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문구점 아저씨 - 좋아하는 일들로만 먹고사는 지속 가능한 삶
유한빈(펜크래프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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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디지털화되고 동네 문구점은 대형 온라인몰이 대체한 21세기에 문구점 창업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한 명의 ‘문구 덕후’가 있었으니. ‘동백문구점’, 이름이나 위치만 보면 영락없는 초등학교 앞 문방구지만 각종 준비물이나 가위, 색종이, 줄넘기 등은 팔지 않는다는(복사나 스캔도 죄송하지만 안 된다는) 수상한 문구점 주인 아저씨(자칭)의 느리지만 유연한 삶의 이야기.

유한빈 작가는 매일같이 책을 읽고, 필사하고, 손글씨를 주제로 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며 온오프라인 글씨 교정 강의도 진행한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서 ‘펜크래프트’라는 활동명으로 선보인 정갈하고 아름다운 손글씨로 주목을 받으며 관련 도서도 집필한 바 있다. 이 같은 활자 덕질은 문구 덕질과 나란히 발걸음을 같이해왔다.

십여 년간 전 세계 노트를 섭렵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제품을 찾지 못해 ‘노트 유목민’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는 마침내 좋아하는 필기구를 직접 만들어, 마니아층에게 판매하고, 오롯이 자신의 취향만으로 완성한 공간을 꾸려가는 삶으로 들어섰다. 채 열 평도 되지 않는 그의 동백문구점은 양장 노트, 다이어리, 만년필, 잉크 등 직접 제작 및 엄선한 제품들로 가득하고, 아늑하다.

[알라딘 제공]

같은 시대에 부의 상징으로 통하던 펜이 있었으니……. 이름하야 ‘파이롯트 하이테크’ 되시겠다. 아마 다들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센세이션하고 엘레강스하며 럭셔리하고 뷰티풀한 펜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같은 회사에서 쥬스업이라는 볼펜(내가 생각하기에 하이테크의 완벽한 상위 호환 버전이다. 잉크 발색도 더 뛰어나고 색상도 다양하고 내구성도 좋고 노크식이라 쓰기도 간편하다. 그립부엔 고무가 덧대 있어 그립감도 좋다)이 나와서 그런지 대형 문구점에 가봐도 예전처럼 하이테크 앞에서 서성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p35~36

만년필은 물론 다른 취미

를 갖고 있는 분들도 공감할 거라고 생각한다. 입문용이라고 해서 입문했다가 점점 더 좋은 제품에 눈이 돌아가서 하나둘 모으다 보면 ‘아, 그냥 하이엔드 끝판왕 하나 사서 오래오래 잘 쓸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끝판왕을 산다고 해도 그걸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끝판왕 모델이 여러 개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철이 없었죠, 만년필에 빠져 몽블랑까지 사게 되다니. p51~52

이런 생활을 십 년 가까이 하니까 그냥 내가 만드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를 만들 때 몇 가지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사이즈는 A5 언저리일 것. 둘째, 표지와 책등에 장식을 할 것. 셋째, 줄 간격은 8mm일 것. 넷째, 줄이 연해서 글씨를 쓰고 나면 눈에 띄지 않을 것. 다섯째, 코팅되지 않은 종이일 것. 크게 이런 다섯 가지 조건으로 파주, 일산, 을지로를 돌며 인쇄소를 알아봤다. 인쇄소 사장님들은 ‘노트 그거 돈 되지도 않는데 왜 하려는지 모르겠다’면서 대놓고 거절했다. p88

이곳저곳을 봤지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와 돌아다니는데 임대 문의가 붙은 건물이 보였다. 그것도 망원동 동교 초등학교 바로 앞에.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앞인데 초등학생이 쓸 문구를 팔지 않고 오히려 다 큰 어른들이 쓸 문구를 파는 문구점이라…… 미스 매치인데?

p92

우선 가장 중요시한 부분은 펜에 넣었을 때 필기감이 좋아지느냐다. 전적으로 필기감을 우선시해 제작하다 보니 색 분리가 된다거나 테가 뜬다거나 펄이 있다거나 하는 경우는 가장 먼저 배제했다. 이런 경우 필기감이 필연적으로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구조기 때문이다.

