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봉쇄전략 - 냉전시대 미국 국가안보 정책의 비판적 평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홍지수.강규형 옮김 / 비봉출판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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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내에서 저명한 냉전사가이자 세계 패권 전략의 이론가인 존 루이스 개디스는 특이하게도 지금의 관심사와는 달리 현대 철학을 전공한 학자입니다. 그는 미국 텍사스 출신으로 역시 텍사스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포드와 프린스턴과 헬싱키 대학의 방문 교수를 역임하고 1997년부터 예일대의 미 해군사 교수로 재임하고 있습니다. 특히 2005년에는 미국 인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내셔널 휴머니티 메달 National Humanities Medal 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에도 왕성한 지적인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근래에는 미국의 외교관계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책은 “Strategies of Containment”라는 원제로 지난 1982년 초도 출간된 이후, 2005년 약간의 증보를 거친 개정판을 국내에서 번역해, 작년인 2019년 9월 국내 독자들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소위 냉전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F. 케넌이 미국 외교에 전면에 나서고 과거 트루먼 행정부 시기의 중요한 문건인 NSC-68 (미국 국가 안전보장회의 NSC 가 작성한 비밀문건)이 기반이 되어 전체주의를 종식시킨 미국이 어떻게 소련을 가까운 미래의 위험 요소로 여기게 되는지를 시작으로 이후 봉쇄의 완성이라는 레이건 행정부를 끝으로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즉,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에서 로널드 레이건까지의 미국의 대외 정책과 시대 배경 및 소련과 중국이 동시에 얽힌 국제정치적 치킨 게임 등을 인물과 사실에 기반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각 행정부 별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수행한 인물들과 대통령, 그리고 시대 배경 등을 꽤 상세하게 그리고 있어서 저와 같은 독서인들에게는 노련한 전문 지식을 습득할 수 있게 해주는데요. 물론 개디스의 이 책 역시 상당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좀 더 수월할 수 있겠습니다.

남에게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능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실제로 냉전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고, 실제로도 발생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는 저자의 언급으로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루즈벨트는 런던과의 관계와는 달리 모스크바와의 관계는 너무 깨지기 쉬워서 그러한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리라고 우려했을지도 모른다”는 첨언까지 저자는 하고 있는데요.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로 스탈린과의 얄타회담을 히틀러에 놀아난 체임벌린이 손에 쥐고 귀국한 ‘뮌헨 협정’과 같이 치욕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루즈벨트 대통령 스스로도 스탈린과의 담판에서 꽤 심대한 정력을 소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곧이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루즈벨트 이후 정권을 승계한 트루먼은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이념은 독재 정치를 하려는 구실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스탈린의 소련이 국내 정치에서 어떻게 나아가는지 익히 체험한 미국 관료들에게는 아마도 “모두 다수의 자유와 그냥 있는 그대로 살 권리”를 소련인들로부터 보장받기 위해 그리고 그 자체로 얻게 되는 모스크바와에 대한 원초적인 불신이 일개 개인이 벌인 일이라고 믿을 수 없는 ‘외교 탄원서’를 작성한 케넌의 행동과 맞물려 소련에 대한 관계 재정립이 새롭게 모색된 것으로 글로서도 파악됩니다. 초기 관료 조직에 입성한 케넌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비슷한 입장으로 윌슨이 주창했던 국제 공동체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애초에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들의 위성국화 하는데 그쳤지만,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과 안보를 위해 소위 ‘소련에 대한 거점 방어’를 명목으로 필리핀과 일본, 한국 등과 양자 동맹을 구축하게 됩니다. 이후 애치슨의 이해할 수 없는 실언과 대치되는 한국 전쟁 당시 맥아더가 “아시아를 지금 포기하는 것은 서유럽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발언한 것들은 초기 대소 정책 및 대 공산권 정책에 혼란이 있긴 했으나 “동맹국들에 대해 미국이 신뢰를 잃게 되는 것은 국제 구도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역대 백악관의 주인들이 확언해 왔다는 점은 일종의 일관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을 필두로 유지해 온 자유진영의 체제가 속내에는 일부 중립국가들이 소련의 마수에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무분별하게 개입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갖고 있기도 하였으나, 