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정신적 삶 - 예속화의 이론들 철학의 정원 31
주디스 버틀러 지음, 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 그린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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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존경받는 페미니즘 이론가로 알려져 있는 주디스 버틀러는 예일대를 거쳐 풀브라이트 장학금 프로그램으로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을 했습니다. 이후 웨슬리언, 조지 워싱턴, 존슨 홉킨스, 버클리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버클리 대학에서 수사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계 최초로 퀴어학을 창안했고, 더불어 스스로는 레즈비언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한 파트너인 웬디 브라운 역시 교수이기도 한데요. 얼마전에 모 우익 방송에 출연한 우파 번역가가 주디스 버틀러를 단지 좌파 지식인이라고 규정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그녀가 일찍이 나치즘과 극단주의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표명할 정도로 상식선을 지키려고 하는 지식인이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제가 그녀의 논저를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나 단순히 마르쿠제와 알튀세르를 인용한다고 해서 그 인용자를 좌파로 규정해야 하는지와 젠더학과 페미니즘에 연구적 열의를 보인다고 해서 그냥 좌파로 만들어야 하는지는 아직도 의구심이 듭니다. 하물며, 아직도 국내에서는 좌파가 주는 어감에 적지 않게 ‘멸칭’의 의미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그녀의 논저를 다 섭렵하고 나서 그 이후에 뭔가 토론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소위 우파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테오도르 아도르노 역시 그녀의 컨텐츠에 자주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염두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버틀러가 요즘 과도화 된 페미니즘적 돌출로 국내에서 꽤 오역이 되고 있는 점은 인지하고 있는데요. 이 점도 꽤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동성애와 퀴어에 반감을 갖고 있는 분들은 주디스 버틀러를 그 시조로 격상시켜 그녀를 욕하는 데 할애하고 있는데요. 이 점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책은 지난 1997년 “The Psychic Life of Power : Theories in Subjection”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19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책은 강경덕 선생을 비롯한 두 분의 번역가가 번역에 참여했는데요. 난해한 철학 논저의 번역 치고는 꽤 훌륭한 번역이라 할만 했습니다. 번역자들의 노력이 깃든 글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제가 이 책을 손에 들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동성애와 인종차별에 대한 ‘불균형한 권력’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 책의 본질로 여겨졌으나, 이러한 저의 예측은 매우 빗나가고 말았는데요. 총 6장의 분량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글은 뒤의 5장과 6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취급한다면 1장부터 4장이 주요한 본문이며, 앞선 장에서 논의된 본론에 이어 사실상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에 의한 결말을 열어놓은 (보이지 않는)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버틀러는 이 글에서 강력하게 밝히고자 하는 점은 고유한 영혼을 가진 수많은 개인들의 주체와 주체성 그리고 이 개인들의 내면에 이어지는 몸과 영혼의 본질적 관계와 이들의 겉과 속의 정체를 통해 권력이 어떤식으로 작용하고 어떤식으로 표출되는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표방하며 탐구해나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해 헤겔과 니체, 푸코 및 알튀세르를 통해 버틀러 자신의 고유한 사유체계를 제시하는 것 보다는 앞선 주체의 선각자들의 사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추렴해 그것의 대응방안과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내는 데 노력하고 있는 것이 엄밀히 다른 철학적 논저들과는 구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알튀세르는 주체와 주체성과 관련해 전자의 주체와 관련해서는 풍부한 이론을 확장시켜 왔지만, 후자인 주체성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많은 현대의 철학자들에게 이 주체라는 관념에 대해 상이한 의견들이 산재해 있기도 한데요. 과연 개인이 주체를 바탕으로 삶을 지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과 주체가 그 스스로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 또한 있어왔습니다. 