글씨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만들기 때문에 가독성을 중요시해 발색이 대체로 선명한 편이다. 선명한 잉크와 그렇지 않은 잉크의 비율을 2 대 1 정도로 맞춰서 제작하고 있다. 당연히 잉크 색도 기존에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유니크함과 오리지널리티는 소규모 개인 문구점의 큰 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116

새로운 잉크병과 라벨 스티커까지 준비됐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제작을 해야 했다. 저녁 일곱 시 반 퇴근 후 열 시까지 잉크를 만들면 50~100병 정도를 만든다. 인기있는 검빨파 색상은 100병씩, 비교적 인기가 덜한 잉크는 50병씩 만든다.은근히 정교한 작업이라 집중력을 많이 요한다.

늦은 밤, 에너지가 고갈되어 택시를 타고 집에 가고 싶은 유혹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아껴야 하기에 터벅터벅 지친 몸을 이끌고 십오 분을 걸어 지하철역으로 걸어간다. 사십 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환승한 뒤 삼송역에서 내려 십오 분을 걸어 집으로 향한다. 아침 열 시에 집을 떠났는데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니 밤 열한 시 반이다. 이런 삶이 반복되었다. p121~122

문구점이 학교 앞에 있다 보니 동교 초등학교 학생들이 자주 기웃기웃거린다. 초등학교 앞에 있기는 이상한 비주얼인가 보다. 그런 미스 매치를 노렸으니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인가? 아이들끼리 놀다가 삼삼오오 모여 창 안을 들여다본다. 서로 눈치 보며 갈까 말까 이야기하다 결국 안 온다. 문구점에 오는 기자님들이나 손님들이 많이들 말한다. '여기 아이들도 많이 오겠어요.' 나는 아니라고 말씀드린다. 아이들도 쎄한 걸 느끼나 보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다가 문구점이라는 걸 보고 들어가자고 했다가 내부를 보고 뒷걸음질친다. 옆에 있는 한 아이가 ‘여기는 우리가 가면 안 되는 곳’이라며 친구를 말린다. 들어와도 되는데 안 들어오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다.

p165

이런 마인드로는 돈을 벌 수 없다는 조언을 주위에서 많이 하지만 돈을 크게 벌지 못해도 이런 삶이 즐겁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백 가지 중 백 가지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한 한 가지로 모든 것을 평가받으면 억울하지 않나. 그렇게 오늘도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쓴다. 끙차, 일어나자. 잉크 만들러 가야지. p183~184

                            

문구덕후였던 저자가 한 초등학교 앞에 이름도 심쿵한

동백문구점을 창업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앞이지만 초등학생은 오지 않고

복사나 스캔도 되지 않는

작지만 쥔장의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필기구를 파는 특별한 문구점...

표지와 책등에 장식을 한 A5 사이즈의 코팅되지 않은 종이의 노트

한 번 써 본 사람이 또 구입한다는 다이어리도 갖고 싶어진다.

스테들러 꿀벌 연필

지워지는 볼펜

이제는 국민볼펜

하이테크 대항마

최근에 구입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지워지는 프릭션 볼펜

필기할 일 별로 없는 요즘도 문구점에 가면

필기구 코너를 기웃거리는 내게

이 책은 묘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매일같이 책을 읽고 필사를 한다는 저자의 글을 읽다보니

오래 참고 있던 만년필 구매 욕심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블랙, 블루, 그린, 퍼플 등의 잉크를 채워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필압이 강해 만년필 촉이 상하고 종이가 일어나고

잉크를 교체하는 일을 귀찮아 하면서?!...^^;

결국 잘 되는 것을 포기 하게 된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려 놓으니 더 내려갈 곳이 있을까 싶어 마음이 편해진다.

