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표상 - 지식인이란 누구인가?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5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최유준 옮김 / 마티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지난 2003년에 타계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태생으로 그동안 서양에서도 손꼽히는 중동학 분야의 학자로서, 또한 영문학과 비교문학, 문명비판론에도 큰 족적을 남긴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표적인 저서 ‘오리엔탈리즘’으로 명성을 얻었고 오늘날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그의 아류들이 이 오리엔탈리즘을 의도적으로 한정해 차용했지만 그 이전까지 서양이 동양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이론적 체계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는 약간의 개인적 소회로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중동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던 이유에 대해 자신이 이슬람 가정이 아니라 일종의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랐기에 가능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그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에 걸쳐 노력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지난 1993년 영국 BBC의 리스 강좌에서 밝힌 지식인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1994년 책으로 엮은 것으로, 국내에는 2012년 번역 출판되어 현재는 해당 출판사의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의 한 권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다만, 본격적인 글의 논의에 앞서 출판사 측에 한가지 밝혀두고 싶은 점이 있는데요. 엄연하게 편집자를 두고 이 책의 출판을 진행했으면서도 왜 문단의 줄맞춤은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인지 아주 의문이 듭니다. 문장이 이어져 본문이 되는 오른쪽 맨 끝은 줄맞춤이 전혀 되지 않고 삐뚤삐뚤합니다. 이건 프로그램으로 줄맞춤을 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하지 않은것인지 궁금한데 더욱이 2쇄를 찍을 동안 수정도 전혀 하지 않은 점에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이런식으로 만들어 독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과 관련된 평가에 대해 “오늘날 세계는 자신들의 노동으로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권위를 제공하는 것을 주요한 역할로 삼는 지식인으로 가득차 있다”고 언급합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지식을 상품화화하면서도 일면에는 권위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뜻을 갖고 있는 변형된 지식인들에 대해 일종의 비판적 메시지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장과 2장은 이런 지식인들을 쥘리앙 방당의 글을 통해서 비교 분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방다의 그 과격한 지식인 비판을 우리 모두가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명언적 측면에서는 귀담아 들을만한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이를테면 자기 양심을 걸고 진실을 말해야한다는 주장 말이죠.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 ‘지식인의 표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쥘리앙 방다의 ‘지식인의 배반’이 필요합니다.다행히도 국내에 역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에드워드 사이드가 방다의 입을 빌어 말하는 것은 “진정한 지식인들이란 화형에 처해지거나 추방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다”는 꽤 어려운 도덕적 양심을 말합니다.

사실 전통적으로 지식인들은 엄밀한 권력과 거리를 두고 심하면 권력에게 미움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물론 권력과 밀착한 지식인들도 분명 있어왔으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자기 나라를 떠나 망명을 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지금 막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은 슈테판 츠바이크입니다. 3장은 바로 그 점에서 아도르노를 통해 망명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도덕적 양심과 지식인의 책무를 잊지 않았던 한 인간의 행로를 되짚어 보고 있습니다. 아도르노와 관련된 사이드의 몇줄 평가라면 아마도 “극단적인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지식인의 행동이 엄청난 가치를 갖게 된다 하더라도 집단 투쟁에 대한 충성심이 지식인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거나 지식인의 사명을 축소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점은 민족과 국가의 생존이 직결된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 당위성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식인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도르노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죠. 물론 3장의 경우에 다소 달갑지 않은 키신저의 사례가 나옵니다만 결국은 지식인이 자신의 양심을 위해서는 망명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꼭 그 망명으로 인한 결과가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이드는 밝히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식인들이 스스로 귀중하게 여겨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마도 사이드는 밝히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뒤이어 4장은 냉전시기 이후부터 첨예하게 등장한 전문화와 전문가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세계는 전문화 내지는 전문화의 압력에 이르렀는데요. 이들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국가 권력에 봉사함으로서 자신들의 전문적 지식을 펼쳐냈고, 전문성으로 통제된 고립된 시장이라는 측면의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 소개된 노엄 촘스키의 일례는 꽤 의미심장합니다. 사이드는 중동과 관련된 촘스키의 여러 저작이 다른 전문가들보다 논리적이고 의미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에 있는 정치외교 전문가들이 촘스키와 이 분야에 대해 같이 말을 섞는 것을 피해왔으며, 과연 촘스키가 그러한 ‘전문 자격’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해 왔다고 그들을 비판합니다. 이 점은 오늘날의 아주 명백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아닌 자들은 말을 하지 말아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입을 놀리지 말아라 바로 이러한 상황 말입니다. 의료계라든지 원자력 산업을 비롯해서 그 전문가들의 시장은 여러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5장에서 사이드가 밝히고 있듯이, 지식인들이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적 자유’란 시민 모두가 할말을 해야하고 기득권이 전문가 집단을 이용해 민주주의를 사실상 과두제로 바꾸려 하는 의도를 지식인이 이를 막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꼭 지식인이 아니더라도 시민들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죠.

특히 5장에서는 “지식인의 행위에서 가장 보기 흉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회의 악행에 대한 비난을 퍼부으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에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인의 도덕적 책무를 등한시하는 일로 반대로 토크빌의 사례를 통해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의무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4장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 운동을 벌이고 있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며, 지식인들이 자신의 국가와 집단을 더 우선시하며 가치전도를 무분별하게 해댄다면 그것이 과연 그 국가와 집단에 이로운 일인지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냉전 시기의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서 벌여졌던 인식적 배경 혹은 서사적 맥락을 인용하며 분석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언제든 다시 정립할 수 있다는 식의 하위개념으로 두는 논법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사실상 그러한 인간들이 모인 사회는 아주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앞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언급한 전문화 내지는 전문가의 대두에 대해 몇가지 언급을 했습니다만 오늘날의 학문과 산업 혹은 지식과 전문화의 경계가 이제는 확연히 구별이 되지 않을만큼 모호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면밀한 계몽주의적 접근에 기반한 지식인들의 도덕적 책무가 물론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이 과연 온전히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불확실한 예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것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그것이 이상주의라는 덧칠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사회의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필요해보입니다. 시장에 정치는 필요없다는 신자유주의적 이념의 시기에도 그나마 할말을 하는 지식인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희망이라도 걸어볼 수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이드가 언급한 다른 어떤 단어들 보다도 제게는 이 ‘민주주의적 자유’가 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대중적 요구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지식인은 그러한 집단주의에 맞서 할말을 해야 하며, 이에 따르는 사적인 손실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