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자, 가지지 못한 자 - 세계 불평등에 대한 색다른 시각
브랑코 밀라노비치 지음, 정희은 옮김 / 파이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세르비아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인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의 선임 학자이자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의 객원 석좌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전에 세계은행 연구소의 수석 경제학자로 일하였고, 여러 학술지에 소득분배에 대하여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득 불평등과 관련하여 최근에 국내에도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라는 그의 글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Haves and The Have-Nots”로 지난 201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11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현대 경제학의 선구자 가운데 데이비드 리카도가 관심을 가졌던 분배는 소위 말하는 기능적 소득 분배 즉, 국민 소득이 계층 간에 어떻게 나뉘는지를 따지는 것이었는데, 반면에 저자인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명백하게 “개인 간 소득 분배”에 주요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빈번하게 인용되는 ‘파레토 개선’의 파레토는 소득 분배 법칙을 연구한 거의 최초의 학자로 보입니다만, 이후에 경제학의 안마당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에서 앞선 소득 불평등에 대한 연구가 단적으로 기피되어 온 연유에는 미국인들 스스로 자신이 수령하고 있는 소득과 그 권리에 대해 일종의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쪽에서 외면을 받고 있었던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빈곤의 퇴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연구 같은 경우는 미국에서도 수월히 스폰서를 구할 수 있겠지만, 이 ‘소득 불평등’과 같은 주제에 있어서는 모두가 외면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불평등한 개인, 국가, 세계’라는 3개의 소주제 구성되어 있는 이 글은 특히 각 총론 이후 몇가지 가설과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짐으로써 단순한 관념이론적 서술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꽤 칭찬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저자는 개인들의 전반적인 소득 문제에 있어서 특히 ‘후생’과 관련한 부분을 강조하며 각 개인들의 소득 불균형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보장받아야 될 사회적 보장의 실질적 차별을 어떻게 초래했는지 꽤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수치화 된 GDP를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처분 소득을 포함한 실질 소득 지표를 면밀히 비교해 논증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시아 지역의 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및 홍콩을 지니 계수와 실질 소득을 계산해 앞에서 열거된 국가 이외에 베트남이나 태국, 방글라데시 등의 소득 저위 국가들과의 객관적 수치 비교를 제시합니다. 약간의 곁다리로 이 글의 3장에서는 냉전 시기에서 제3세계에 불과했던 한국과 대만 등이 경제 발전과 더불어 거의 미국과 유럽에 준하는 제1세계가 되었으며,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소득 분포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이들 국가들이 실질적으로 유럽 연합과 유사한 국가 연합인 ‘아시아 연합’이 왜 불가능한가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 아시아의 선진 국가들이 그렇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막대한 돈을 투입하여 동일한 경제적 외형을 구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지역내의 민족주의적 요구 또한 아시아 지역의 단합을 방해하는 것으로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소득 불평등의 논점으로 돌아와서, 현재 전세계가 직면한 이 경제적 불평등이 다채로운 원인 가운데에서도 심각한 위협이 되어 온 것은 명백합니다. 저자는 실질적인 부의 재분배나 소득 재균형이 더할나위 없이 ‘빈곤층에게 이득일 것’이나, 의외로 중산층에서도 이러한 주장이나 요구에 동의를 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가까운 미래가 아닐지라도 자신들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다수의 중산층들은 이 소득 분배에 대해 수긍하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외에도 후생적인 측면에서도 균형적인 소득 분배는 매우 필요하다고 보고 있는데요. 이는 반대로 “대대적인 소득 이전이 이루어지면 그 비용을 부담하는 부유한 구성원들이 분개할 것”이라고 글에서 예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과연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세계화 시대에 불평등이 해소되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동시에 세계화 시대에 이르러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자본의 이동이 마땅히 부유한 국가에서 빈곤한 국가로 일종의 투자의 형태로 옮겨 갔어야 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고 저자는 비판합니다. 결국 막대한 자본은 부유한 국가에서 마찬가지로 부유한 국가로 이동했다고 저자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3장에서 “세계화와 세계적 불평등 사이의 인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가”에 대해 이것의 문제를 명백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세계화 자체가 많은 국가들과 사람들에게 번영을 안겨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마도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히, 이점은 과거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던 아프리카와 인도와 같은 케이스에서 종주국들이 이들을 뼛속까지 깊이 착취했으며 이러한 상황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왔다고 저자는 판단합니다. 대햑 기본적인 자본주의적 이행에 있어서 그 토대가 이들 지역과 국가들에게 전무했으며, 마지막 결론에서 저자 역시, “결국 아프리카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스스로 자구책을 세워야 한다”며,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연결고리는 세계화 과정이 결코 모든 이들의 삶의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고 “경제체제의 내생화”라는 표현대로 오랜 시간이 투입되어 기술 축적이 이뤄진 국가에서나 쓸만하고 쓸모 있는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원천적인 해석에 이릅니다.

끝으로 우리에게 나쁜 불평등이란, 기득권에게 부를 유지하는 수단을 (이유없이) 보장해 주는 것으로 이를 최소한 가능성에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균등한 교육의 보장’이라고 저자는 조언합니다. 실질적으로 각 사회에서 부의 원칙적인 재분배가 실효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 모두는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회 시스템이 누구나 계급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지배층의 행동이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가 일침하는 대상이 ‘금융 엘리트들’인 것은 마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미국에서는 이런 불평등이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유럽에서는 국가의 문제로 이해된다는 저자의 인식은 각 사회가 어느 정도로 부의 불평등을 이해하고 다루고 있는지 드러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3장에서처럼 중남미와 아시아를 비교하며 소득 불평등이 대륙별로 어떠한 지경에 처해 있는지 분석하는 등의 여러 수치화들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얼마전에 번역된 대앤 코일의 ‘GDP 사용설명서’나 아주 최근에 읽었던 대니 로드릭과 저자의 관점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존 롤스에게 공정한 세계란 공정한 국가들이 모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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