지체없는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과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남베트남 정권에 여지없이 군사력을 지원한 것은 냉전 시기의 대결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 핵무기의 균형 만큼 미국의 이익에 중요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무조건 이런 도덕적 원칙을 표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플랜 B 라고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소련의 부하라고 여겨졌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모스크바와는 다른 공산주의를 시도했고, 그 와중에 반대 세력을 40만이나 죽였음에도 워싱턴은 이에 개의치 않은 점은 미국의 외교 정책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쿠바를 전복 시키기 위해 케네디 행정부 때 개입한 사실이나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개입, 칠레의 선거로 선출된 아옌데 정부에 대한 키신저의 불편함 등을 봤을 때, 아이젠하워가 “미국의 이익이라는 것이 경제적으로 원유와 텅스텐 같은 자원을 자유롭게 확보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국가들의 정부에 친미 정권이 들어서는 등의 리스크 관리가 비교적 용이한 환경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이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미국의 이익과 동맹국들의 이익이 같이 가고 수렴하는 것을 보다 원했지만, “미국이 안전하려면 세계가 미국의 형상을 닮아야 했다”는 인식에서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상황인지 우리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미국의 대소 봉쇄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추구했던 것처럼 소련을 점차 파국적인 공산주의로부터 희석시켜 국제 사회의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갖고 있었지만, 핵무기라는 힘을 가진 국가가 자신의 권력을 스스로 포기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습니다. 결국 흐루시초프의 오판은 쿠바 사태를 만들었고, 아이젠하워 시기의 존 포스터 덜레스가 핵무기와 관련된 벼랑끝 전술을 소련에 선보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미소간의 대결은 대체로 안정적이었습니다. 저자는 이에 케넌을 해석하며, “결국 전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 자체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은 추구하는 바가 명확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소련과의 갈등은 첨예화 될 지언정,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앞선 인식이 배경이 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전임인 아이젠하워 행정부보다 많은 참모를 거느렸던 케네디 행정부와 그의 불의의 사망 이후 등장한 린든 존슨은 두 사람의 사뭇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지적인 틀은 거의 동일”했다고 개디스는 첨언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케네디 대통령의 정책이 고스란히 존슨 행정부에 이어졌다고 보는 해석과 그 궤가 동일한데요. 다만, 전임 행정부에 비해 별로 자신감이 없어보였던 케네디의 백악관은 특히 동맹국들에 대해 “미국이 실제로 동맹국들의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자국의 도시가 위험해지는 상황을 감수하겠다고 미리 증명해 보일 수도 없다”는 맹점을 안고 NATO 동맹국들에 대한 핵우산 및 중거리 핵무기 배치만으로 지역의 안보 불안이 가시질 않았으며, 우리 역시 워싱턴이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샌 프란시스코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감수할 수 있겠느냐에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외교 정책과 동맹국들을 방어하기 위한 자신감 문제를 넘어서 현재에도 가까운 베이징의 미사일에 의해 한번쯤 고민해보게 되는 서울과 도쿄에 불안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미 2008년쯤에 선제 핵사용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 바가 있으며, 특히 쿠바 사태 이후, 벌어진 핵전쟁의 위협은 당시 동맹국들을 안보 불안에 떨게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애초에 덜레스와 같이 동맹국들을 배려하지 않는 관료가 존재하는 것은 최근에 조지 W. 부시와 마찬가지로 동맹국에 대한 외교적 배려가 ‘적당히’로 나갈 수 있다는 면에서 우리도 어느 정도 한계지점을 명확히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닉슨 행정부의 불세출 관료이자 학자인 헨리 키신저는 닉슨이 불명예스런 퇴진으로 하야를 했음에도 후임인 포드 행정부에서도 중용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과거 백악관의 관료들이 ‘철학’이 없이 외교를 이끌었다고 비판하고 자신은 그런 길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원칙을 세우게 되는데요. 이미 존슨 행정부 시기에 군사비 지출과 군대 동원에 있어서 의회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던 백악관은 외교 정책에 있어서 닉슨에게 거의 위임을 받은 키신저가 소위 홍길동식으로 미국 외교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닉슨은 특유의 다소 조용한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참모들과 약간 거리를 두게 됨으로써, 정상적인 외교 라인에 이어 뒤로 다른 비선 라인을 각 참모들이 지휘하게 됨으로 닉슨이 물러선 이후, 키신저에 대한 비난이 꽤 높았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포드 행정부에도 키신저는 제법 중용되기도 하는데요. 