아날로그를 좋아하고 불편한 것도 좋아하고

잘 안되면 마음이 편하다는 저자의 이야기들이

재취업을 고민하며 해도 안될꺼라는 불안과

내려놓지 못한 욕심으로 힘들었던 마음을 다독여 주는 듯 하다.

내게 혹은 친구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은 날

찾아가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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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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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별안간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한 소년의 여정을 좇는다. 유명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철이는 어느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정신적, 신체적 위기에 직면한다. 동시에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생생한 소속감을 느끼고 따뜻한 우정도 싹틔운다. 철이는 그들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작별인사』의 인물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명제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은 김영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메시지와 논리적 거울상을 이룬다. ‘나는 내가 알던 내가 맞는가’를 질문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은 김영하 소설에서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기억, 정체성, 죽음이라는 김영하의  주제가 『작별인사』에서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롭게 직조된다. 달라진 것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문제로 더 깊이 경사되었다는 것이다.  원고에서 핵심 주제였던 정체성의 문제는 개작을 거치며 비중이 현저히 줄었다. 대신 태어남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변증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p9

“그건 마치 커피에 크림을 떨어뜨린 후에 정확히 어떤 모양으로 퍼져갈지를 예측하는 것과 비슷해. 예측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어. 노을 같은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는 그냥 감상하면 그만이야. 뭐하러 예측을 하겠어? 노을이 우릴 죽이는 것도 아닌데.”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네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미래를 알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미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p33

우리 둘은 부부 같기도 했고, 때로 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밤이면 시베리아의 광활한 밤하늘을 은하수가 가로질렀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천자문』의 두번째 문장을 생각했다. ‘일월영측(日月盈?)하고 진수열장(辰宿列張)이라.’ 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열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나는 고대의 중국인들과 같은 하늘을 보며 그들이 적은 문장을 그대로 읊곤 했다. p285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그래, 그 부분.”

나는 앤의 대사를 다시 읽어주었다. 선이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그 지하실에 동화책이 몇 권 있었다고 그랬잖아.”

“그래, 네가 『빨간 머리 앤』 얘기했던 거 기억나.”

“방금 든 생각인데, 그때도 나는 좀 전에 네가 읽어준 부분을 참 좋아했어. 그후로 나도 앤처럼 늘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수는 없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말이야. 그 덕분에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라. 다시 들으니 참 좋네…” p289

나는 그대로 거기 남았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내 몸 여기저기에도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끔은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거기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어느 날, 나는 오두막의 포치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동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문득 이 넓은 대지에 인간을 닮은 존재는 이제 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p292

'살인자의 기억법'이후

9년만의 장편소설 '작별인사'

김영하작가의 신간,

그것도 제목이 '작별인사'라는 이유로 출간소식이 들리자 바로 데려왔는데

뜻밖의 만남이었던 미래소년(?) 철이를 쫓아 가는길은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ㅠ.ㅠ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가 떠오르기도 했던 이번 소설은

한 IT기업 연구원인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천자문을 공부하는 등 조금도 의심없이 인간이라 믿고 살아온 철이가

납치된채 수용소로 끌려가 위기를 만나며 혼돈속에서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을 감행하는 모습과 그가 만난 민이, 선이, 달마 등과 나눈 대화들을 통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고민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는데

한동안 낯을 가리느라 책장 넘기기가 힘들다가

중반부를 지나면서야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의 삶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작별인사...

이제 겨우 낯을 익혔으니

그리 멀지 않은 날

조금은 여유있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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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숲속의 현자가 전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 토마스 산체스 그림, 박미경 옮김 / 다산초당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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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떠납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러자 스웨덴 전역에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수많은 스웨덴인들을 불안에서 끌어내어 평화와 고요로 이끌었던 그는 2018년 루게릭병에 진단받은 후에도 유쾌하고 따뜻한 지혜를 전하며 살아갔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는 20대에 눈부신 사회적 성공을 거뒀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숲속으로 17년간 수행을 떠났던 저자의 여정과 깨달음, 그리고 마지막을 담은 책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삶에 감동과 용기를 전해주었다.

