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적인 세계 경제 -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의 충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장에르베 로렌치.미카엘 베레비 지음, 이영래 옮김, 앤서니 기든스 추천 / 미래의창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프랑스 툴롱 출신의 경제학자인 장에르베 로렌치는 1992년 설립된 이코노미스트 서클의 창립자이자 회장이기도 합니다. 그는 1975년 파리 13대학의 경제학 교수를 시작으로 1979년 프랑스의 다국적 광고회사인 하바스 그룹의 회장을 거쳐, 뒤이어 프랑스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고, 에디트 크레송 총리의 경제 자문을 맡는 등 프랑스 내에서는 꽤 유명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공저자인 미카엘 베레비는 파리고등경제상업학교 ESSEC 의 이력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의 다소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앤소니 기든스가 추천사가 실려 있다는 것이겠죠. 이에 ‘유럽의 산업 공동화’와 ‘영속적인 부채 현상’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기든스는 전체적으로 이 책에 대한 호평을 남겼습니다. 지난 2015년 출간된 불어 원제는 “Un monde violences. Leconomie mondiale 2016-2030”로 국내 번역은 지난 2017년 1월에 이뤄졌습니다.

먼저, 이 글은 총 7장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요. 약간 뜬금 없기도 한 와해성 기술 Disruptive Technologies 에 기반해 해석한 현재의 기술 정체를 논한 1장은 업계를 완전히 재편성할 신제품과 기술들의 출현과 앞으로 미래의 한정적인 자원으로 비롯되는 ‘둔화’와 그것에 이어지는 새로운 경제침체와 문제점들을 도출시켜 뒤이어 이어지는 2장부터 6장까지의 논거를 뒷받침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2장과 6장은 7장에서 저자가 언급하는데로 사실상 앞으로 세계 경제가 직면할 위기로써 좀 더 면밀히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즉, 전세계의 노령 인구의 증가, 폭발적인 불평등의 문제, 선진국에서 비롯되는 산업공동화 현상, 자본주의를 더 왜곡하는 금융화의 존재, 그리고 빈약한 저축과 그나마도 투자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을 각 주제별로 진단하고 그것의 해결책들을 제시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지정된 답변들이 면밀한 해결 방안이라고는 평가하기 어려웠는데요. 특히 3장의 오늘날 민주주의와 소득 재분배와 관련된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들의 불확실성에 대해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뒤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따로 언급하겠지만 지금의 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의해 시장의 권한을 가급적 건드리지 않는 쪽으로 강요되어 왔던것을 저자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러한 사정을 짐짓 모른척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단순히 이 점을 경제학자들의 ‘외눈박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다소 인신공격에 이를 수 있으니, 대충 이 정도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순서대로 2장에서는 갈수록 더해지는 전세계의 노령 인구화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소위 전통 경제학자들은 노령화는 역동성의 결핍, 둔화, 약화와 관련되기 때문에 이 현상이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며 결국 노인들이 받는 의료와 복지 혜택에 관련한 비용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말한다” 평가하는데요. 이 장의 후반부에서 인정하는대로 시민은 누구나 “균일한 생활 수준”을 영위할 권리가 있는데 앞으로 증대되는 노령인구의 비율을 고려했을 때, 선진국이나 개도국 할 것 없이 추가된 복지비용이 필요할 것임은 자명해보입니다. 다만,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아직도 노인의 복지와 건강유지를 위해 가족 단위의 비용 지출이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 점은 서구 사회와 약간 다른 부분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인도네시아나 태국을 비롯한 개도국들에게도 지속적인 경제 부문의 성장 유무와는 상관없이 지금도 적잖은 비용을 노년층을 위해 지출하고 있으며, 이것이 이들 국가들의 경제 성장에 방해 요인이 될 것인지에 대해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해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노년층의 인구 증가와 이에 따른 세대별의 갈등은 단순히 경제학적 논법으로 풀 수는 없으며, 사회학적인 접근과 복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분석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꽤 동의할 만합니다. 특히 저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또는 앞으로의 노년계층의 문제에 천착하기 전에 “전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어려움, 고통, 불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조언을 하는데요. 이런 불균형을 맞춰 나가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꽤 박수를 줄 만한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3장은 특히, 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들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취지대로 장의 제목 역시 “불평등의 억누를 수 없는 폭발적 증가”인데요. 