저자인 버틀러는 이에 주체란 “존재와 행위성의 언어적 표현”이라 규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 행위성과 관련된 문제에도 여러 논란이 들어차 있는데요. 이것은 언어가 그 자체로 행위의 담론을 답보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불확실성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점은 “주체가 종종 사람이나 개인으로 바꾸어 쓸 수 있는가”로 의문시 된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데요.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언급한 “인간의 불확실성”은 차치하더라도 과연 인간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육체와 영혼의 주도권을 바탕으로 주체라는 ‘제2의 객관성’을 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중점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종종 이러한 철학적 담론을 담은 글들은 자주 동어반복적인 의미와 매우 빈번하게 양가적이고 치환적인 언어들을 남발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남발이라는 저의 표현은 꽤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철학적 용어 조차도 철학자들에 따라 서로 다르게 규정되고 또 재해석하고 의미 부여를 해야 하는 의무 또한 요구되기도 합니다. 저는 앞선 주체가 개별적인 독립성을 갖고 이것을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개인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와 이 주체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또 어떤 식으로 규명되는지에 글을 읽으면서 궁금증이 생기기도 했는데요. “권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가 있어야만 하나, 이러한 필연성은 주체를 권력의 기원으로 만들지 않는다”와 같은 해석은 이 글 3장의 푸코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철학적 연원을 살펴 볼 수 있었지만, 대체로 일개 독서인이 이해하기란 턱이 높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군요. 우리가 육신과 영혼의 이중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육체의 단순 원리로서 영혼의 지배나 제어를 받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구조로 여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서장에서 계속 확장되는 일종의 외부인 사회 규범들의 내부화를 통한 영혼의 내면화와 더 나아가 주체가 권력에 의한 남용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 예속화가 진행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예속화의 본질은 무엇이고 이렇게 예속화가 된 자신의 거울은 무엇을 뜻하는 것과 같은 수많은 질문들이 끊임없이 뇌리를 스쳐가게 됩니다. 결국 이것은 1장에서 푸코가 질문했던, “이 주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놔두어야 하는가”로 연결됩니다.

이러한 주체와 관련해 푸코는 “현대 정치학의 핵심은 더 이상 주체를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생산되고 유지되는 규제 메커니즘을 밝히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이것은 예속과 욕망의 문제, 그리고 권위에 제약된 욕망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합니다. 영혼이 육체의 제어 상실이라는 불안한 의식의 근원에서 ‘노예적 상황’이 도출되며, 이러한 장면을 해석하는 수많은 회의주의자들과 육체의 소멸이라는 최종적 파멸에 따라 인간은 불변의 영역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에 “자기경멸과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헤겔의 평가는 꽤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자기 불안정에 따라 인간은 욕망을 우선시하게 되기도 하고, 상반된 내면의 감정으로 이런 욕망을 좌절시키기 위해 금지를 강요하기도 하는데요. “금지는 금지된 욕망의 삭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 금지된 욕망의 재생산을 추구한다”는 일종의 저자의 양가적 해석을 도출하게 됩니다. 욕망의 금지를 통해 인간의 고난의 길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를 보인 니체를 차치하더라도 인간 본연의 욕망이 이러한 불안정한 감정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은 사뭇 의미심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법이 육체의 구속을 위해 필요한 원천적인 기능으로 도래되었다 하더라도 헤겔은 ‘불행한 의식’에서 함의하는 도덕적 비참함이 일관적으로 유지될 수 없기에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육체의 존재를 언제나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비참함의 추구와 애착은 최종적으로 예속화의 원인이자 결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는 아예 애착하지 않는 것보다 고통에라도 애착할 것이기 때문에” 애착 자체가 자극이 되어 욕망하려는 의지가 될 수 있다는 프로이트와 헤겔의 한결된 주장은 주체와 규제된 권력의 관계가 어디까지 서로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에 들게 합니다.

