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민주주의 - 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콜린 크라우치 지음, 이한 옮김 / 미지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영국 워릭 대학의 경영대학원 정치학과 교수이자 현존하는 사회학자들 중에 저명한 학자로 특히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공공 정책 및 반대의 무분별한 민영화와 오늘날 민주주의에서 평등주의의 무능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연구한 콜린 크라우치의 유명한 논저 ‘포스트 민주주의’를 읽었습니다. 이 책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출간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학계에 엄청난 이슈화를 불러일으켰고, 특히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엘리트들과 기업인들의 불만을 초래한 바가 있습니다. 사실 작고한 정치학자 찰스 틸리 교수도 언급한 바대로 우리가 현재 직면한 민주주의의 위기에는 경제적인 불평등 문제와 시민의 파편화가 군불을 지피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훼손시키는 시장의 배타적인 이해관계가 기존의 정치적 공감대와 토대를 뒤엎어 버리는 결과에 기인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익히 인지하고 계시듯이 이러한 논저들의 끊임없는 출판은 얼마나 이 시기가 전세계적으로 문제인지 가늠하게 해주는 지표일 겁니다. 책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 글의 원제는 Post Democracy 이며, 지난 2000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8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우선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자인 콜린 크라우치가 밝히는 ‘포스트 민주주의’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글에 의하면 이 ‘포스트’라는 단어는 어떠한 결여된 속성이라는 뜻으로 즉, 결여된 민주주의, 결핍된 민주주의, 원래와 사뭇 다른 민주주의 등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점과 관련해서 저자는 이 포스트 민주주의가 ‘비민주주의’와는 다른 개념으로 분리하고 있습니다. 만약 비민주주의에 관련해 논의를 시작한 거였으면 아예 제목을 비민주주의라고 정했을 거라고 언급하고 있더군요. “오늘날 이 포스트 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라고 저자는 단언하고 포스트 민주주의 자체가 전통적 민주주의와는 기본적인 속성이 완전히 뒤바뀌거나 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일인 일투표에 의한 대의제 민주주의와 정당주의 및 여론 등의 민주 정치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가면서 대중에 의한 권력이 아니라 엘리트 기성 정치에 대한 심각한 의존, 더욱 노골화되고 있는 불평등 문제가 야기하는 ‘민주주의의 단순한 슬로건화’가 이 포스트 민주주의를 설명하는 기본 요체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총 6장의 구분으로 1980년대의 유럽 즉,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배경 삼아 논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짚고 가야하는 부분은 서유럽과 동유럽의 정치사회적 배경의 차이가 있으므로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주도하에 본디 자유 진영의 민주주의의 체제로 시작한 서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를 기본 매커니즘으로 삼은 점이 자크 랑시에르나 어제 서평을 썼던 샹탈 무페 등과 유사한 전개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크라우치의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학문적 연구에 따른 일관된 논점들이 매우 설득적인 것에 놀랐고,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이보다 명료하게 구분하고 해석한 글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본인도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학자의 글쓰기를 해왔던 그에게 이처럼 관심이 높아졌던 것에 매우 놀라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 각계의 반응을 이 책이 이끈 것은 그만큼 이 논저가 특별하기 때문일 겁니다.

경제적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시작된 시기부터 우리의 정치는 “정치 계급과 경제 계급이 결합된 엘리트 집단의 형성”을 생성시켰고, 여기에는 “기업가와 기업 경영진이 정치가와 공무원에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획득하는 것” 등의 정치경제적인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서 크라우치의 무서운 통찰력은 “기업 엘리트의 부흥은 창조적인 민주주의 활력의 쇠락과 나란히 한다”는 인식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애덤 스미스도 놀랄 만한 시장의 타락’이라는 소제목으로도 나타는데요. 5장은 이러한 현실 전개와 함께 무분별한 민영화가 대기업들의 배를 불리고, 복지와 분배라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평등 가치에 치명타가 되어 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시장 안과 바깥을 구분할 필요 조차 없이 이 안과 밖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행위들을 자본주의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게 함으로써 “시장이 절대적 원리, 정언 명령이 결코 될 수 없음에도” 모든 시민의 삶을 규정하는 절대적 원리로 자리 매김해 왔습니다. 글이 이렇게 규명되니 저자와 제가 무슨 반자본주의자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는데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그 속성상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영역을 무차별적으로 확대하는 수레바퀴의 움직임처럼 신자유주의의 시장 논리가 얼마나 우리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훼손해 왔는지 저자를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현실적 상황은 유럽의 중도 좌파의 지리멸렬과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동일 계열의 정치인들이 정치 사회적인 어떤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했기 때문일겁니다. 또한 극우가 제일 밑의 계층의 흥미를 돋우면서 성장해 왔던 것처럼 반대로 앞선 두 정치 세력의 정치적 무능이 이러한 가속화를 더 확실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중도 좌파가 패배함으로써 이득을 봤다”는 짧은 한줄은 이 모든걸 설명할 만합니다. 또한 “자신과 자녀들이 복종적인 자세로 기업 엘리트들이 확립해 놓은 경력의 사닥다리를 오르는 일 외에는 어떠한 사회 개선에도 관심이 없도록 부추김을 받았다”는 저자의 냉정한 평가는 이러한 매커니즘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교묘했는지, 그리고 민주 사회에서 시민이 시민 스스로의 감시와 비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한나 아렌트의 말대로 “삶은 있으나 삶의 알맹이가 없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자기 고백일 것입니다.

결론에 이르러 크라우치는 대안으로 “민주주의 사회와 시민들에게 적절하고 강건한 접근법은 바로 정당이 시민들에게 평등주의적인 정책을 쓸 때에는 지지를 철회하여 처벌을 가하는 것임을 평등주의자들은 깨달아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아직은 우리의 정당 정치가 이런 측면에서 필요하다고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세계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세계화는 어떤 것이든 무조건 반대하는 운동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화’ 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표현하며,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인류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또한 정체성 정치를 버리고서는 포퓰리즘 정치에 대항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도 깊이 새겨 들을 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샹탈 무페의 글로 이렇게 인연이 되어 크라우치의 책을 손에 잡게 되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올해 읽은 독서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글이 될 것 같은 에감이 들었습니다. 이미 제가 구입한 이 책이 3쇄를 찍어 요즘같은 출판계의 불황에 적잖이 판매가 되고 있다는 점은 이상하게 뜻모를 안심의 기운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책을 통해 저는 국내에 번역되었지만 현재 절판된 그의 또다른 글인 ‘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를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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