<인터넷 알라딘제공>

 

 

 

 

저는 영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성장하고자 오랫동안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을 함께 나눌 기회가 참 많았다는 점에서 저는 진정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진 많은 기회가 삶을 더 순조롭게, 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바라건대 이 책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삶을 더 순조롭게,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으면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지혜 중 몇 가지는 제 삶의 중추였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죽을 날을 받아 든 지난 몇 년간은 더욱 그러했지요. 여기가 모든 것이 끝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시작하는 곳이 될 수도 있고요. p9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을 능력이 있습니다. 관심을 어디로 돌릴지 또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일에 얼마종안 관심을 기울일지 선택할 능력도 있지요. 여러분에게도 당연히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연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잠재된 능력을 무시하거나 아예 잃어버린다면, 우리 삶은 여태까지 몸에 깊이 밴 행동과 관점에 좌우됩니다. 모든 결정을 습관적으로 내리게 되지요. 이를테면 과거에 목줄이 묶여 끌려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는 같은 트랙을 계속해서 돌고 또 돌게 됩니다. 그런 삶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존엄도 품위도 없습니다. p36

우리는 누구나 순간의 지성을 끌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는 정교하게 연마된 자기만의 조용한 나침반이 있어요. 그러나 그 지혜는 요란스러운 자아와 달리 은은해서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자아가 던지는 질문과 요구는 그보다 몇 배나 시끄러워 지혜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따금 주파수를 바꾸는 것은 그래서 더 중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틈을 내어 멈추고 고요를 느끼는 겁니다. 정적은 순간을 찾는 것이지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요란한 소리에 쏠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삶이 막장 드라마가 되어버립니다. 갈등에 끌리고, 불안과 불행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항시 현실과 투쟁하게 되지요. p85~86

인간은 본래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어. 내가 다 알지는 못해’라는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확실하게 행복해질 방법은 흔치 않습니다. p134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맺는 온갖 관계 중에서 단 하나만이 진정으로 평생 이어집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연민과 온정으로 이루어진, 사소한 실수는 용서하고 또 털어버릴 수 있는 관계라면 어떨까요? 자기 자신을 다정하고 온화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제 단점에 대해 웃어버릴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거리낌 없이 보살핀다면 또 어떨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 전체가 반드시 좀 더 좋은 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 안의 고귀한 마음가짐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p223

우리가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사랑하는 이들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음을 머리로 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이해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더는 이만하면 됐다고 믿으며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모든 사람과 반드시 이별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확실하며 그 외의 나머지는 다 추측이고 가능성입니다. 그 진실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삶 자체에 다가갈 유일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다정하게, 다정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p287~288

숨을 거둘 날이 오면, 그날이 언제든 저더러 싸우라 하지 말아주세요. 오히려 제가 다 내려놓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도와주길 바랍니다. 제 곁을 지키며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세요.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때가 됐을 때 제가 늘 원했던 끝이 어떤 것인지 기억할 수 있도록 당신의 열린 손바닥을 보여주세요.

p305

인생에 아름다운 끝은 있다

2022년 스웨덴을 뒤흔든 어떤 삶과 죽음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년이면 앞자리 숫자가 바뀌어서인지

그 어느때보다 내 자신에 대해

또한 웰다잉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시간인 것 같다.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코너를 기웃거리다 제목에 끌려 데려온 책인데

성공가도를 달리다 불현듯 모든걸 내려놓고 수행에 길에 들어서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성공을 했다고

부를 이뤘다고

신앙심이 깊다고 해서

병이나 죽음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두려움과 불안감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 저자는

어떤 삶을 살든 자기 안의 평화를 발견하려면 우리에게 내재한 소중한 능력을 돌보고 키워나가야 한다고,

자기답게 살아가라고 충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환자 본인이 원하면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조력 존엄사'법이 처음 발의 되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연명치료거부와는 또 다른...

