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를 열다 - 분단된 세계 속에서 사고의 프런티어 5
강상중 외 지음, 이예안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기획 / 푸른역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분단된 세계속에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일본 이와나미쇼텐 출판사의 ‘사고의 프런티어’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이곳에 참여한 학자로는 강상중, 사이토 준이치, 스키타 아쓰시, 다카하시 데쓰야로 흔히 일본내에 대표적 리버럴 지식인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에는 강상중 전 도쿄대 명예교수와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알려져 있는데요. 그만큼 적잖은 기대를 하고 책을 손에 잡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출판된 원전은 지난 2009년에 소개되었고, 국내에는 2015년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의 기획하에 푸른역사에서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이 책은 크게 네 명의 집필진이 참여한 대담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요. 주제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번째는 문명과 야만으로 대비되는 이해속에서 근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카를 슈미트의 예외상태 및 후쿠자와 유키치의 왜곡된 탈아주의를 바탕으로 해석하고 두번째는 전 지구적인 글로벌리즘에 의해 국민국가의 해체가 이뤄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분할과 경계라는 주제로 난민 문제를 비롯한 심각한 빈부격차, 복지국가의 패퇴, 민주주의 하에서 발생하고 있는 계급 고착화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양자 다 얼마를 논하더라도 중요한 문제들이라 책의 지면이 이 모두를 포함할 수 있을지 약간 우려가 들기도 했습니다만 전부 일독하고 나서는 충분히 문제 제기에 이어 적지 않은 방안도 제시하고 있다 판단되었습니다.

페리 제독의 ‘흑선’에 의해 강제 개항을 하게 된 당시 막부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쳐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근대화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아마도 그러한 연유로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사상가는 자신들의 나라가 주변의 봉건적인 왕조 국가들보다 더 우월하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아시아의 영국’을 기대하면서 더욱 국가 개조에 나서게 됩니다. 저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일본의 개항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이제 자신들은 야만의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문명국의 지위를 획득했으며, 주변국인 조선이나 지나는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왕조 국가로 자신에 비해 저위개념적 상태로 규정하게 됩니다. 즉, 자신들은 다른 왕조 국가들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우월적 인식론이죠. 여기의 글은 이를 바탕으로 문명을 획득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야만적 세계의 대결 구도로 해석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오늘날의 세계와도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는데요. 미국이 뉴욕발 9.11 테러를 겪고 나서 마찬가지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획득한 보편적 세계 대 그렇지 않은 원시적 야만 지배 세계, 그러니까 이슬람 세계를 여기에 빗대어 해석하게 됩니다. 적과 아군의 이분법 구조보다도 카를 슈미트가 주창한 ‘예외상태’에 의거 저쪽편과 이쪽편의 끔찍한 예외상태로 왜곡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전에 새뮤얼 헌팅턴은 주저 ‘문명의 충돌’에서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해 서구와 다른 지역의 문명을 슈미트의 이론에 가까운 해석 구조를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로 대변되는 일본의 근대는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전부터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에 주판을 두들겼고, 이미 조선과 지나의 왕정과 이들의 전근대적인 상황을 무조건 혐오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칼잡이들의 정권이 일본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 체계였던 국가가 서구의 문명과 동양의 전근대를 대결구도로 삼아 자신들도 역시 문명화 된 국가라고 여긴 점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미국에 의해 전후를 맞이한 일본은 이러한 왜곡된 역사적 가치체계의 해결이 전제되지 않고 또한 전후 책임에 대한 문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됨으로써 이러한 부분들이 오늘날 일본의 전면적인 역사 수정주의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과는 약간의 논외지만, 현재 일본내의 그나마 상식적인 관념을 가진 리벌럴한 지식인들과 이에 호응하는 시민단체가 지리멸렬한 상황이라 더욱 과거 역사 문제에 따른 사과 요구가 이들이 자생하는 토대를 제거하게 될 수 있다고 조언하는 것은 얼마나 기를 차게 하는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역사 문제 및 일반적인 국가 관념 모두를 포함한 일본의 상황과 반대로 우리와 