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시선 440
손택수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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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과 밀턴 휴메이슨은 ‘허블-르메트레 법칙’을 발표한다. 이 법칙은 ‘우주로부터 오는 빛의 적색편이는 거리에 비례한다’라는 법칙으로, 우주팽창론을 지지하는 첫 증거로서 그 발견의 의의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우주는 점점 팽창하면서, 은하 간의 거리는 서로 멀어지고 있고 그에 따라 은하의 빛도 점점 파장이 길어지면서 붉은 빛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멀어지는건 은하 간의 거리만이 아닌 듯하다. 순수했던 유년 시절, 구수한 냄새가 나고 시끄러웠던 재래시장, 자본에 의해서 오염되지 않은 자연, 티격태격 싸우다가도 금방 화해하고 같이 놀던 친구들... 한때 나에게 모두 영원할 것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손택수의 시집은 이러한 ‘잃어버린 것들’ 그리고 ‘점점 나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그에게 “멀어진 것들”들은 다양하다. 호수공원이 된 경포호, 지금 연락 두절된 벗들부터 나무, 풀, 숲 그리고 너의 눈망울의 ‘있는 그대로’까지 모두 그에겐 멀어진 것들이다.

시집의 제목 ‘붉은 빛은 여전합니까’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오늘도 잃어버렸던 과거는 전보다 더 멀어졌기에 서로 더 멀어지고 있는 은하들처럼 더 붉게 보일 것이다. 내일이 되면 어제보다 더 멀어졌기에 더욱 붉게 빛이 날 것이다. 인간은 잃어버린 과거에 향수를 품고 그리워하지만, 과거는 끊임없이 멀어지고 낡아지고 그리고 점점 더 붉게 빛이 나고 있다.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과거를 그리워하는건 부질 없는 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과거는 오늘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었기에, 잊지 못하고 이미 멀어졌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손택수의 시들에서는 이러한 역설적이면서도, 본태적인 그리움들이 느껴졌다.

“붉은 빛은 여전합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붉은 빛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멀어졌으니 더 붉게 빛나겠고, 앞으로 점점 더 붉게 빛이 나겠죠.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되돌아보고 물어볼 것입니다. 붉은 빛은 여전한지...”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먼 곳이 있는 사람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 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을 먼 곳으로 있게 하는 사람에게로
먼 곳이 있어 아득해진 사람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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