다만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키신저가 딕 체니와 ‘저팬 핸들러’로 유명한 리처드 아미티지에 의해 백악관에서 축출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전무해서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지독한 현실주의자였던 키신저는 앞서 짦게 언급한대로, 자유 선거로 출범한 칠레 정부에 대해 불신을 갖고 그것이 설사 민주주의 정부라고 할지라도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것으로 파악되면 개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됩니다. “단지 국민이 무책임하다는 이유만으로 나라가 마르크스주의로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 이우는 없다”는 칠레에 대한 키신저의 평가는 미국 국익을 위해서라면 내정 간섭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는 암울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미국이 세계 2등국이 된다면 실로 비참한 2등국이라고 비하했던 세간의 말대로 세계의 양대 패권국 중 한 곳의 외교 관료가 저런 자신감을 갖는 것은 이해는 되나, 이후 로널드 레이건에서 보여지는 타국에 대한 군사 개입, CIA를 통한 교란 작전 등과 같은 수많은 불법 행위를 눈감게 하는 어떠한 치부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닉슨과 키신저가 초래한 ‘데탕트’에 대해 개디스는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조지 F. 케넌이 제시한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언급하고 적절한 행동에 대한 자유와 위임을 받은 논리적인 외교관이 삼극주의를 기반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한 것은 역사의 순리인지 아니면 일개 개인의 능력인지는 추측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관해 한가지 곱씹을 만한 부분은 “1960년대 말에 미국의 전략적 역량을 크게 증강시키자는 얘기도 꺼내지 못한 이유는 베트남 사태가 야기한 예산 압박과 반군대 정서 때문이었다”고 언급이 되는 것은 닉슨 행정부 시기에 소련과의 핵무기 격차가 나게 되는 원인으로 꽤 중요한 맥락으로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과거 냉전시기의 미소간의 대결은 다행히 상호 확증 파괴의 핵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미 미국 행정부가 수차례 소련과의 핵대결로 가는 것은 공멸로 이어지는 길임을 재차 확인했고, 이것의 리스크 관리를 위해 다소 변덕스런 모스크바를 다루기 위한 정력적인 노력을 워싱턴이 수십년을 기울여 왔다는 점은 분명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대의적인 측면에서 서유럽과 태평양의 민주주의 동맹들을 물론 자신들의 안보를 위해 후원하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와 같은 빈곤국이 미국의 지원과 경제 발전 단계에서 보여준 시장 개방으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 이유임은 분명합니다. 저 역시 이 점은 왜곡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젠하워가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국이라면 서로의 국익이 같은 통로로 갈 수 있을 정도로 외교관계상의 현명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유의 보은심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이들도 많지만 우리가 미국 외교의 명과 암을 잘 분석하고 정책 가운데 이를 중요한 기준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약간 우스개와 같은 소리로 과거 닉슨이 모스크바를 향해 “우리가 어떠한 짓도 벌일 수 있는 미친놈이란 걸 알게 해야 된다”는 이 미치광이 이론이 우리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롯된 것임을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상대하든 예측 불가능하게 행동한 남한 대통령 이승만에게 나는 많이 배웠다”는 언급에 실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 이미 이 책 12페이지에는 ‘봉쇄’라는 단어가 스티커로 수정되어 있었습니다.
2. 본문 264페이지에 오타가 있었습니다. ‘인괘철선 trip-wire’이라는 단어였는데, 원래는 인계철선이 맞는 단어겠죠.
4. 본문 382페이지에는 약간 동일 문장 반복이 있었는데, 문장의 흐름상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3. 본문 395페이지에 있는 문장 중에 조사 ‘은’이 빠져 있었습니다. 문장 전체로 봤을 때, 조사가 빠지면 어색하더군요
4. 미국의 탄도미사일인 ‘미니트맨’을 ‘미닛맨’으로 표기했던데, 저는 대체로 대중에게 알려진 용어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고 여기는 사람중에 하나인데요. 한나 아렌트를 해나 아렌트로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5. 헨리 키신저의 평가에 대한 표현으로 ‘무도덕’이라는 단어를 3차례 정도 언급하고 있는데요. 물론 무도덕도 쓰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만 과거 다른 책들에서도 “헨리 키신저의 부도덕성, 부도덕한 측면을 갖고 있는 키신저” - 물론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평가로 부도덕을 뜻하는 겁니다. 이것을 굳이 무도덕으로 표현해야 했을까요.

다른 것들은 죄다 억측으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오타와 문장 문제를 수정하지 않고 책을 출판한 것은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책은 상당한 가격의 책이기도 합니다. 마무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책을 출판한 것에 대해 일개 독서인으로서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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