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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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독일 유수의 사회과학 대학인 만하임 대학에서 수학하고 도쿄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현재 일본 가나자와대학의 법학부 교수인 나카마사 마사키는 일본 내에서 한나 아렌트에 관한 연구로 명성을 쌓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한나 아렌트 권위자인 숭실대 김선욱 교수와 한나 아렌트를 주제로 그가 대담에 나선다면 독자들에겐 꽤 즐거운 기회가 되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저자인 그가 법학을 전공했음에도 한나 아렌트에게 보인 학문적 관심은 일본 내에서 학자들과 지식인들을 가르는 첨예한 정치사상적 기준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의 원전은 지난 2009년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묻고 따지지도 않는다는 출판사 갈라파고스에서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저자인 나카마사 마사키 교수는 한나 아렌트에 관한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정치사상가들이 존재하지만 많은 독자들과 시민들의 요구에 힘입어 많은 정치적 과제들과 문제들에 대해 명료한 해답을 도출하는 것을 ‘위대한’ 반열에 오르는 계단인데 한나 아렌트는 이와는 정 반대라고 언급합니다. 즉,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명료한 해답’ 보다는 수많은 토론 거리들을 안겨주는데 그녀의 사상이 본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차이를 좁히는 대화와 토론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미덕이 오늘날 시민사회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에게 정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유인하는데 가능성 높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취지에 입각해 이 책은 크게 4장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전체주의와 악의 평범성을 고찰해보고, 2장은 많은 철학자들이 탐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살펴보고, 3장은 인간 자유의 본질과 그것을 통한 공화주의적 자유를, 4장은 기본적인 칸트 철학이 내포하는 사유와 행위 그리고 방관에 대해 그녀의 독특한 사유 체계를 끄집어 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글 전체가 술술 읽혀지는 편이나, 다만 4장에서는 약간 정밀한 독서가 필요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장과 3장이 꽤 설득적으로 다가왔고, 동시에 흥미로웠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와 관련해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외곽에서 발생한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정치 붕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근대가 본디 내포하고 있던 “모순의 발현으로서 전체주의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반유대주의를 통해 전체주의를 위한 서사적 소재가 마련되었고, 국민국가의 생성과 제국주의에 의해 대중사회가 성립, 이후 국민국가의 경제사회적 존립 기반이 크게 흔들리면서 대중이 동요하고 이런 대중들을 이용하는 총체적인 국가 권력을 아무런 저항없이 휘두르려는 정치 권력이 출현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악의 평범성’과 관련해서도 아이히만 본인이 악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일상적 삶을 영위했던 평범한 인물이 조직의 명령에 동조함으로써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는 데 어떠한 판단 기준을 갖지 않은 인간의 본질로서 그녀는 바라봅니다. 이 점은 과연 “모든 인간은 선/악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는가”로 다시 묻게 됩니다. 존 스튜어트 밀과 토마스 홉스를 비롯한 인간 교육의 중요성을 통해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회사상가들과는 완전 다른 “‘인간 본성’의 정의와 규정이 과연 적확한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아렌트의 사실상 인간 본성의 불확실성을 이 책에서는 소개하고 있는데요. 저 역시 인간 본성 자체를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것보다 사실상 인간이 스스로가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로인한 본연적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절멸과 관련하여 “동유럽과 중유럽의 유대인 이송에 유대인 평의회가 협력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언급”했는데, 후에 수많은 유대인 단체와 조직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일등 국민이었던 수많은 일본인들이 국가의 명령에 호응에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나쁜짓’을 벌인바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이들이 자유의사에 의해 악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단정하고 많은 일본인들의 사악함을 드러내려 할 것이라고 말하며, 단죄의 문제에 대해 사실상 적절치 않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교묘하게도 맥아더의 미군정이 일왕을 단죄하는 것은 결국 일본 국민 전체를 단죄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켜 전후 일본을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편입시키는데 크나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관점에 동일시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일왕의 단죄가 이뤄지지 않아 일본인들이 면죄부를 받은 것인지, 아니면 일본제국이 범한 과오의 책임을 대다수의 일본인들에 묻는 것이 과한 일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아렌트의 그 악의 평범성과 선/악을 구별하는 인간 본성의 기준의 모호성을 여기에다 덧붙이는 것은 저자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부분입니다.

