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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 민주주의의 적인가, 개혁의 희망인가
미즈시마 지로 지음, 이종국 옮김 / 연암서가 / 2019년 10월
평점 :
일본 지바대학의 법정경학부 교수로 있는 미즈시마 지로는 일본 내에서도 보기 드문 네덜란드 정치사 및 유럽 정치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일본의 한 월간지에서의 대담을 통해 일본내에 일고 있는 포퓰리즘적 상황에 대한 진단과 동시에 비판을 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외연이 침식되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의 경고는 쉬이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미스지마 시로의 이 책과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작년에 번역 출간된 연암서가의 ‘보수주의란 무엇인가’와 같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역자가 부탁받고 바로 미스지마 시로의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는 일종의 후일담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출판사가 이런 기획물로 사회정치학 시리즈 단행본을 추진해 봤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2016년 최초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 출판은 올해 10월에 이뤄졌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포퓰리즘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전자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다른 무엇보다 의구심을 갖고 있는 점은 이것이 결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해악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부정적 가능성입니다. 얼마전에 국내의 모 티비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보수적 논객으로 참여한 한 인사가 포퓰리즘이 대중들의 정치적 요구와 활발한 참여에 기여한 바가 있지 않겠느냐는 평가가 많은 사람들의 포퓰리즘을 바라보는 순진한 인식과 관련있다고 여겨집니다. 일전에 C. 라이트 밀스는 대중 정치가 심하면 중우 정치 내지는 선동 정치로 귀결뒬 수 있다고 경고한 대로 비슷한 일면의 포퓰리즘은 가장 큰 문제로 대중을 선동하여 그것을 정치적 이득으로 삼는 선동 정치인의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밀스의 경고를 곧이 곧대로 일반 대중의 정치 참여가 군중 정치화 된다는 판단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많은 민주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 참여가 없이는 민주주의 자체의 존립이 흔들릴 가능성에 동의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각국의 정치 상황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직업 정치인들의 등장과 그들로 인해 만들어진 정치 불신으로 인해 적지 않은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끊게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양 극단의 정치세력들 가운데 극우에 있는 자들이 말로는 민주주의를 입으로 외치지만 내심으로는 사실상 엘리트 기득권층에 의한 과두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의 보수 (사실 극우) 티파티 운동이 진보좌파를 ‘격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과 안보와 국가 체제의 수호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위해 얼마간 시민의 권리를 법으로 제한해도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각국에서 나타나는 것을 봤을 때, 무조건 잘못된 심증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기실 포퓰리즘의 어원과 사회적 의미를 봤을 때, ‘포퓰리즘’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이고 역겨운 단어로 여기는 지식인들이 많고 정치 본질적으로 극우와 포퓰리즘의 구분이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현 유럽에서 극우와 포퓰리즘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왜 포퓰리즘이 파시즘으로 가는 길을 닦는 것과 같다는 수식에 동의하게 되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1장의 포퓰리즘의 간략한 정의를 제외한다면 북미와 남미, 유럽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과 최근인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를 끝으로 포퓰리즘의 전세계적 상황에 대한 나레이션이 끝나게 됩니다. 또한 폴 태가트와 카스 무데 및 크리스토발 칼트바서 등의 포퓰리즘을 연구한 학자들의 여러 인용도 글에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 포퓰리즘의 가장 큰 난해한 부분은 ‘포퓰리즘 자체를 학술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점’일 것입니다. 이것은 포퓰리즘 현상의 정확한 학술적 법칙을 찾기가 어렵고 대중을 선동하는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현실 대안이 전무하다는 점과 트럼프와 같은 경우는 위험스럽게도 많은 연설에서 대중들의 궐기를 부추기는 등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현재 유럽에서 보이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이슬람 배외주의를 거의 신념화하고 있는 점도 정치 이론적 측면에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현상입니다.
일단 3장에서 보여지는 유럽의 포퓰리즘과 관련하여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프랑스 등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의 국가들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에 의한 민주적 정치 제도를 수립하여 발전시켜 온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인들이 보기에는 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풍토가 견고해 보이는 지역입니다. 흔히 민주주의하에서 벌어지는 이런 포퓰리즘 현상과 이 안에서 대중을 모으는 선동 정치인들이 입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만큼 정말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저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나 이득에 귀결하려는 본심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체제에 대한 적절한 대안 없이 자극적인 발언으로 대중들을 오도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정치 소외를 느끼는 계층의 분노를 돌리고자 이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게 한다든지, 이미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3D 업종에서 이미 좋지 않은 처우에도 일하고 있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등의 진실을 제대로 말하지않는 태도는 일반적인 정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도 역시 인용하고 있듯, 샹탈 무페는 이 포퓰리즘 정치의 영향력에 놓여 있는 이들이 나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6장과 7장에서 영국의 ‘내버려진 (left behind) 사람들’과 미국의 러스트 벨트에 있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은 영국독립당의 사례와 도널드 트럼프의 사례는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정치적 소외에 처한 이들애 대한 어떠한 사회적 안전 보장 없이 선동과 립서비스 만으로 어떤 결과가 일어났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제의 급격한 자유화와 글로벌화로 발생한 다수의 정치적 경계의 바깥으로 몰리는 상황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필요하고 다시 시장에 대한 민주적 장치를 만들고 사회적 안전을 재정비 하는 등의 실효적인 제안 등이 필요하나 앞선 포퓰리스트들은 이것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단지 표와 지지를 위한 이들의 존재가 필요했으며, 특히 트럼프 같은 경우는 당선 이후 그나마 있으나 마나한 ‘오바마 케어’를 폐지하기 위해 밀어붙인 것으로 보아 이들이 얼마나 자신의 정치를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하고 있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들 선동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당위적 설명이 현재 시급히 필요한 실정입니다. 단순히 저학력의 단순 노동자 계층들이 포퓰리즘적 정치를 지지한다고 도식적으로 논하기 보다는 왜 기존 정치가 이들을 효과적으로 포용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금보다 더 뼈아픈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존의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를 왜곡해 선동하는 것이 분명 해결과제는 아니며,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한 계층을 수용하고 현실 정치를 개선하기 위해 나서는 겸허한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와 이들이 의회내에서 어느 정도 발언력을 확보할 수 있게 우리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중요한데, 그외에 어떠한 현실적 대안이 있을지 모두가 더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여기에는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한대로 시민들이 모여 정치 공론화를 할 수 있는 각 개인들의 역량 확대와 스스로를 위한 재교육 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치 불신을 조장하여 시민의 정치 참여를 무익한 것으로 몰아 이익을 얻는 정치인들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포퓰리즘이 민주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어리석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중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