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시인선 118
박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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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어렵다.
예전에 TV에서 “기억”은 하나의 기술이라고 말하는걸 들은 적이 있다. 요령만 익히면 원주율이든 사람이름이든 쉽게 암기할 수 있다고 한다. “기억”이 기술이라면 “망각”도 하나의 기술인걸까? “망각”도 요령만 익히면 어떤 것이든 쉽게 잊을 수 있는걸까?

사라진다는 것은 문을 열고 나가
문 뒤에 영원히 기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다지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너무 멀리 가버린 것들의 차가워진 심장

- <의자> 중 일부 -

홀수의 방

잊겠다는 말 너머는 환하다. 그 말은 화물열차를 타고 꽃나무도 한 그루 따라왔다. 꿈이었나봐. 흩어지는 기억들. 슬픈 단어들은 흩어진 방을 가진다. 너는. 나를. 그녀를. 누군가를. 사랑은 없고 사랑의 소재만 남은 방에서 너는 긴 팔을 뻗어 현관문에 걸린 전단지를 만진다. 잊겠다는 말은 벼랑 끝에 매달리는 손. 이미 그곳에 있었지만 도대체 그곳은 어디인가. 떠나면서 허공에 던져놓은 너의 단어들. 흩어져 있는 너의 단어들이 흰 배를 드러내놓고 날아가는 걸 본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등을 돌렸다. 이제 내 몸에서 돋아나는 그림자를 이해하기 위해 계절의 밤을 다 소비해야 한다.

(중략)

그 와중에 잊고 싶다는 말이 개미처럼 우왕좌왕한다. 그 와중에 미안과 무안(無顔)은 깊은 방을 만들고 있다. 나는 방을 잃고 현관문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는 너의 손목을 붙잡고 있다. 오로지 너였을 한 사람을 발굴하듯이. 그래서 발굴된 영혼이 다른 영혼을 찌를 듯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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