보통 아렌트가 주장하고 연계시킨 사고의 체계들은 거의 전통적인 철학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을 통해 기준을 잡은 것들도 많은데요. 이를테면 2장의 ‘인간 본성’에 관한 부분입니다. 마땅히 인간은 사적 영역에서 자신이 목적하는 바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면, 과연 이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어떻게 구분하고 개인의 이익을 공적 영역으로까지 확대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근절할 것인가를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렌트는 개인들의 사적 이익을 포함한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과 엄밀히 분리시켜야 하며, 공적 영역에서의 타인과 타인과의 공공선에 대한 대화와 토론 및 가치 추구에 당위성을 부여한 바가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한나 아렌트 자신은 ‘사회적 영역’에서 사람들이 사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공동의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같은 취지로 저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이 점은 오늘날 현대 사회가 개인들의 공/사의 구분이 유동적이 되어가고 있고,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에서 일반적인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 본성 자체가 개인의 이익을 명도하는 것은 그것의 당위적인 혹은 정당성의 원칙을 부여하기 전에 본능이라는 부분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은 실정입니다. 따지고보면 오늘날 공적인 영역이 이러한 관계로 더욱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차피 개인의 사적 영역을 희생하여 공적 영역에 투신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3장인 인간의 자유 본질에 대해서는 “정치적 공동체의 ‘공동선’애 대한 탐구를 멈추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다. ‘공동선’을 둘러싼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인간’의 본래적인 ‘자유’가 나타나는 것이다”는 아렌트의 평가를 저자는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인간 해방’이 결코 자유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그녀의 확고한 주장과 부합되면서, 더불어 루소를 통해 확립된 ‘공화주의적 자유’와 동일한 가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정치’와 ‘자유’는 매우 긴밀하며, 미국 건국으로부터 시작된 이런 정치와 자유의 관계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관점임을 저자 역시 동의하고 있습니다. 요근래의 신자유의적 입장에서는 정치와 자유의 관계만으로 자유를 온전히 해석하는 것은 다소 어렵게 되었습니다. 시장이 사회와 정치를 시녀로 만들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적 시민사회에서 각 시민들이 동일한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정의 내리는 것은 허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아마티아 센의 근원적인 분배 문제로 인해 각 개인들이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상이하고 특히 자본의 존재는 자유를 더욱 보장하는 ‘재화’가 되었습니다. 물론 위의 상황을 잠시 외면한다면 전통적으로 많은 공화주의자들이 법에 기초한 인간 자유의 증대를 주장했던 점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최근의 필립 패팃의 공화주의적 자유의 옹호는 바로 앞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인간이 선을 통한 사유와 행위를 근간으로 공공선을 합목적으로 여겨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 사상의 기초는 칸트로부터 시작된 계몽주의적 철학과 궤를 같이 합니다. 개인의 도덕 유무는 계몽주의적 접근의 실현 유무이기도 했으나, 그녀가 인간 본성의 본질을 다르게 봤던 것은 인간이 본디 도덕과 선을 추구하는 존재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공적인 가치에 대한 많은 개인들에 대한 그녀의 촉구는 충분히 공감받을 만합니다. 타인과의 교섭을 통한 소극적 자유의 획득이라는 부분도 홀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 어불성설에 가깝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공화주의적 기반에 헌법과 제도에 의한 모든 이들이 수용하고 긍정할 수 있는 자유 획득이 중요한 결론으로 주어진다면, 배타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유지상론자들’의 주장은 대립 이전에 호응하기 힘든 문제이기도 하겠죠. 4장의 끝머리에 저자인 나카마사 마사키는 ‘방관자’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현대 일본에서는 직접적인 이해관계 당사자나 당파적으로 적극 참여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주제는 현행 정치적 논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며 에둘러 현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국민 일반이 공평한 관찰자, 즉 공중으로서의 판단력을 가동하여 자신이 속한 정치적 공동체의 과거를 평가할 기회를 현재 일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고 결론에 이릅니다. 아렌트를 통해서도 일본의 과거 역사문제가 단순히 칸트가 주장했던 ‘관찰자의 삶’으로 기능하고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지는 저 개인적으로도 회의적입니다. 정치적 자유를 위한 공공선에 대한 공동의 가치 정립은 앞으로 일본 사회의 공공선과 사회를 구성하는 일본 시민들이 역사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열린 상태로 나아가게 되는 길임을 인식해야 하겠지만, 이러한 패러다임의 구축이 노골적인 국가의 방해를 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의지가 결여된 것인지는 아직도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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