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의 정치학 -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절대숫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김현우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탈리아 로마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인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리토리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헤르티 커버넌스 스쿨의 연구원이면서 동시에 뉴욕 타임즈 및 가디언 지 등에 칼럼을 기고 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계통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관계로 현지의 지역 경제에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연구 분야 중 하나인 전반적인 GDP 경제학이 세계의 다른 빈곤 국가들에게 어떻게 별다른 소용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적 호기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중요한 주제장인 3장, ‘GDP 퇴위를 위한 지구적 모색’에서 GDP와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GDP 사조에 따른 부작용 사례들과 상대적으로 빈곤국인 부탄과 코스타리카 국민들의 행복 지수 등을 제시하며 실질적으로 이 GDP가 시민의 안녕과 삶의 질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3년에 “Gross Domestic Problem”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피오라몬티의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책의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다른 번역본은 아직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피오라몬티가 본문에 언급한 중요한 문장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 메커니즘은 상황에 따른 가격 조정을 통해 희소한 자원을 대체하도록 인도하고 발명가와 기업가들이 다양한 기술적 해법들을 개발하도록 촉진함으로써, 결국 붕괴를 예방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일종의 평가는 꽤 명백한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일찍이 멜서스가 낙태와 과감한 인구 계획 및 전쟁 상황을 경제상황에서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것과 같이 효율성과 효용 및 경제 시스템하에서의 인간과 사회를 사실상 부속으로 취급한 것은 일련의 경제학 발전과정에서 매우 무분별하게 인용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애덤 스미스도 자신의 그 유명한 논저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무조건적인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2008년에 일어났던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가 당시에 고도화된 금융 시장을 선도했던 경제 엘리트들이 과연 합리적이었는지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 역시 GDP의 도덕적인 측면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있고, 성장 일변도의 경제적 논법이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경제는 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면에는 수많은 문제점을 근대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키워 왔다는 것은 모두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짧은 분량의 서론과 1장에서는 어쩌면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GDP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 계획의 일환으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마련한 쿠즈네츠의 이 경제 도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을 벗어나는데 기여를 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전까지는 전년이나 10년전의 통합적인 경제적 지표가 불분명해 당시 기준으로 내각에서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인정될 만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쿠즈네프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1941년에 “국민소득의 계측은 항상 암묵적인 또는 명시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부분이 그가 갖고 있던 GDP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나, 한가지 명확해 보이는 것은 2차대전 이후 권력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자신들이 주도한 경제 정책의 당위성을 보장해주는 지표로 이 GDP를 이용해 왔으며, 소위 양적인 측면의 외형적 성장이 그 내실이 어떠하던 간에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이용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GDP에 비판적인 세르주 라투슈 역시 “이 GDP에 대한 믿음”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저자인 피오라몬티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경제가 2퍼센트 또는 3퍼센트 성장할 때 마다, 우리의 삶의 질 역시 같은 정도로 향상되는가?”라고 말이죠. 여기서 GDP 수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력의 지배의 도구로 널리 쓰였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잘 떠받든다 하더라도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 자체와 정치간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행은 근대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이것이 시민의 삶 깊숙이 들어오자 마자 시장을 마땅히 견제해야 하는 정치의 역할이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를테면 경제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이윤을 얻는 활동 모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유일주의 말이죠. 물론 자유 경제 시스템하에서 기업과 개인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이윤을 얻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수많은 개인들의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이윤 추구는 마땅히 지켜볼 만하나,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과 거의 반독적점 지위를 악용하는 기업들의 매우 쥐어짜내는 이윤 추구와 영리활동 그리고 반면에 사회적 책무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이러한 자본과 경제의 고삐풀린 이행은 아마도 현재의 많은 문제를 촉발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게임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며, “재화와 서비스에 지불되는 가격들이 경쟁 시장이라는 틀 속에서 반드시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앞선 서술한 측면에 들어맞는 이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GDP로 해석되는 경제 담론에서 “사람의 마모에 대한 경제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한 사람의 노동가치를 과연 경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겠는가”와 “GDP에서는 소위 ‘역량의 고갈’이라는 지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GDP를 설명하는 수많은 기업들의 잘못된 관행등과 로비 움직임과 같은 것들을 여기에서 더 서술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지속적으로 시민의 삶을 측정할 수 있는 세계 공통적인 지표를 특히,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에서는 총수입계정체계 TISA와 물질적 삶의 질 지수 PQLI 및 국제적인 인간 고통지수 HSI 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의 공동 작업 등도 꽤 개선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여기에서 문제는 이러한 연구 작업과 개선 움직임이 어떤 소수의 단체나 초도 단계에서 시도되는 것보다 현재 세계 주류 경제학에 있는 학자들이 “그 시장의 합리성” 문제를 다시 저울위에 올려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세계은행 총재로 추대받은 김용이 성장 지상주의자들과 여러 언론에서 비판 받았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아직도 주류와 다수 시민들의 요구와 해석에는 그 견해차가 상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보통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해석수단과 도표와 숫자들로 증명에만 힘썼던 나머지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 것은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이들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들의 비판을 매우 억울해 여겨왔던 것을 비추어 봤을 때, 과연 이들에게 다수의 이익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 다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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