그는 현재 미국 뉴햄프셔에 소재한 다트머스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고 있는 학자입니다. 특히 그는 유럽사와 지성사를 비롯 냉전사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자코뱅 당 연구로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아쉽게도 위키백과에서 그의 관한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요. 심지어 구글에 나와있는 그의 사진 조차 몇사람의 얼굴로 검색되고 (동명이인 일수도 있겠지만) 다른 정보 역시 별다른 게 없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검색 능력이 부족해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기에 이 점은 양해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4년 원제 “The Weimar Century”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얼추 4년 뒤인 2018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디 그린버그는 자신의 이 책을 통해 밝혀내고자 하는 점은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독일인들과 그 지식인들의 영향이 과연 냉전시기까지에 이르러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학문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여기에 이 ‘바이마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은 꽤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미국의 전임 대통령인 오바마조차도 1차대전 종전 후,독일에서 출범한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실패와 그 한계를 연설로서 밝힌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세계의 독재들자들에게 민주주의의 실패로 조롱받기도 하였는데요. 저들의 후안무치한 논리에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짧게 이 바이마르시대가 어떻게 독일의 정치 실패가 되었는지 곰곰히 따져 볼 이유는 되리라 생각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의 맥락 어느 지점에는 바로 이 ‘바이마르 시기’에 대한 저자의 가감없는 분석을 느껴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독일 망명자 출신임에도 미국과 세계에 영향을 끼친 5명의 독일 지식인들의 면면이 놓여 있습니다. 엘리트를 길러내는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카를 J. 프리드리히와 법의 지배를 유달리 신봉했던 개혁가 에른스트 프렝켈, 보수적 가톨릭 신앙의 입안과 극렬한 반공주의자 발데마르 구리안, 나치에 의해 몰락한 독일 자유주의자의 면모이자 정치인인 카를 뤼벤슈타인, 조지 케넌과 더불어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을 고안한 한스 모겐소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특히 5장의 한스 모겐소가 유명할텐데요. 이와는 별개로 2장에 서술되는 ‘에른스트 프렝켈’은 우리와도 매우 밀접합니다.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카를 슈미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해방 전후, 미군정과 함께 남한에 들어와 우리의 제헌헌법을 기초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한 독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우리 한반도에 정치적 실험을 시도했는데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에 기초한 반공국가 건설’이라는 얼핏 모순되어 보이는 국가 건설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프렝켈과 뢰벤슈타인 그리고 한스 모겐소를 중점적으로 읽어봐야 하는 장(Chapter) 으로 여겨졌습니다.

저자의 입을 빌어 표현한다면, 베르사유 체제 이후에 출범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아마도 “많은 민중들이 선동하는 정치인에게 유독 약해보이고 정치적으로 휩쓸리게 되는 부분”이 그 원인으로서 한몫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저는 기존의 대중 대 엘리트의 정치 개념으로 일반적인 공화주의 체제에서 민중 내지는 시민을 계도의 대상으로 삼아 전자의 해석 부분을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근거적 이념으로 여겨 마땅히 옹호만 하는 것을 다소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 역시 4장, 뢰벤슈타인에 대한 부분에서 ‘다원주의적 체제’에 대한 짧은 언급을 통해 이 권력의 분산에 있어서 얼마간 동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간 저는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를 통해 민주주의가 온전히 자리하기 위해서는 다원주의적인 가치가 반드시 이뤄져야 함을 여러편의 서평을 통해 밝힌 바가 있습니다. 아주 면밀히 따지자면 이 뢰벤슈타인의 ‘전투적 민주주의’가 냉전 시기의 꽤 고약한 산물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 곁가지가 타협없는 반공주의가 기반했으나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결단이 필요했음은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뢰벤슈타인의 경우 “사회적 평등과 법의 지배,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있었음에도 그 당시 공산주의에 맞서 이처럼 타협없는 강력한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은 일찍이 모겐소가 예견했던 것처럼, 정치 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다는 점을 아마도 간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더 앞으로 돌아가보면,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이 독일 바이마르 시대가 어떠한 조각을 갖다 붙이고 수식어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의 탄생에 대한 일종의 ‘자궁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들었던 의문은 왜 그 시기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가에 대한 일종의 안타까움을 동반한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이 책을 통해서도 약간의 모티브를 받았지만) 선동 정치인에 의해 다소 휩쓸리기 쉬운 대중들의 소위 ‘약점’을 단순히 열거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엘리트 지배체제가 필요하다고 논거를 확대해 - 1장의 카를 J. 프리드리히의 경우 - 공화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이론적 반대를 강화하는 꼴이라는 점입니다. 1장에서 카를 J. 프리드리히는 공공선에 집중하는 엘리트들을 길러내는 것이 교육의 과제라고 이해했습니다만 이것이 계몽주의적 선을 신봉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은 오늘날의 환경에는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겁니다. 특히,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이런 사익추구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까지 갖고 있는 기득권과 엘리트들이 부지기수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주의 체제가 엘리트 지배체제의 또다른 면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시민에 의한 권력과 법의 지배는 그것 자체로 수호되어야 하는 부분이지만, 민주주의 내에서 엘리트 지배와 시민 권력의 힘의 기울기는 어디쪽에 있는지 명확합니다. 굳이 테크노크라트를 논하지 않더라도 이런 이행은 상당히 많이 진행된 상황입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또 들었던 생각은 이들 망명객들에게는 그 배후에 카를 슈미트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를 오늘날 배경으로 해석한다면 최근의 네오콘 뒤에 레오 스트라우스가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물론 스트라우스 역시 카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그래서 이들이 첨예한 냉전시기에 성조기를 등에 붙이고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봤습니다. 최근에 샹탈 무페는 이 카를 슈미트가 우파쪽 뿐만 아니라 좌파에게도 현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을 특이하다 까지는 아니고 꽤 이채로운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이들이 세계의 공산주의 확대에 맞서 어떠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인지했던 점은 꽤 기시감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행에서 5장의 한스 모겐소는 베트남 개입에 대한 반대와 미국의 ‘병영국가화’에 대한 명백한 반대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과 관련해 다른 측면에서 “개인적 권리와 집단적 권리는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는 2장, 프랭켈의 이 인식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봤습니다. 현재 독일 내에서도 이들은 꽤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식인이자 사상가들로 볼 수 있겠는데요. 이들의 매파 역할을 했던 미국의 역사학자가 이를 분석하고 있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랭켈과 뢰벤슈타인도 이런 미국의 역할에 대해 공감하고 상당한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냉전 시기에 로널드 레이건과 같은 모순적 정치인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만 이 때의 미국이 바이마르와 비견되는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을겁니다. 다만 우리가 이 지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당시의 극렬한 반공주의가 낳은 후폭풍 또한 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이 현명했다면, 혁명으로 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극단의 공포감을 조절할 수 있어야 했지만 결국 종말에는 미소간의 권력 게임으로 비하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행한 시기의 역사를 다시는 반복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이 시기에 수많은 개인들의 권리가 대결구도에서 희생당했고 사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권리와 집단의 이익이라는 경계가 개념상 융해 되어버렸다 해도 과장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런 연유로 저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또 생각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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