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샹탈 무페 지음, 이승원 옮김 / 문학세계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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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으로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교수 및 민주주의 연구소 소장,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에 대한 저명한 이론가로서, 남편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공저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 대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킴과 동시에 기존의 민주주의적 기초인 자유와 평등을 개조해 시민운동에 포함된 정동적 사회운동에 따른 급진적 민주주의의 개념을 만든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샹탈 무페의 최근 논저,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를 일독했습니다. 그녀에 대한 소개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뛰어난 명저로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국내에는 그녀의 다른 논저 ‘정치적인 것의 귀환’ 또한 많은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민주주의의 역설’이라는 글을 읽고 싶었는데요. 제가 때를 놓쳐 지금은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은 ‘For A Left Populism’ 이라는 원제로 2018년에 출간된 것을 문학세계사에서 최근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또한 ‘새로운 헤게모니 구성을 위한 샹탈 무페의 제안’이라는 명확한 부제를 달고 있는데요. 번역도 매우 만족스러워, 개인적으로는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책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요즘 부정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포퓰리즘의 의미 때문에 제목에 대한 독자들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요. 즉, 책의 제목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요구에 대한 포퓰리즘적 열망’과 신자유주의 시기에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한 진보와 좌파에 대한 대안이 되는 사회 헤게모니적 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파 포퓰리즘이 민주적 열망과 요구를 가진 대중들이 외국인 혐오로 접합되는 것처럼 이 ‘민주주의적 요구’ 좌파가 적극적으로 수용하라는 뜻의 의미입니다. 논의의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무페가 자신의 유명한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밝혔던 급진적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안점으로 놓고 이것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이론적인 논리의 확대를 이 책 전반을 통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칼 슈미트와 같은 이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시에 수용될 수 없는 서로 경쟁적인 가치로서 이들의 공존이 사회에서 거의 불확실하다고 보는 의견을 언급하고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서 대중에 의한 권력과 평등주의를 끊임없이 훼손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를 일종의 ‘포스트 민주주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포스트 민주주의란 개념은 정치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의 동명의 논저에서 인용된 것으로 좀더 면밀히 풀어서 해석하면 대의제 민주주의와 수많은 이익단체들, 금융 자본주의하에서 금융 권력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과두제 형태로 사회 기득권 체제가 공고화되어 우리의 민주주의의 본질이 악화되어 왔다는 이론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무페는 “평등과 대중 권력이라는 종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2장에서 마거릿 대처의 ‘대안은 없다’에 따른 신자유주의의 속성에 대해서 그녀는 “신자유주의의 경우 우리는 자유주의의 독특한 형태와 금융자본주의를 접합시키는 사회 구성체를 다루고 있다”고 해석하고 2차대전 전후 케인즈식 사회경제적 규약이 강제로 제거되어 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개인의 자유, 특히 경제적 자유에 대한 보장을 강화시킴으로서 이런 헤게모니적 변화가 노동자들을 비롯한 대중 집단의 사회 안전 보장 철폐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정치 원리와 사회경제적 실천’ 조화를 이루어 개인의 평등과 사회 구성원의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지만 이것이 전반적으로 ‘전회’되었다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같은 경우는 루즈벨트의 정책과 민주당과 공화당의 민주적 합의에 대한 전통적인 공통의 공감대가 뒤이어 출현한 공화당 정권에 의해 토대가 강제로 제거된 것과 유사한 사례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레이건과 대처의 신자유주의적 쌍두마차가 달리 나온것이 아닐겁니다.

이러한 대처주의의 교훈은 앞서 말한대로 신자유주의가 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크게 훼손했고, 이런 결과에 대한 인식론적 해결책으로 “자유주의적 담론이 가진 보편주의에 대한 경향성을 전복시키기 위해서는 대중을 구성하고 평등주의적 실천을 수호하는 민주주의적 논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더불어 이 점은 3장의 이 책의 중요한 논점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는데요. 그녀는 이 과정에서 ‘반자본주의적 차원이 포함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러한 반자본주의적 투쟁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파악될 것으로 단언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반자본주의적 투쟁에 대해서 자본주의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사회 전체적으로 기울이면서 ‘시민의 공감대화’가 필연적으로 이뤄져야 동시에 민주주의 가치가 더욱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모순의 개선에 돌입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나 고민해봤습니다.

결론에서도 보이듯이, 이 책은 유럽의 현실과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실패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스스로 대의 민주제의 확고한 지지자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만 ‘대표성’과 관련하여 대중과 이 대표성에 대한 관계를 인지하고 있는 것은 논리의 역설이라기 보다는 현실적 인식에 따른 결과라고도 보여집니다. 또한 대중들의 좀 더 나은 사회가치를 위한 정동적 움직임데 대해서도 강조한 것은 이것들 자체가 급진적 민주주의와도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먼제 실현되어야만 하는 전제성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대로 ‘좌파 포퓰리즘 전략은 극좌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 점도 독자들이 그녀의 주장을 오독하지 말아야 하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녀가 “포퓰리즘 계기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기가 또한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와 같은 현실 인식이 나오게 된 이유가 아닌가 고민해봅니다.

끝으로 글 서두에 포퓰리즘이 따로 정치 레짐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미국과 남미, 유럽에 나타나고 있는 이 포퓰리즘적 정치 현상을 계속 끊임없이 비판적 연구와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이론적 노력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개인적으로는 판단하고 있는데요. 그녀는 포퓰리즘에 대한 무수한 소모적 논쟁 때문인지 너무나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는 투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앞뒤 맥락을 찬찬히 살펴봐도 이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저는 그녀와는 달리 이 포퓰리즘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아주 중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시민의 재교육과 정치 환기, 정치 참여가 어떠한 양비론이나 정치적 허무주의에 가로 막혀 좌절되지 않아야만 이 포퓰리즘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 초입인 12페이지에 오탈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는데, 번역의 질을 감안한다면 이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고 느껴집니다. 편집의 어려움은 충분히 이해하나 마무리가 제대로 안되어 출판된 것은 왠지 아쉽게 느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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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19-02-16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동일한 시기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모 친구님께도 즐거운 독서가 되셨기를 기대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