이번 장에서 논의대는 주장들을 간략히 추려본다면, 현재까지 자본주의의 주요한 가치가 되고 있는 자유주의와 시장 자유주의와 관련해 “자유 시장 체제에서 만들어진 불평등은 개인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여기에는 모두를 극빈자로 전락시키는 평등주의 체제와 반대로 인구 성장에 대한 제약이 수반된다.”고 저자는 논의를 더하고 마찬가지로 모두를 하향 평준화 시켜 빈곤에 이르게 하는 무분별한 평등주의에 대해 일종의 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경제 활동과 개인들의 이익 추구가 “국가 번영의 원천을 이루는 활동”이라는 소위 대의에 이른다는 것에는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의 건전한 발전과 그에 따른 경제 성장의 확대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으나,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불평등을 감수해도 되느냐 혹은 이러한 불평등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 보장에 국한시켜 결과적으로 민주 정치를 토막내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허버트 스펜서류의 ‘아주 자연스런 현상’으로 치부해야 되는지는 저 역시 동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용인되는 것은 기회의 평등이 존중을 받고 사회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구성원 대부분에게 돌아가는 혜택을 통해 불평등이 상쇄되는 경우에 한해서다”라고 저자가 설명하는 것은 꽤 합당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 후반부에서는 과거 대럴 M. 웨스트의 “부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실로 적절한 답변을 찾을 수 있었는데요. 즉, “민주주의는 자본 도피와 탈세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정치 정당과 같은 법률상 기관을 비롯한 엘리트에게서 나오는 사실상의 위혐요소를 다룰 필요가 있다”는 사실상 경고에 기인합니다. 그동안 엘리트 관료들과 부유층은 민주 정치 자체를 민중들에 의한 중우정치로 취급해 그 불확실성을 경계해 왔는데요. 이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자원과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결국 법과 제도하에 돌아가는 민주주의 제도에서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권력들의 야합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협력을 통해 막대한 부유층과 경제 기득권들이 국가 권력의 징세에 맞서 자신들의 부를 지키기 위한 메커니즘에 사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여서가 아닐까 고민해봤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민주주의가 평등의 가치를 축소시키고 오로지 ‘발 하나로 지탱하는 자유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것에 집중해 온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본을 갖고 있는 계층의 조치라기보다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절차 속에서도 민주주의가 사회의 불평등을 얼마나 늘려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분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뒤에 나오는 앞으로 미국의 중산층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에 껴서 절멸할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고, 또한 시장 자본주의의 강요가 불러 일으킨 민주주의의 약화를 먼저 전제하지 않고 민주주의 절차적 이행과 그러한 이면의 취약점을 물고 늘어져 저자들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다소 단순하게 바라본 것이 아닌지 이 점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4장은 간단히 말해, 세계화의 끔찍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오늘날 선진국들에게서 산업공동화가 나타났다고 비판하고 있는데요. 값싼 노동력을 위해 쉽게 이전과 이동이 가능한 현재의 다국적 글로벌 기업들은 기존의 지역 경제에 큰 타격을 끼칠 만큼 기존의 산업 국가들에게 산업공동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티글리츠와 같은 경제학자들은 공장 이전과 관련해 좀 더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저자들은 전반적으로 “1790년부터 1820년까지 영국이 기술적 진보 상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면에서의 보호주의 때문이었다”라고 덧붙여 논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계 경제의 자유화 흐름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은 분명하나 기존의 지역 사회가 붕괴되는 산업 이탈에 대해서는 적당한 규제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앞선 보잉의 사례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앞선 이 ‘불안한 세계화’와 관련해 미국이 본보기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필요한 개혁에 착수할 것을 요청하고, 여기에는 또한 “국민국가와 민주주의를 보존하는데 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글로벌화에 따른 전구적 문제에 대해 저자들은 아직도 국민국가주의적인 대처 방안에 기대를 갖고 있으며, 대니 로드릭이 세계 정부에 극도의 회의를 보인 것과 같은 공감을 역시 글에서 피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국민국가주의적 민주 정치의 부활과 강조가 분명 세계화의 문제에 어떤 대응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다소 동의하기도 합니다만, 마찬가지로 기후 문제와 관련된 문제 등과 같이 전세계적으로 의견 제시와 합의가 필요한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이민 정서에도 이러한 합의가 필요하지 않나 고민해봤습니다.