무겁게 내려앉은 회색빛 하늘만큼

마음도 무거운 우요일이 될 것 같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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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 - 온전한 ‘나’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기
전진소녀 이아진 지음 / 앤페이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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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아무튼 출근> 등의 방송을 통해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18살 목수로 알려진 전진소녀 이아진의 에세이. 사회적인 편견에 맞서고, 돈이나 명예보다 꿈과 행복을 찾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한국에서는 물속에 기름 같은 아이로 섞이지 못하던 저자는 14살에 호주로 유학을 떠난다. 호주에 가서도 동양인, 말도 못하는 애가 되어 한 번 더 처참하게 실패를 경험한다. 그러나 오기와 끈기로, 악착같은 노력으로,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자기 앞에 놓인 인생 퀘스트를 하나씩 깨며 교내 인싸로 성장한다.

저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어렵게 적응한 학교에서 졸업을 1년여 앞두고 자퇴를 결정한다. 모두에게 당연한 대학교 진학이 그에게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의미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인마다 원하는 것이 다른데 그저 사람들이 말하는 ‘정답’만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닫고, 방향을 틀어 자신의 길을 개척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는 공사현장에서 집 짓는 18살 소녀 목수로, 자신의 꿈을 향한 첫 챕터를 시작했다.

[알라딘 제공]

나에게 ‘처음’이라는 단어는 ‘실패’와 같은 의미였다. 처음은 항상 어긋났고, 그로 인해 좌절하고 절망했다. 그러나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처음’을 겪어냈다. 온몸으로 경험할수록 수많은 처음이, 실패로 끝나버린 일들이 결국 나의 꿈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실패를 넘어서겠다고 다짐했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p5

나를 믿고 당당해지는 법을 배우면서 굳이 함께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도서관에 가고, 혼자 수업을 들으며, 혼자 남겨져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혼자 하는 시간을 통해 나 자신과 시간을 보내며 스스로와 친해지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저 내가 나인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혼자 하는 방법, 혼자 해내는 경험은 나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그때 나에게는 그 시간이 꼭 필요했다는 것을 느낀다. 만약 그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면 여전히 주변을 채워줄 사람들을 찾느라 나를 돌볼 여유 없이 허울뿐인 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을 것이다. p48~49

언제나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찾아 헤맸다. 혼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두와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 살아있는 것 같았다. 운동선수라는 타이틀보다 몸을 움직이며 플레이하는 행위가 좋았고, 화가라는 타이틀보다 색을 활용해 결과물을 완성하는 과정이 좋았다. 항상 어떤 타이틀이 아니라 그 과정, 그 행동을 하는 순간이 행복했다. 그래서 내 꿈은 무언가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가 되거나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는 예술을 표현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되고 싶은 것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것은 셀수 없이 많았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는지 놀랄 정도로, 매 순간 새롭게 하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꿈을 꾸게 됐다. p81~82

‘나중’을 위한 투자, 지금 열심히 해야 다음이 있다는 말은 의미를 잃었다.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미래가 오기도 전에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만큼 당시의 나는 죽을 맛이었다. ‘미래를 위해서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데, 그렇게 쌓은 미래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꿈을 위해 달리는 과정은 가슴이 두근거려야 하는 게 아닌가. 지칠 때가 있더라도 좋아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거 아닌가. 그런데 왜 가슴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마음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걸까. p97

내가 만난 장애물」 중에서 하나는 편견이었다. ‘여자’ ‘어린애’를 제외하더라도 건설 현장에 대한 편견은 정말 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노가다’라는 표현이다. 방송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하다. 분명 나는 그 일을 사랑하고, 어떤 것보다 가치있는 예술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하찮은 육체노동. 어떤 사람은 불쌍하다며 다른 일을 알아보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고작 그런 일이나 하냐며 한심해했다. 그들의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고민했던 시간과 결심들이 의미가 없는 것 같았고 세상에 퇴짜를 맞는 기분도 들었다. 그럴수록 빌더는 자랑스러운 직업이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역할이라고 증명하고 싶었다. p145

