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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힘
존 포데스타 지음, 김현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미국 시카고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유수의 대학인 조지타운의 로스쿨을 마치고 주검사 등을 역임한 존 포데스타는 일찍이 선거판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후, 클린터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정권 인수위원장을 거쳐, 정권 2기 무렵에는 백악관의 비서실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관련된 짤막한 일화로 책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 한 가지는 클린턴이 꼭 대통령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합니다. 오클라호마에서 겪었던 선거 운동 경험이 이 두 사람에게 큰 인연이자 미래가 된 듯 싶은데요. 또한 르윈스키 스캔들과 관련해 고초를 겪은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믿음도 글에서 잘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많은 독자 여러분들은 미국에 진보주의 운동과 진보 정치가 있었느냐고 의문을 가지실 수도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1부, ‘과거 진보시대의 교훈’은 초기 미국 진보주의 정치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분량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책은 원제 “The Power of Progress”로 지난 200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번역 출판되었는데요. 다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입니다.
저자의 분석대로라면, 현재 미국 정치의 상황은 “보수의 도그마와 이를 추종하는 패거리 자본주의 및 코포라티즘 (대규모 재계단체들에 의한 국정 장악을 지지)”하에 놓여 있다고 인식되었습니다. 사실 미국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여,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다수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돈 많고 힘 있는 자를 위해 봉사하는 행위”에 결과적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근원에 대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이들이 과거 공공시설에서의 흑백 분리를 규정한 ‘짐 크로우법’의 열렬한 지지자들이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보수주의자들은 표면적으로 인종 차별의 외양을 벗었지만, 보수주의 운동은 남부의 백인 유권자와 인종 평등에 반대하는 집단에서 힘을 얻었던 것이었습니다. 과거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규정된 종래의 보수주의는 급격한 사회변화나 혁명 보다는 안정적인 전통의 유지라는 모멘텀을 답보했으나, 현재의 변형된 보수주의는 미국의 사례와 비슷하게 (여러 책들을 통해 추정해 본 결과) 이들이 과연 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것이 실로 진실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포데스타의 이 책에서도 약간의 실마리가 보여집니다만, 진보주의가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점은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견고한 민주주의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땅히 사람이라면 따라야 할 도덕적 책임과 개인의 양심과 같은 공통된 인식에 기반하고 있어서 교리적으로 어떠한 강력한 연결고리가 없는 점도 명백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제가 누누이 입장을 밝혀왔던 전세계에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라서가 아니라 변형된 보수주의자들과 이 보수주의가 대체로 “보편적인 인간의 자유”가 아니라 모호의 장막을 몇 겹이나 두른 채,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경제적 자유”에 집중하고 있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자유주의의 제한적이면서 강력한 신봉자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보수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는 제가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책의 1장에서 꽤 면밀히 소개되고 있는바와 같이 미국에도 진보주의적 정치가 분명 존재했습니다. 허버트 크롤리와 제인 애덤스 등과 같은 정치적 사상가들의 면면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시어도르 루즈벨트와 우드로 윌슨 그리고 후에 케네디를 거쳐 린든 존슨의 진보주의 시기까지를 저자는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드로 윌슨의 보편주의적 사고를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차용해 적극적으로 통치에 사용했다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를 차치하더라도 대공황 시기의 루즈벨트 행정부가 엘리트 관료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내각”으로 극복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뼈아프게도 트루먼 행정부 당시 메카시즘에 의한 광풍에 진보주의가 가담해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든 점은 저자가 꼽는 진보주의의 여실한 실패였습니다. 즉, 미국의 진보주의는 완벽히 사회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며, 개인의 능력주의와 경제적 자유를 용인하면서도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는 정치를 뜻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초기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가들은 열렬한 민주주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소위 자유주의라고 인용되는 리버럴의 민주당의 오른쪽에 그리고 자유지상주의자들이라고 봐도 무방한 공화당의 왼쪽 어디쯤에 속한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1장에서 잠깐 언급되는 진보주의와 포퓰리스트들과의 관계에서 이 양자가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는 저자의 판단에는 약간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일찍이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독점 기업과 거대 자본가들 및 트러스트, 철도 회사 동맹의 기득권층이 과거 미국을 주도”했다고 밝혔는데요. 이처럼, 단순히 거대 기득권의 경제적 권력에 반하고자 탄생되었다고 포퓰리즘의 정치적 성격을 저리 규정하는 것은 포퓰리즘 정치를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미국의 진보주의와 포퓰리즘을 민주적 가치로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설사 그것이 정치공학적 판단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오해의 소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퓰리즘은 반지성주의와 엮어야지, 카스 무데와 같이 단순히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동인하는 요인 정도로 포퓰리즘을 이해하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호프스태터가 비도덕적인 일종의 자본가들이나 기업 경영인들을 포퓰리즘 운동 한복판에 있는 이들이 도덕적으로 비난한 것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볼 수 없으나,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1980년대 뉴욕의 반이민 정서에 불을 질렀고,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인종적 경멸은 꽤 유명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포퓰리즘을 추종하는 이들이 단순히 다수의 민주적 정치의 참여를 북돋는 퍼레이드와 같이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뒤이어, 2부에서는 이러한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의 정치적 과거를 비교하고 있는데요. 특히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과 막대한 재정 지출을 전쟁 비용에 투사하고, 결국 중동에서 그렇게 바라던 민주주의 정치의 이식에 실패한 것을 대체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저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남부 뉴올리언스시의 막대한 피해 복구와 관련해 늦장을 부렸던 당시 백악관과 희대의 무능이라 지칭해도 모자라지 않은 부시의 친구 ‘데이비드 사파비언’의 언급이 유독 눈길을 끌었습니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의 성지에서 과연 대통령 친구가 낙하산으로 내려가도 되는가에 대해 물론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그 최악의 결과가 뉴올리언스에 직격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파비언의 무능은 기사라도 잘 나와 있으니 여러분들도 쉽게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물론 각자의 정치적 태도에 따라 클린턴과 부시에 대한 평가가 다를수도 있겠습니다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뒤로하고 사리사욕만 채운 대통령의 친구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뭔가 거창한 역사 논법을 꺼내오지 않더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포데스타의 이 책은 머리를 싸매고 읽어야 되는 논저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 스스로가 클린턴 내각에 참여해 당시 행정부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 느껴지기도 한데요. 클린턴 행정부의 과오가 분명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심혈을 기울인 중동 평화 정착에 실패했고, 복지 부분에서도 제대로 된 대책을 만들지 못했으며, 인권을 입에 달고 사는 미국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의 행적은 아주 실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런 저의 평가와는 달리 논외로 우려스러운 부분이 글에 나오기도 하는데요. 1997년에 러시아 알렉산더 레베드 장군은 100개의 핵가방이 사라졌다고 폭로한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핵무기를 저런 식으로 관리하는 나라가 현존한다는 것이 정말 암담할 정도인데요. 그래서 오사마 빈 라덴이 모든 수를 동원해서라도 핵무기를 손에 쥐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데요. 저자인 포데스타도 짧게 표명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의 대 테러 전쟁이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더티 밤’을 소유한 소수 단체와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