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이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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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의 시간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 밖으로 나왔지. 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 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 불행은 물속으로 녹아드니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너는 천천히 다가와 벽돌을 쌓는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담고 벽은 금이 가겠지. 옛집에는 스스로 울 수 있는 흙이 숨겨져 있다고 너는 병든 내게 말했다. 진흙을 개어 우물터를 쌓던 밤이 있었다. 부드러운 한밤 깊은 곳으로 우리는 갔다. 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버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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