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 되는가 -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비판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영선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세계의 현대 철학에서 가장 큰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인 슬라보예 지젝은 동유럽 출신의 학자답게 라캉과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로 명성을 얻은 좌파 지식인이자 최근에 이르러서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더불어 크게 이름을 알리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그의 학문적 경향에 대한 비판은 노엄 촘스키와 에릭 홉스봄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데요. 하지만 신자유주의(혹은 자유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지식인의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그의 가치는 충분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열렬하지 않다는 점에서 저는 약간의 우려를 갖고 있는데요. 일단 이 부분은 분량 관계상 다른 책을 통해 논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더불어 이 책과 관련된 약간의 언급을 드리고 싶은데요. 아마도 출판사와 지젝간의 논의가 완료되어 출간된 글이겠지만, 각기 다른 지면에 실린 짧은 글들을 한데 모아 국내에서 기획된 출판물이라 여겨집니다. 2016년에 출판된 책이 현재는 절판된 상태인데요. 어떤 연유가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일단 이 책의 초입에는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우선 약간의 논외이지만, 최근의 이택광 교수의 책 ‘빨간 잉크’가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설명한 약간의 농담인 ‘파란 잉크’와 관련된 것임이 여기에서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여러 논란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 지젝의 가치에 대해 ‘현실을 바라보고 비판하는 철학자가 현실에서는 매우 드물다’는 식의 언급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사고 체계과 철학 방법론에 몰두하는 나머지 수많은 원전을 탐독하고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많지만, 지젝과 같은 경우는 분명 보기 힘든 사례이기도 합니다. 다만 한가지 이택광 교수가 서문에 담은 “이 모든 파국을 만들어낸 것이 자유주의의 탈정치성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이라는 부분을 고치고 싶군요. “자유주의의 탈정치성의 문제가 아니라 아예 정치성을 강제로 퇴출시킨 것”이라고요.

1장은 자유 민주주의적 담론을 믿고 있는 학자들이 하이데거의 나치 부역과 관련해 ‘학계의 퇴출’을 목적으로 벌이고 있는 비판에 대해 지젝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모든 철학과 논저들을 끊임없이 연구해서 이 유명한 철학자가 왜 나치와 같은 파시즘에 전도되었는가를 찾아봐야하고 단순히 퇴출에 끝나는 것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나치 지지는 그의 사상이 직접적인 핵심이나 내적 진실이 아니라 일종의 증상, 그의 사상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는 부수적 현상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봐도, 아니 아예 그가 여기서 주장하는대로 ‘탈맥락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사상’과 ‘하이데거의 정치적 선택’을 서로 분리시켜야 되는지에 대해 엄밀히 인정하기는 어렵고 사실상 저 문장은 하이데거 자신의 자기모순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카를 슈미트가 수많은 좌파에게 영감을 끼친 것과 마찬가지로 하이데거 역시 그러한데 영미 철학계가 한동안 프랑스 철학을 나치즘의 고리를 의심스런 눈빛으로 지켜봐왔던 것과는 다른 이 두 사람이 앞선 진보 좌파들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한데 이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참으로 복잡한 심정입니다.

2장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주제어를 달고 있습니다만 좀 더 엄밀히 평가하면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강박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부정적 파급 효과’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은 이것의 실례로 남녀간의 섹스 동의서를 산만한 대화체를 통해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는데요. 미국에서 혼전계약서를 작성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이 ‘정치적 올바름’은 보수주의자들에게도 크게 환영받고 있는데요. 그 연유에는 복잡한 사정이 있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지젝이 설명하고 있는 이 부분도 크게 보면 그가 줄곧 비판하고 있는 자유주의적 논점이라 여겨질만 합니다.

3장은 오늘날 유럽에 유입되고 있는 난민들과 프랑스와 같은 경우와 같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과거 이슬람 이주민 등에 관련된 주제입니다. 지젝은 이것과 관련해서 전지구적 경제화에 원인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현상과 관련된 흥미로운 그의 평가, “가장 위선적인 자들은 국경 개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심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입으로는 공동체주의에 입각해 이웃과 공동의 목표를 달고 사는 인간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위선을 보여주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또한 거의 노예 상태와 다름없는 노동자들에 대한 언급도 나오는데요. “2013년 12월 1일, 피렌체 중심부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 프라토의 산업단지에 있는 중국인 소유 의류 공장이 불에 타 적어도 일곱 사람이 죽었다. 그들은 판지로 급조한 기숙사에 갇혀 있던 노동자들이었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글의 다른 주제에서 과연 계급 차이와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민주주의가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통렬한 현실 단면이라 여겨집니다. 과거 베스트팔렌 조약에 입각해 확장된 국민국가주의적 가치관에서는 자신과 동일한 국적을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 대한 공민권과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합니다만 앞선 노예 상태에서 인간 이하의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전세계에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4장은 현재 중국의 자본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겉모습으로 삼아 오늘날 민주주의의 대한 지젝 자신의 해석과 평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적절하고 심지어 어리석기까지 한 새로운 급진적 정치운동의 이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것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주장이 들어가 있는데요. 이를 간략히 풀어보면 오늘날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지젝의 평가로 파악되기도 합니다. 간혹 사회주의권 몰락에 대해 감정적인 격정을 토로하기도 하는 지젝에게는 이 사회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 운동이 뭔가 불결하게 다가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감안해도 크게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사실상 이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적절한 대안들 가운데 한 가지는 이 사회 민주주의라는 많은 이들의 진단을 지젝 그도 분명 잘 알고 있겠죠. 이것의 추측과 관련해서는 지젝 역시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맞서는 일과 진정한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은 자본주의적 뿌리 상실이라는 영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이 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이 부분은 실현불가능한 암시적 메타포라 불려도 무방하지만 저는 자본주의 자체를 통째로 들어내기 보다는 좀 더 민주주의를 확대해 개선시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죠.

5장과 6장은 그리스의 위환 위기에 따른 유럽 통합 체제의 불협화음과 더 나아가서는 ‘그렉시트의 가능성’까지 논하고 있는데요. 이미 영국에 의한 브렉시트가 강행된 마당에 지젝이 말하는대로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길 원하지 질질 끌려가며 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길 원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렇게 까지 된 모든 요인을 그리스 정부에 돌릴 것이 아니라 결국 중요한 것은 전지구적 자본주의화에 따른 금융의 불안정성이 주된 원인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맞이한 1997년의 IMF 구제 금융 시대 당시 우리 국민들을 이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했는데, 확실히 우리들은 고통을 받는데 익숙한 민족인가 봅니다. 몇년간의 그리스의 경제적 불안 상황이 다수의 그리스 국민의 고통이 되고 있는데 분명 그러한 삶의 파편화에 대해서는 동정과 아쉬움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독일 총리 메르켈의 자비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일지도 모르겠군요.

글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젝은 얼핏 보기에는 전지구적 상황에 정밀한 관점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상과 진단에 대해 다소간의 한계적 인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서문의 이택광 교수가 언급한대로 일개 철학자의 모습으로서 ‘결여의 상태’ 혹은 자기이해의 환원론적 인식론을 보이고 있는 것이 흡사 ‘지젝스러운’일이라 하더라도 그가 보이고 있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적 담론들은 정말 귀중한 것이기도 합니다. 저로서도 그가 자기 사유체계를 더 고도화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이렇게 계속 세계의 문제와 인간 문제를 다루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줬으면 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 곁에 없는 지금 더욱 그의 필요성이 긴밀해지는 요즘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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