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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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별안간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한 소년의 여정을 좇는다. 유명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철이는 어느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정신적, 신체적 위기에 직면한다. 동시에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생생한 소속감을 느끼고 따뜻한 우정도 싹틔운다. 철이는 그들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작별인사』의 인물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명제를 두고 논쟁하는 장면은 김영하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메시지와 논리적 거울상을 이룬다. ‘나는 내가 알던 내가 맞는가’를 질문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은 김영하 소설에서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기억, 정체성, 죽음이라는 김영하의  주제가 『작별인사』에서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롭게 직조된다. 달라진 것은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반드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문제로 더 깊이 경사되었다는 것이다.  원고에서 핵심 주제였던 정체성의 문제는 개작을 거치며 비중이 현저히 줄었다. 대신 태어남과 죽음, 만남과 이별의 변증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p9

“그건 마치 커피에 크림을 떨어뜨린 후에 정확히 어떤 모양으로 퍼져갈지를 예측하는 것과 비슷해. 예측할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어. 노을 같은 무해하고 장엄한 카오스는 그냥 감상하면 그만이야. 뭐하러 예측을 하겠어? 노을이 우릴 죽이는 것도 아닌데.”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거네요.”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은 아니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럼 미래를 알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미래’라는 말이 뭘 의미하느냐에 달렸어.” p33

우리 둘은 부부 같기도 했고, 때로 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밤이면 시베리아의 광활한 밤하늘을 은하수가 가로질렀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천자문』의 두번째 문장을 생각했다. ‘일월영측(日月盈?)하고 진수열장(辰宿列張)이라.’ 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열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나는 고대의 중국인들과 같은 하늘을 보며 그들이 적은 문장을 그대로 읊곤 했다. p285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그래, 그 부분.”

나는 앤의 대사를 다시 읽어주었다. 선이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그 지하실에 동화책이 몇 권 있었다고 그랬잖아.”

“그래, 네가 『빨간 머리 앤』 얘기했던 거 기억나.”

“방금 든 생각인데, 그때도 나는 좀 전에 네가 읽어준 부분을 참 좋아했어. 그후로 나도 앤처럼 늘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수는 없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말이야. 그 덕분에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라. 다시 들으니 참 좋네…” p289

나는 그대로 거기 남았다. 그리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남아 지켜보았다. 오래지 않아 내 몸 여기저기에도 서서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끔은 바다에서 날아온 갈매기가 거기 앉아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곤 했다…어느 날, 나는 오두막의 포치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동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문득 이 넓은 대지에 인간을 닮은 존재는 이제 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p292

'살인자의 기억법'이후

9년만의 장편소설 '작별인사'

김영하작가의 신간,

그것도 제목이 '작별인사'라는 이유로 출간소식이 들리자 바로 데려왔는데

뜻밖의 만남이었던 미래소년(?) 철이를 쫓아 가는길은 예상외로 쉽지 않았다. ㅠ.ㅠ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가 떠오르기도 했던 이번 소설은

한 IT기업 연구원인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천자문을 공부하는 등 조금도 의심없이 인간이라 믿고 살아온 철이가

납치된채 수용소로 끌려가 위기를 만나며 혼돈속에서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위험을 감행하는 모습과 그가 만난 민이, 선이, 달마 등과 나눈 대화들을 통해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고민하는 모습들이 담겨 있었는데

한동안 낯을 가리느라 책장 넘기기가 힘들다가

중반부를 지나면서야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번의 삶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음을 맞아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작별인사...

이제 겨우 낯을 익혔으니

그리 멀지 않은 날

조금은 여유있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시 읽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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