5장은 현재 기형적으로 돌출된 자본주의 시스템하에서의 금융화가 과연 탈금융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해 역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방대한 ‘유동성’으로 인해 남아도는 여유 자금을 다른 투자처에 투입하는 것은 소수의 부유층을 비롯한 다수의 경제 행위자들에게는 자연스런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기존의 전통적인 산업 경제 주체와 괴리되었다가 이제는 모든 기업들을 좌지우지 하게 된 모든 분야에서의 금융화는 필연적으로 충분한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기업들의 경영 자금 조달이라는 일차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이미 기업의 경영권을 위태롭게 하는 동시에 채무조차도 증권화하여 수익으로 남기는 이 비정상적인 행태에 소수의 이익자들에게만 막대한 돈이 돌아가는 것은 유동성의 위기를 논하기에 앞서 다소 위험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카지노 자본주의’로 설명되는 금융의 세계화가 제어되지 않은 채로 돌아다니는 것은 그 해결 방안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불명확합니다만, 지금부터라도 학자들과 경제 부문의 종사자들이 의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수의 연금 기금과 복지 기금들이 수익을 위해 금융 시장에만 매달려 있다는 것에 환경 개선의 필요성이 시급해 보입니다.

끝으로 6장에서 논의되는 저축의 필요성은 현재 기존의 과다한 저축률에 비견해도 직접적인 투자에 이르지 않는 것을 분석하고 있는데요. 왜 저축을 가장 희소한 자원이라고 했는지 공감이 갑니다. 단순히 저축의 확대를 금리 인상에만 기댈 수 없듯이, 그나마 꾸준한 저축 이면에는 자금이 산업계나 필요한 투자처에 공급되지 않는 현상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점은 5장에서 연계되는 자본주의의 금융화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1차와 2차 산업이 주로 개도국에 집중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다국적인 저축 자금이 과연 이들 국가에 투자될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분석 또한 필요해 보입니다. 글의 마지막 결론에 저자들은 고통의 분담화와 같은 소위 당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이미 환경 오염 산업의 개도국에 대한 아웃소싱으로 인해 과연 선진국과 개도국간들 간에 투자를 비롯한 상생하고 발전적인 협력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입니다. 이를테면 현재 프랑스와 같은 유럽국들과 이들의 피식민지배국이었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관계를 비추어 봤을 때, 명확합니다. 전반적으로 저축과 투자의 불균형과 과거 미국인들이 사실상의 중국계 자금으로 신용 생활을 했던 것과 같이 부분적인 세계화의 현실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즉, 저자들이 본질적으로 현재의 세계화는 반-세계화 semi-globalization 라고 지칭하는 것은 이런 점들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매번 이런 글들을 읽을때마다 느끼는 것은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가 세계 수준의 영향력과 파급을 생산해 내고 있지만, 다수의 경제학자들과 경제적 담론을 만들어 내는 지식인들이 체제의 균열을 비판하지 않고 오로지 단순하게 체제 옹호에만 나서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합니다. 또한 경제학자들이 앞으로의 남은 21세기를 불안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시스템 개선에 도움이 될만한 이론이라든가 대안 제시를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결국 12장의 이러한 위기들을 건너는 방안에 대해 일부의 의견 전환과 관점의 재시도 또한 분명 필요하지만, 자본주의 전반이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개선의 시급함을 모두가 인지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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