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란 무엇인가
브라이언 타마나하 지음 / 박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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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세인트루이스의 워싱턴 대학 로스쿨 교수로 재직 하고 있는 브라이언 타마나하의 ‘법치주의란 무엇인가’를 접했습니다. 원제는 On The Rule of Law로서 직역하자면 법의 지배(론) 정도가 되겠습니다. 국내에는 박영사가 2014년 번역 출간했는데요. 번역은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헌환 교수가 맡았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법치주의’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아주 기본적이고 태생적인 이론일텐데요. 이 책의 저자인 타마나하 교수는 이런 법치주의에 대해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취지로 “내 아버지 정도의 지적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는데요. 책을 완독하고 드는 생각은 저자의 부친의 지적 수준이 보통 일반인의 수준은 아닐 거란 판단이 들더군요. 저자가 친절하게 독자들의 배경지식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해놨지만, 기본적으로 여기에 논의되는 사상가들의 기초적인 이론과 배경지식은 갖고 있어야 좀 더 수월하게 읽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인류가 고안한 법률의 기원은 꽤 오래되었고 고전적인데요. 그리스 시기에 각각의 시민이 추첨을 통해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마찬가지로 그것의 토대인 법이 나타났습니다. 로마시대를 거쳐 중세의 주권이 각 왕정에 있다는 절대왕정의 시기까지 역사적 흐름으로 법의 발전을 그려내고 있는데요. 이후 14세기 르네상스와 16세기 종교 개혁, 18세기 계몽주의 운동을 거치면서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법과 법의 사상에 근접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시작된 거대한 자유주의의 시기에 이들을 중심으로 법치에 대한 이론이 적립되고 고도화되면서 이후 프랑스 혁명의 시민 계급의 등장까지 법의 의한 지배가 명문화되고 실현되는 시기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유주의 시대의 계몽주의적 사상가들을 인용하며 그 시기에 널리 기초로 인식된 법의 주의을 설명 하고 있습니다. 로크와 몽테스키외로 대표되는 법의 계몽주의에 대해 논하고 이후 미국 독립 혁명에 이르러 확립된 법의 의한 지배에 폭넓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요. 이처럼 이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법의 지배에 관하여 특히 몽테스키외는 “그들의 권력을 제한하는 수단으로, 재판관 (및 배심원)이 일정한 임기 동안 재임하도록 인민으로부터 선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시에 법적 자유보다도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고, 동시대의 영국의 경우에는 ‘일종의 관습(법)이 법관에 의한 이성의 적용을 통해 법적 원칙을 도출해내는 것”으로 자유주의적 계몽주의가 확립된 시기의 법에 의한 지배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의 목적이 컸다고 저는 이 글을 통해 이해했습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적당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동시에 성장한 의식과 이성의 면밀한 이해가 법이 개인들의 자유 증진을 위한 목적으로 인식되었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뒷받침 하기 위한 많은 사상가들의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후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던 냉전의 시기에 하이에크는 “분배적 정의가 본질적으로 법의 지배와 양립할 수 없다”는 의식을 강조했고 법에 있어서 자유의 본질과 약간의 반대되는 개념인 정치적 평등과 기회적 균등에 이념적 대립이 더해져 그 시기의 유럽은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측면에서 ‘사회복지적 국가론’에 대한 토대가 지속되었고, 미국에서조차 이러한 사회 복지에 대한 기본 개념이 결국에는 미흡하게 나마 불씨를 이어왔는데 이러한 시대 변화에 법이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인 것이고 모두를 수렴하고 이해시키기에는 원칙상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이예크는 이런 법의 변화속에 “보통법은 개별 사건을 다루는 법관의 판결 축적”에 구축되고 그가 애도했던 사회복지국가가 어김없이 입법부의 주도로 만들어졌다고 평가하는데요. 민주주의 국가들에게서 간혹 대중 영합주의적 독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애초에 하이예크와 같은 사상가들은 어느 정도 엘리트 들에 의한 통치를 제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사법제도가 저자의 말대로 ‘엘리트, 백인, 50~60대 남성 등으로 사회경제적 배경과 같은 요소의 배제를 완전히 기대할 수 없다” 평가한 것처럼, 현대 시기에 법의 통치, 법에 의한 지배가 법조인 들 특히 법관, 변호사 등의 독립성이 그들 개인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편입됨으로써 발생하는 정당성의 훼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3권 분립에서, 입법과 사법, 행정이 각각 독립적으로 어느 기관의 오판을 성공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는데 현실적으로 행정과 입법은 대체로 원칙적이라 할지라도 선출된 권력이 되어가고 있지만 많은 국가에서 사법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도의 개선이나 여론의 수렴으로 명백하게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법부도 특정 대학 출신, 남성 위주, 그리고 많은 법조인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초기 신념에서 스스로가 이미 사회적 약자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법조인 자체가 사회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데요. 이것의 여파는 아주 명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된 사회 구조적 조건에서 초기 법이 전통적인 개인의 자유 보장을 위해 존재했다면, 오늘날은 하이예크가 자유에 반한다는 이유로 다소 부정적으로 여겼던 ‘여러 평등’과 관련된 부분의 노력이 요청되고 있는데요. 이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요구도 분명 있으며, 저자가 법의 합법성과 법의 지배를 명백히 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상으로 인한 사회의 변화와 그것을 바라는 시민의 요구에도 응당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치가 이론적 구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현실적 상황을 면밀히 고찰하는 것도 필요하며 결국에는 이러한 법의 역할이 개개인들의 삶의 향상성을 위한 역할이 분명 있음을 모두가 깨달아야 하겠죠. 저자의 말대로 (강화된) 법의 지배가 권위주의적 통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고 현재 그것을 증명하는 국가들이 여럿 있습니다. 오로지 법은 합법성을 갖고 법의 통치가 소수의 엘리트 계층에 의한 지배로 오도되지 않도록 많은 시민들과 여론이 합리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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