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그린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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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젠더학과 페미니즘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는 낸시 프레이저는 실제로는 후기구조주의에 입각해 사회철학과 정치철학을 연구하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인정받는 학자들중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만, 근래 국내에서는 페미니즘 연구가 큰 화두가 되면서 관련 학자들이 여러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그중 국내 출판계에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인용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프레이저입니다. 더불어 그녀는 악셀 호네트의 연구와 함께 사회정의 및 정의론에도 관심을 갖고 어쩌면 여성주의 운동 또한 이런 정의론에 입각해 해석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서는 프레이저의 연구가 약간 난해하다는 평가도 하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적절한 사회학적 지식 배경이 갖춰져 있지 않는다면 상당히 읽기 지루한 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토마 피케티에 의해 새롭게 점화된 정의론에 대한 최신 경향과 이론을 인지하고 있지 않고 있다면 꽤 어려운 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8년 원제 “Scales of Justice :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lbalizing World” 로 처음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1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대담을 포함한 마지막 장을 포함해 총 9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되었는 글의 전체적인 구조는 특히, 요즘들어 자주 요청되는 정의론에 대해 그녀는 새롭게 인식과 배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지구화 시대’에 헌법에 의한 사회 정의 및 국가적 정의론의 주된 배경이 되었던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거한 국민국가주의가 사실상 한계를 맞이하고 있다는 인식으로 주된 논거를 확대하는데요. 이것은 글로벌 기업들이 국가라는 개념에 연연하지 않고 생산기지를 값싼 노동력을 따라 수시로 이전함에 따라 더이상 자본주의의 이전 제약이 없어지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점은 약간 논란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해당 사회에 정착한 기업의 생산 공장에 일하는 노동자들이 과연 속지주의에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그 기업의 국적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정치적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점은 저자인 낸시 프레이저가 강조하는 오늘날 비정상적 사회에서 정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는 “불평등한 분배, 무시, 대표 불능의 문제”에 따른 정의의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에 명확한 답변을 요구하게 됩니다.

따라서, 과거 베스트팔렌적 국민국가주의는 오늘날 영토국가의 규제력과 세금 부과 능력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진 다국적 기업의 본질과 이 세계화 시대의 진실된 면모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한 한계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이런 낸시 프레이저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이러한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들과 수많은 부유층들이 “시민들이 법 앞에서 형식적으로 평등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보았다”는 이들의 본심이 ‘과연 사회에 정의가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고 보였습니다. 그래서 앞의 합리적 대응에 필요한 정의를 저자는 ‘삼차원적인 정의’라 표명하고 이에 “경제적 분배 차원 및 문화적 인정 차원과 더불어 정치적 대표 차원’을 포함하는 것을 뜻한다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삼차원적인 정의와 관련해서는 제일 마지막인 정치적 대표 차원이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겠는데요. 2장에서 논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적으로 아예 배제된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저자는 비판하고 이 점은 뒤에 4장에서 이어지는 대로 ‘비정상적 사회에 종속된 사람들의 정의’는 그 대표성과 정의의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며, 이것을 사회과학자들이나 사회철학자들에게 그 범주와 인정을 맡기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고 프레이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비정상적 사회에 놓여 있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인정과 운명을 소위 전문가들인 사회과학자들에게 일임해 버리는 것은 스스로 정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무방해 보였습니다.

물론, 광범위한 정의를 주장하는 일종의 평등주의 또한 두 가지의 독단이 있다면서 프레이저는 3장에서 언급하는데요. 정의와 평등에 관한 의견 불일치에 따른 논쟁도 없이 국민만을 ‘당사자’로 규정하는 암묵적 가정과 표준 사회과학의 정의의 ‘당사자’를 규정할 수 있다는 무언의, 입증되지 않은 가정이 그렇습니다. 전자는 일종의 베스트팔렌적 국가의 한계로 후자는 사회과학의 증거와 이론적 가정에 따른 이들이 ‘당사자’를 결정하는데 시민들의 맹신을 비판하고 있는 보였는데요. 사실 뒤이어 5장에서도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더불어 이런 시민들의 의사소통 권력이 국가로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구조적 힘들이 무엇이냐”에 일부 해답이 바로 이 사회과학에 대한 시민들의 맹신이 아닐까 추측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과학 주류에서 통용되는 내용들은 기득권자들의 관점을 잘 반영하고 그들의 약점을 방어하기 마련인데, 이런 사화에서 과학주의적 가정을 채태하는 것은 불이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고 보는 저자의 예견과 일맹상통한 부분이라 여겨졌습니다. 이것은 또 달리 말하면, 시대의 지식인들이 현재의 기득권과 결탁해 일찍이 신자유주의의 교조인 하이에크가 주장한 ‘정의 따위가 필요한가’에 매우 근접한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반대로 평등주의의 요청과 필요성과 관해서도 모두가 강제로 ‘결과주의적 평등’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게 될 것이므로 우리가 주목해야되는 평등은 ‘출발선상에서의 평등’이라 개인적으로는 그리 생각합니다.

곧이어, 다음에서 논의되는 ‘비정상적 사회의 부정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런 부정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요구들을 공정하게 검토할 수 있는 상대적인 안정틀이 필요하고 둘째로, 부정의를 시정할 제도화된 기관과 수단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휴머니즘적 원칙들이 결함을 가진다고 보았을 때, 우리 모두가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 all-subjected principle에 따라 포섭시킬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은 모두가 인식하는 공통된 원칙을 가질 것을 일종의 정의를 적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이 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규범화된 원칙은 이래서 매우 시급하며, 어쩌면 그런 연유로 사회과학자들의 각종 이론 제시는 현실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였는데요. 다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의 파편화와 시민들의 파생적 종속 문제에 대해 끊임없는 여론의 돌출과 이를 이론화 시키는 사회과학자들의 역할론은 분명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프레이저는 이러한 필요성에 대해 별반 언급은 안하고 있습니다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소위 전문가들의 조언 보다는 직접적인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의견 일치 및 광범위한 규범화를 더 인정하는 듯 보였습니다. 저의 결과론적인 입장은 매번 엘리트 정치와 전문가적 조언이 우리의 삶에 정확한 해결책이 되지는 않으며, 민주주의 자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민주 정치 자체를 우리의 손으로 영위해 가는 중요한 가치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첨언으로 얹고 싶습니다.

끝으로, 6장과 7장 그리고 8장은 보는 독자에 따라서는 주제의 중요성을 구분하는 장으로 여겨질 수 있을텐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들 3장을 일종의 보론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6장의 여성주의적 상상력은 말 그대로 시급한 정의와 5장에서 논의되는 좀 더 효과적인 공론장의 역할에 대한 첨언이 될 수 있으며, 7장의 푸코, 8장의 한나 아렌트의 지구화시시대의 인류의 위협에 관한 부분 또한 그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한나 아렌트에 대해 따로 추려볼 수 있는 부분은 그녀가 일찍이 지구화 시대의 시민 권리의 축소에 대해 우려했던 것으로 보아 그녀가 경고하는 다방면적인 증거 제시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악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일일이 분석했던 사상가로서 다른 어떤 사회학자나 철학자에 비해 그녀의 철학적 담론은 충분히 시민들에게 깊은 설득력을 보이고 있다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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