내 앞에 아무리 좋은 것들이 있어도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신이 가지는 신념, 마음의 방향이다. 더불어 환경은 의지로 선택할 수 없지만 마음은 의지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마음이 달라지면 결국 환경도 바뀐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스스로를 믿지 못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라는 결론이 났다. 내가 받은 환경의 혜택, 좋은 부모님으로 인해 얻은 지혜와 경험을 인정하고 그렇게 완성된 지금의 나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그 이후를 내가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p242~243

유학, 자퇴, 공사 현장의 18살

집 짓는 소녀 목수가 되기까지

실패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꿈을 찾아 달린

〈전진소녀〉 이아진의 성장일기!

온전한 ‘나’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기

I AM

저자를 처음 만난 건 TV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서였다.

통상 숙련되고 건장한 남성들의 일터라고 생각되는 건축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왜소하고 어린 소녀 목수...

그리고 어느만큼의 시간이 흘러 이번엔 책 'I AM'을 통해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가장이 된 엄마는 밤낮없이 바쁘고

안식을 줄 집은 외로움을 느끼는 장소로 바뀐지 오래...

덕분에 집보다 친구들이 있는 학교가 더 좋았던 저자는

중학교에 입학하자

입시를 위해 공부에 매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게 된다.

엄마의 권유로 14살에 떠나게 된 호주 유학

언어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인싸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나또한, 저자의 나이쯤일때 유학을 떠날 기회가 있었다.

아주 가끔 '그때 유학을 떠났다면 내 인생은 조금 달라져 있을테지'하는

하나마나한 공상을 하곤 하는데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나혼자 말도 통하지 않는 캐나다로의 유학은

쉽게 결심하지 못할 듯 하다.

포기할 수 없는 영어공부

더 이상 숨지않고 친구들과 소통하며

어렵게 적응한 학교의 졸업을 앞두고 자퇴...

다시 한국에 돌아와 집짓는 목수가 되길 자청한 저자

힘들고 어려운 일임엔 분명하지만

주위의 편견을 깨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발한발 전진하는 저자의 모습에

마음속에서 진심을 담은 힘찬 응원을 보내게 된 책이었다.

                                                             

지금의 나는 나를 편견 없이 바라보겠다고 다짐했다.

나라는 작은 세상을 편견 없는 건강한 곳으로 만들어 후회나 원망보다는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

아직 나에게는 보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경험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무궁무진하다.

멈추지 않고, 나의 속도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배워갈 것이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꿈꾸기를 지속할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사람을 위한 예술가라는 꿈에 다가가 있을 거라 자신한다.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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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김보리 지음 / 푸른향기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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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살에 혼자 떠난 제주 한 달 떠돌이 생활에 저자는 ‘유배’라는 단어를 붙였다. 지구에 탄소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굴렁지고 오시록헌 길’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혼자 지내며 평소 해보고 싶었던 채식 위주의 생활을 했다. 김밥과 막걸리는 이번 여행의 시그니처 음식이 되었다.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 100만 원을 밑천으로 한 달을 버텼다. 걸으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았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여느 잘 나가는 오십들처럼, 하던 일의 절정기쯤에 닿아 욕심 놓고 훌훌 긴 여행에 오르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당당할까요. 오십이 되어 돌아보니, 해놓은 것도 없이 몸도 마음도 습관도 감정도 다 못난 사람이 되어버렸더라구요. 감성지수는 우량하나 생활지수는 불량하고, 대면지수는 명랑하나 내면지수는 황량하며, 인성지수는 선량하나 비관지수는 치사량인 사람. 원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면 새 마음으로 곧장 내 세상이 열릴 줄 알았는데, 웬걸요. 오래 길이 든 관계와 오래 들러붙은 비루한 일상은 쉬이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나를 꼭 쥐고 있는 그 무언가! 그건 바로, 나였어요. p5~6