뒤이어 2장의 양심의 가책의 순환이라는 장은 특히 심리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꼭 읽어봐야 되는 부분이라 여겨졌는데요. 양심과 양심의 가책을 논하면서 앞선 것들을 기반으로 도덕성과 도덕주의에 대한 니체의 판단을 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덕성이 어느 정도 폭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미 우리게 친숙한 것이다”는 버틀러의 평가는 꽤 놀랍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내면의 예속화를 가속화시키는 금지의 언행은 어쩌면 영혼에게 폭력에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양심이 자기 자신에게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양심을 강화하는 도덕성은 어느 정도 폭력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나아가 버틀러는 “나는 폭력에 대항하는 주체가 실은 이전 폭력의 효과라는 것, 심지어는 폭력에 자기 자신을 대립시키는 주체도 그러하다는 점을 보이려고 한다”고 언급하는데요. 앞선 서장에서 ‘상실의 상실’이라는 논법과 비슷한 양가적 측면의 해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다시 앞선 양심으로 돌아가서 니체는 죄와 빚의 예시를 통해 양심을 분석하고 있지만, 상이하게도 버틀러는 “양심의 가책이란 약속을 어기는 행위에 가담하는 내면성의 가공이자 의지의 불연속성이다”라고 꽤 내밀하게 설명합니다. 다분한 약속의 어김에 대해 양심의 논법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에게 신속히 알려주고 이를 통해 양심의 작동 원인이 내면의 메커니즘이라는 것 또한 전달됩니다.

3장은 푸코의 주체화에 대한 논법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요. 푸코는 주체화 자체가 “주체로 되기와 예속화 과정” 모두를 지칭한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육체가 영혼을 담는 일종의 감옥이라고 여기는 철학자들이 많다고 봤을 때, “정신은 정확히 일관된 정체성 속에 머물러야 하며 일관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담론적인 요구의 감금효과를 초과하는 그 무엇이라고 해석됩니다. 뒤이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과 주체를 비교 규명하고 이를 통해 다시 푸코의 결론에 이르는 “주체는 절대로 예속화 과정에서 완전히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성을 이루는 담론의 외부인지 아니면 말해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이어져야만 한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의 규명에서 이 육체는 감금효과로 비유된 영혼의 대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혼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의 어떤 작용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4장은 사실상 이 책의 복합적인 결론이라 부를 수 있겠는데요. 푸코의 주체에 대한 규정과 한계를 통해 명백히 이 점을 차용한 알튀세르가 말하는 주체와 양심을 좀 더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죄의식’에 대해 논의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체와 죄의식의 관계라 볼 수 있겠는데요. 다수의 사람들은 법의 목소리에 순응해 개인의 내면의 양심의 발동과 유사한 ‘법에서 돌아섬’을 설명합니다. 돌아섬은 부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법과 수취인 양자에서 규정되는 이 돌아섬은 결국 “정체성을 향한 기대의 움직임”이라는 표현으로 꽤 상대화되기도 합니다. 이에 알튀세르는 국가와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논법에서 그리고 주체적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서 돌아섬을 차용해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지젝과는 다른 슬로베니아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믈라덴 돌라르의 ‘알튀세르에 대한 재해석’을 저자는 글에 차용하고 있습니다. “강한 데카르트적 반향’이라는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작동에 대해 돌라르는 이를 강조하고 있지만 반대로 주체의 문제가 주체성의 문제와는 사뭇 다른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돌라르는 이를 명확히 구별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한계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주체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안과 바깥 개념에 대해 돌라르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을 물질성과 관련해 알튀세르와는 달리 해석하고 약간 신학적 개념으로 이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술된 글을 통해 짐작되기도 했는데요. 또한 뒤이어 니체식으로 해석된 주체에 있어서 정념과 법의 문제 그리고 욕망의 문제 등 앞으로 주체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철학적인 질문들을 계속 해나가야 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꽤 산만하고 장황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지금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제가 버틀러의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에 대해선 약간의 불안감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앞서 소개해드린대로 저는 이 책을 ‘세계를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일종의 해부’라고 여기고 골랐으나, 저의 기대와는 완전 다른 글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각 개개인이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주체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갖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프로이트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을 포함해 이론적 근거의 다양성을 꽤 살펴볼 수 있었는데요. 일찍이 미국에서도 버틀러의 글과 사상은 매우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좀 더 얼마간의 책을 손에 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의 좀더 세밀하고 수준높은 서평을 기대하며, 저의 부족한 글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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