중국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책에서도 “일본이 역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주변국에게 성의있는 사과를 하게 된다면 정말 일본 사회가 더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실로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사항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시아 네트워크’라는 연대를 바라고 있는 이들 리버럴 지식인들이 그만큼 전후 사정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미국이 정의하는 자유세계와 민주주의 블럭에 우리와 일본이 속해 있다는 점과 동맹 체계에 의한 안보 조약이 공통된 입장이라는 점은 물론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면밀한 주의와 접근이 필요하긴 합니다. 외교에서 그 진정성이라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없겠으나, 대일 관계의 진정한 구축은 ‘정치 수준에서는 늘 화해한 것처럼 연출하고 있다’는 점이 한일관계의 진정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두번째 논제인 전세계적 글로벌화에 따른 ‘배제의 시스템’은 일찍이 헤겔이 예견했던 근대 이후 ‘보편적인 상호 의존 체계’과는 완전 다른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탈락을 통한 주변부의 사람들을 더욱 바깥으로 내몰고 노엄 촘스키의 말대로라면 부자들에게 더 많은 부를 집중시키게 만들어주는 오늘날의 이 시스템이 사실상 베스트팔렌 이후의 국민 국가 개념을 후퇴시키는 것에 일조했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주입되고 사회 안전망을 비롯한 복지 국가가 성공적으로 철폐되어 왔던 지난 얼마간의 시간을 뒤돌아 보노라면 다시 국가의 기능과 국가의 역할을 환기시키는 작업이 지금도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공격받고 있는 현실은 큰 딜레마 이기도 합니다. ‘배제의 완성’에 이르는 작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엄밀한 현실임에도 국가 본연의 기능 회복을 무분별한 국가주의의 확대나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의 개입 등으로 오판하는 것은 시민 전체에게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경제적 배체와 사회적 정치적 배제가 즉시 연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단은 꽤 명확한 부분입니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인한 주변부 빈자들에 대한 외면과 몰이해적 판단은 시민 누구나 그러한 처지에 놓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더욱이 중동의 안보 불안과 정치적 붕괴로 인한 유럽과 다른 지역의 난민 유입은 전통적인 국민 국가 개념의 틀로서 이들을 과연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모두 당사자성을 갖는다”는 문장이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 난민 모두를 임의의 장소로 전부 몰아 최소한의 주거 시설과 지원만을 해주고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봤을 때, 지금까지 보여왔던 배제와 경계의 논법으로 미해결의 상황으로 치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생산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기존 사회에 이득이 될 수 있는 방안으로 오늘날 전면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독일과 같은 케이스에 고려해 볼 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 난민 문제는 자크 랑시에르가 언급한 대로 단순한 도덕적 원칙 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난민과 지역민 양자 모두가 이득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그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은 어떤가 싶습니다.

미국을 향한 9.11 테러 이후 냉전이 끝나고 더 많은 자유 민주주의의 시대를 기대했던 우리들에게 연이어 발생한 중동의 전황과 테러리즘의 확대는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 이득을 얻는 자들을 양산했고, 이러한 정세에서 중동의 일부 권위주의적인 이슬람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과 더 잘 어울리게 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전세계 민주주의의 큰형이라 불리우는 미국이 권위주의 정부를 용인하는 것을 넘어 지속적인 제휴를 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아랍의 봄도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가까운 이해당사자에 의해 그렇게 덧없이 허물어졌고, 여기에서 말하는 ‘내버리기의 폭력’도 바로 이러한 현실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겠죠. 모두가 입으로는 정의를 말하지만 내심은 그러한 정의를 바라지 않는 현실, 카뮈가 살아있다면 그는 일견 ‘거대한 부조리’라고 외쳤을테죠. 정말 우리 모두가 손을 맞잡고 무덤에 들어가게 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중동의 문제들로 비롯된 난민들과 이러한 문명과 야만, 혹은 내편과 저쪽편의 첨예한 예외주의는 얼마나 민주주의적 통제를 벗어나게 될지 이 점 또한 지켜볼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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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6-13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다 읽고 나서 피에르 로장발롱의 글이 번역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