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고 싶을 때 미술관에 갑니다 - 돌봄을 살아낸 우리에게 쉼이 되는 그림들
오희승 지음 / 그래도봄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와 주부, 환자라는 무거운 이름 뒤에서 마음이 무너지던 날마다 저자 오희승이 미술관을 찾아 그림과 마주하며 스스로를 지켜낸 다정한 회복의 기록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그려진 28점의 그림 앞에서 저자는 그림을 해설하거나 화가의 생애를 나열하는 대신 떠오른 자신의 감각과 기억을 써 내려간다. 뷔야르가 그린 실내 풍경에서 “마치 엄마가 늘 우리 집의 배경이었던 것처럼” 공간에 녹아든 여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흐가 그린 〈첫걸음〉을 아이가 처음 걸음을 뗐던 날의 기억과 나란히 놓는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버려졌다는 상처를 오래 안고 살았던 르동, 건강 문제로 한순간에 파혼을 통보받았던 셰르브베크, 우울증을 앓던 시기에 그림을 그렸던 모네까지 위대한 예술가들 역시 우리처럼 서툴고 아파하며 삶을 살아낸 한 사람이었음을 발견하며, 그 캔버스에서 지금의 나를 비추는 문장을 길어 올린다.

이 책에 담긴 메시지는 과거의 기억에서 건져 올린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저는 ○○엄마예요”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던 순간을 지나며 ‘나에게 소속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잘될 것 같다가도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날엔 물을 틀고 몸을 씻는 가장 사소한 의식으로 다시 하루를 일으켜 세운다. 역할의 무게에 허덕이고, 놓친 꿈을 아쉬워하고, 떠나간 이들을 그리워하는 보통의 양육자와 보호자들에게 이 책은 ‘미술관’이라는 작은 문 하나를 열어 보인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보호자’라는 이름 뒤에서 조금씩 닳아가던 ‘나’는 그 문턱을 넘는 순간,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자리를 찾게 된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제시 윌콕스 스미스의 일러스트들을 보며 나는 고고한 예술도 좋지만,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즐거워지는 그림의 효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돌격해서 보는 이의 감수성을 건드리는 장르를 어떻게 피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하고, 예쁘고, 따뜻해서 한번 시선을 주고 나면 그냥 반해버리게 되니 말이다. 기억 저편을 두드려서 바로 현재로 소환시키는 이야기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다. 이제 나는 왜 엄마가 그런 작품들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예술이 주는 위안은 거창한 의미나 비평적 인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p20

작품의 제목은 '목욕하는 여인들'이지만, 이 장면은 단순한 목욕 풍경이 아니다. 나체의 여인은 자연 연속에 놓여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반면 옷을 입은 여인은 문명, 예의, 사회적 질서의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자연스러운 존재와 사회적 시선 사이의 충돌처럼 여겨진다. p50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과 약간의 돈”이라고 말했다. 나에게도 그런 방이 필요하다. 이때의 방은 물리적인 공간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 조용히 침묵할 수 있는 시간, 누구의 소리도 아닌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허락하는 여백이 간절하다. 돌봄의 시간 속에서는 자기만의 고요를 얻기란 쉽지 않다. 가족 안의 내가 아니라, ‘쓰는 나’, ‘느끼는 나’, ‘멈추는 나’가 되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함메르쇠이의 방은 바로 그런 자리에 깔린 침묵이다. p69~70

하얀 설원 위에서 뛰노는 아이들과 강아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엄마의 모습이 담긴 켄트의 그림을 보면, 우리 가족의 한때가 떠오른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각자의 고단함을 품고 있다. 이 그림 속 인물들 역시 따스한 빛 속에 서 있으나, 역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행복의 습성도 그와 닮았다. 찬란한 한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그러나 때때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좋은 일이 찾아올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버티게 했다. p121~122

멀리서 보면 누구나 비슷해 보이는 인생도, 가까이에서 조용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특별해진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선이, 말없이 머물러주는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닐까. p127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렇지만 너무 이른 죽음은 조금 금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못 이룬 꿈, 돌봐야 할 가족,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두고 가야 하는 심정을 아니까. 작품의 원제인 'Dammerung'의 동사형인 'Dammern'dms '차츰차츰 밝아지다. 점차로 사라지다'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노을은 찬란한 낮의 사라짐, 빛의 소서가 아니라 이 길을 가는 나그네의 마지막 여정을 밝혀주는 은은한 빛이라는 이중성을 띠고있있다. 카를 몰의 그림에서처럼, 우리는 언저리에 서서 먼저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는 중이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그 길 위에는 어떤 빛이 비춰지고 있을까. 이곳의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 빛이 따뜻하고 포근하기를. p161

오달리 르동의 작품은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로 가득하다. 19세기 말 상징주의 운동은 인상주의의 현실 묘사에 반발하며 내면의 정신세계와 꿈, 무의식을 탐구했는데, 르동은 이 운동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명확한 해석을 거부하고 관람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추구했다. 신비롭고 불길한 생명체,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이 그의 초기 작품을 채웠다. 그의 그림은 환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음울하고 병약한 기운이 흐른다. p198

입추도 지났는데 아직도 이렇게 더울일인가?!...ㅠ.ㅠ

블로그씨의 질문에 대답을 한다면

나의 더위 탈출 방법은 둘 중에 하나다.

시원한 카페 구석자리에서 아아 한 잔과 함께 책을 읽거나,

더 시원해 어떨땐 춥기까지한 영화관에서 납량특집(?) 영화 보기!

돌봄을 살아낸 우리에게 쉼이 되는 그림들

나를 지키고 싶을 때 미술관에 갑니다.

내게도 그런 그림들이 있다.

마음이 힘들 때 위로가 되었던 뭉크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수잔 발라동, 빌헬름 함메르쇠이, 오딜롱 르동 등

보고 있는 것 만으로도 쉼과 위로를 주는 그림들...

누구누구의 엄마와 아내가 아닌

나로 살기가 이토록 어려운 일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