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유인가? - 당신의 삶, 당신의 선택, 당신의 미래
탐 G. 팔머 지음, 전계운 외 7인 옮김 / 바른북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특이하게도 편저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톰 G. 팔머는 자유주의 논저의 저자이자 자유주의 이론가입니다. 그는 세인트존스 칼리지를 거쳐 워싱턴 DC의 더 카톨릭 유니버시티 오브 아메리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는 미국의 억만장자인 코크 가문이 출연한 것으로 유명한 케이토 연구소 Cato Institute의 선임 연구원이지자 아틀라스 네트워크 재단의 수석 부회장으로 재직중입니다. 우선 이 책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은 7명의 번역자가 참여했다는 점과 번역본에 대한 정확한 원전에 대한 정보가 잡히지 않는다는 부분입니다. 아틀라스 재단이 출판한 것은 확실하나 팔머가 편저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일종의 에세이나 소논문 형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저로서는 다소 정보가 부족하였기에 이 정도로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저자인 팔머와 이 글의 대표(?) 역자는 자신들의 자유에 대한 근거와 해석을 위해 데이비드 보아즈의 논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사야 벌린이 기초했던 자유주의 담론과 여러 사회학 계통 및 정치철학의 흐름대로 서두에 언급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 LIbertarianism 를 자유주의로 소급해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고 싶습니다. 뒤에 3장에서 편저자인 팔머가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그 자체를 원칙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단순히 의미와 어감이 축소되는 자유주의자 만으로는 이들을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뒤이어 이어지는 논증에서도 저의 이런 인식을 뒷받침하는 내용들이 등장하고 있어 더욱 동의하기 힘들었는데요. 여기에는 다소 논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으나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법의 필요성을 개인들의 사유 재산 보호라든지 살인과 강간 등 극악의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효용이 있다는 식의 해석 뿐만 아니라 논증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헌법에 의한 정부의 제한’이란 목적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등 이들 모두가 단순한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지상주의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더욱이 편저자인 톰 팔머는 뒤에서 미국 오바마 행정부 후기에 일어난 티파티 운동에 대한 실망감을 표출하고 있었는데요. 이러한 소회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만했습니다.

간혹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오역되는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는 굳이 그것의 개연성과 내면의 숨은 뜻을 밝히지 않더라도 이러한 시민들의 일반의지가 근대 공화주의의 원천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가 조직되지 않은 자연상태에서 인간들의 서슴없는 행동과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위 및 여러 위험 상태에서의 요소들을 방지하고자 정부를 조직하고 시민의 권력을 위임시켰습니다. 이 쯤에서 되묻는 것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된 위임된 권력의 정부가 우리의 자유에 반하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듣고 싶어지더군요. 자유주의자들이 권력과 권위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냥 아주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쇼펜하우어가 인정했듯이 인간은 아주 불확실하기에 매번 인간과 인간 사이 혹은 인간 무리에 놓여 있는 개개인이 언제나 합리적 이성을 발휘하여 사회적 절제심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저도 회의적입니다. 어떻게 보면 시민들의 권리와 그 자유를 보호 하기 위해 정부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며 반대로 무정부 상태하에서 개개인들의 자유가 (실질적으로)으로 보장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이미 답이 나와있지 않습니까. 프란츠 오펜하이머가 피력한 국가론에 이미 비슷한 관점이 나오기도 합니다.

비록 자유가 정치철학의 범주안에 속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자유가 단순히 철학의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시장에서의 확실한 자유주의는 법과 제도에 우선해 ‘확실하고 자유로운 이익’ 만을 위하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편저자인 팔머는 글의 10장에서 “정부 간섭들의 거대한 연동체계가 엄청난 ‘주택 거품’을 창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실로 무지의 극치라 불릴만 했습니다. 애초에 스티걸-글래스 법의 무력화와 그에 따른 금융 시장에서의 거대한 모럴해저드가 어떠한 결과에 도달했는지는 이미 명확히 다 나와 있지요. 여기에 한술 더떠 그렇게 혐오해 마지 않았던 정부에 의한 공적자금을 받아놓고서도 개인의 영리활동의 자유를 숭상하고 누리던 자들이 이 공적 자금으로 퇴직금 잔치와 가당치도 않은 인센티브를 뿌려댔던 것이 눈에 선합니다. 더욱이 금융 위기에 책임있는 자들 어느 누구도 기소도 되지 않았던 것을 포함해서죠.

따라서 현재의 자유와 자유시장주의 및 꽤 민주화가 진행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이미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의 원칙이 충분히 실효성 있게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진핑 치하의 중국과 푸틴 치하의 러시아와 같은 무늬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전제 국가들은 아직도 시민의 자유가 묘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글의 6장인 정치적 자유의 원리에서 등장한 ‘결과의 평등’이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어떤 진정성을 함의하고 있다면 정치적이고 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에 처한 시민들의 자유가 과연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해 더 깊은 논의를 해봐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팔머는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를 정부를 통해 논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봤지만, 현재 일반 시민들과 부유층 및 거대 기업의 소유자들과의 권력 관계가 현저하게 차이 나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이러한 불균형한 권력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점에 대해 자유주의자들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고백해봐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에 넒게 펴져 있다고 해석하는 부분에서 현실성이 동떨어져 있다고 제가 이해했던 것은 바로 위의 양자 사이의 단절에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치에서 실현되어야 할 최우선의 가치는 바로 자유다”가 아니라 정치에서 실현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들 중에 하나가 자유다 라고 해야 급진적인 자유주의자들 및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모든 시민에게 얼마간의 정치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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