사는 건 쪼이고 마음은 펴고 싶었습니다. 나태한 몸은 다그치고, 조급한 마음은 뉘이고 싶었습니다. 웅크리지 말 것. 불안하지 말 것. 습관 같은 슬픔을 떨치고, 끈질긴 죄책감과 적당히 협상할 것. 너무 느긋하지 말 것. 너무 편안하지 말 것. 몸이 바빠 마음이 게을러질 것. 몸이 고되 마음이 덜 아플 것. 그리하여 연민과 비하는 이제 남의 것, 아니 없는 것. 그런 시간을 살아보려 제주에 다녀왔습니다. p7

마을은 조용하고 풍경은 바람의 결을 따라 요동쳤다. 슴슴한 시래기김밥을 꼭꼭 씹으니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맛이 난다. 담백하고 소박한 맛이다. 유배의 맛이다. 막걸리와 노을도 구색이 잘 맞는다. 돈이 다가 아닌 여행이 이렇게 시작됐다. 잘 살아서 온게 아니라, 못 살아서 벌준다고, 말도 안되는 구실로 떠나온 여행. 좋은 습관 들이는 여행을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초저녁부터 졸리니 다행이다. 일찍 자는 습관이 든다면, 아침마다 일출을 봐야지. p34~35

바다를 보고 앉아 있자니 애쓴 걸음이 애쓴 삶 같았다. 삶의 어느 대목이 문득 억울하기도 했다. 억울함을 꺼내 보는 시간도 나쁘지 않다. 나의 모든 감정에 솔직해질 필요가 있고, 지금의 여행은 그에 유용하다. 가식은 필요 없다. 지금 나는, 백 퍼센트 혼자니까. p39

쉴만큼 쉬고 초저녁 버스를 타고 '달리책방'을 찾아갔다. '책방'이라는 말은 언제나 마음을 꿀렁이게 한다. 주인장의 책이 한 면 가득 꽂혀있다. 새 책보다 주인의 책이 더 좋다. 나도 언젠간 아버지의 책을 끌어안은 책방을 하고 싶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책을 아이들 나간 빈 방에 한 면 가득 쟁여놓고 있다. 아버지에 한참 못 미치는 책 사랑이지만, 부족한 사랑을 나는 여행에도 쏟고 있다며, 그것 또한 책만큼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 우기며, 즉은 밤 침대에 누워 괜한 시비를 아버지께 걸어본다. p40~41

나란히 손잡고 걷지는 않지만 걸음의 속도는 잘 맞는다.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한다. 재촉하지 않고 너무 처지지 않으려 적당히 간격을 맞춘다. 오래 산 부부의 산책은 딱 그 정도면 좋다. 손에 땀이 차도록 꼭 붙잡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 남편은 이따금 그때를 재현하고 싶어 한다. 언제부턴지 나는, 어색하다. 더께같이 앉은 감정의 앙금을 느끼면서 없는 척, 아닌 척할 수가 없다. 다시 좋은 사이가 된다 해도 지금처럼 걷고 싶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따금 나란히. p95

때로는 눈앞의 욕심을 놓지 못해 자신의 한계를 그만 넘어서게 되고, 그래서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물속에서 숨을 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물숨이다. 물숨은 욕심의 숨, 해녀들에겐 그래서 죽음을 의미한다. 눈앞에 아무리 큰 전복이 있어도, 행여 그것을 캐던 중이라도 숨의 한계에 다다르면 주저 없이 물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손안에 들어온 욕심을 놓기가 어찌 쉬울까. 그들이 목숨을 내어주면서까지 부렸다는 그 욕심이 우리네가 벌이는 욕심에 비해 너무 소박해서, 그런데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해서 무참하다. 공평하지 않다, 삶은, 결코. p99~100

돌아보면 유난이 심했다. 비가 온다고, 바람 분다고. 먼저 걱정하고, 오래 걱정하고. 상처는 길고, 혹시 까먹을까 도로 꺼내서 아픈가 안 아픈가 살피고, 그러다 보면 더 아프고. 예민함보다 더 짜잘하게 끓는 소심한 유난함에 지칠 때가 많았다. 어쩌면 이 여행도 유난함의 결과일지 모르겠다. 쏟아지는 비를 내쳐 맞다 보니, 이 큰비도 그리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p134

왜 그리 두근거리며 살았을까. 작은 것 하나 결정할 때마다, 실행할 때마다 심장이 격했다. 예정된 일이 있어도 불안했고, 없어도 불안했다. 잘 가다가도 잘못 든 길일까 봐, 잘 되는 일에도 곧 잘못될 것 같아 초초했다. 행여 주변을 챙기지 못할까 봐, 혹은 너무 챙기느라 내가 사라질까 봐 근심했다. 그러다 보면 콩콩콩, 심장이 빨라졌다. 느슨한 일상과 느린 걸음, 푸근한 자연은 걸음을 잡아주었다. 나하고만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생활은 안팎으로 여유를 주었다. 심장이 느려졌다.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영혼이 잘 따라 올 수 있게. 느리게 걸어야지. 조금 더 느리면서 열렬한 생활을 격하게 누려야겠다. p144~145

세상이 온통 슬펐다. 슬픈 일이 이리 많은데 다들 어찌 그리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슬픔에도 에너지가 든다. 슬픔도 습관이 된다. 남의 슬픔을 끌어다 슬퍼하고, 남을 위로하느라 나를 위로하지 못하고 살았던 날들. 많이 듣고 많이 위로하며 살았다. 이제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런 호의도, 그럴 에너지도. 여러 면에서 나는, 지쳤다. 꼭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오십의 나를 서운해하는 남편에게, 왜 예전 같지 않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이제 비로소 나의 말에 귀 기울이는 나에게. 더는, 남을 위한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요. 붉은오름의 가운데에, 나는 그런 말들을 묻고 왔다. 그런 말을 주고 위로를 받아 왔다. '그만하면 됐네, 이 사람아. 이제 관계도 좀, 쉬어가게, 본인에게 각별하게.' p182

                            

오십 살에 혼자 떠난 불량주부의 명랑제주 한 달 살이

덜 먹고, 잘 걷고, 살짝 취하는 자유로운 떠돌이

명랑하고 감미롭고, 때로 부끄럽고 슬픈 유배기

출간 당시부터 관심이 갔던 제목부터 내 취향이었던 책

'불량주부 명랑제주 유배기'

그동안 목부터 손가락에 이르는 통증으로 좋아하는 책조차

맘껏 읽지 못하는 상황이라 북카트에 담아 두고만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생겨 감사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내 나이 오십엔 방송통신대학교애 편입해 인문, 사회, 자연, 문화예술 등을 공부했었고

다가오는 육십살엔 나도 제주도 한 달 살기를 계획하고 있다.

어린나이도 아니고 편한 숙소와 맛있는 음식, 분위기 좋은 카페를 다녀봐야지 했던 마음이

더 늙기전에 김밥과 막걸리 대신 맥주를 챙겨

이렇게 뚜벅이로 다녀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작가의 여정을 쫓아가보기로...

 

내가 계획하는 제주여행엔 둘레길 걷기 외에도

책방과 미술관 둘러보기가 있다.

작가도 나도

인생의 여정 절반을 살아왔으니 시간이 주는 경험들로 공감하는 것에 더해

부모님과 남편, 이 여행의 시작이었던 친구의 이야기들은

마치 내 얘기인 듯 가슴이 시려왔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

비를 맞으며 걷는 제주도의 숲길은 어떤 느낌일까?!

노년에 대한 두려움, 상실감, 미움, 원망, 죄책감, 미안함, 슬픔...

그동안 날 힘들게 하던

이토록 많은 감정들을 다 쏟아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올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귀여운 일러스트의 산뜻한 표지를 처음 봤을땐 명랑한(?) 제주를 상상했는데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었던걸로...

벌같고 또 상같은 제주도 유배여행에

함께해서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날,

푸른하늘과 바람소리를 벗삼아 그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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