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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마지막 잔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무라카미 하루키는 환상적이고 무게감 있는 장편소설만큼이나 심플하면서도 감각적인 단편소설을 집필하는 데도 열정과 애정을 쏟아왔다. 그 시작점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초기 대표작으로 「오후의 마지막 잔디」가 있다. 「오후의 마지막 잔디」는 1982년 잡지 <다카라지마>에 발표되었다가 이듬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소설집 『중국행 슬로보트』에 수록되어 오늘날까지 전 세계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
안자이 미즈마루는 경쾌하고 청량한 일러스트로 사랑받아온 예술가이자 그 누구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는 친구로서, 오랜 세월 하루키와 환상적인 호흡으로 다채로운 협업을 선보였다. 그중 「오후의 마지막 잔디」를 위해 그린 총 20점의 일러스트를 1987년 잡지 <다테구미·요코구미>에 최초로 발표했다.
그후 긴 시간을 지나 안자이 미즈마루 타계 10주기(2024년)를 기리며 두 거장의 글과 그림이 온전한 한 권의 책으로 엮여 기념비적인 ‘일러스트 픽션 북’이 탄생했다. 한여름 잔디깎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와 그 계절의 감각을 물씬 발산하는 그림이 한데 담긴 이 일러스트 픽션 북을 통해 더욱 생생하고 색다른 느낌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하지만 인간의 존재를 비교적 순수한 동기에 근거한 어리석은 행위로 파악한다면,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올바르지 않으냐 하는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이 태어나고 소설이 태어난다. 이건 어느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영구운동 기계와도 같다. 그것은 온 세상을 덜컹덜컹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끝없는 선 하나를 긋는다. p11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멀리멀리 가는 게 좋았다. 먼 곳의 정원에서 먼 곳의 잔디를 깎는 게 좋았다. 먼 곳의 길에서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먼 곳의 길에서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설명해봤자 아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p32
나는 라디오를 끄고 맨발로 잔디 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만족스러웠다. 빠뜨린 곳도 없고 들쑥날쑥한 곳도 없다. 융단처럼 보드랍다. 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잠시 발바닥에 느껴지는 시원한 초록빛 감촉을 즐겼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온몸의 힘이 갑자기 쭉 빠졌다. p56
그후로 나는 한 번도 잔디를 깎지 않았다. 언젠가 잔디 정원이 있는 집에 살게 된다면 다시 잔디를 깎게 되리라. 하지만 그건 한참 나중의 일일 듯 하다. 그때도 나는 정말 꼼꼼하게 잔디를 깎을 게 틀림없다. p98
어느새 수요일
조용히 비가 내린다.
요며칠 아니 거의 한달 째 잠을 잘 못잔다.
이유야 여러가지이겠지만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큰 듯 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게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내색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다보니
주위에서 안색도 나빠졌다고 한다.
집에 있으려니 답답해서
책한권을 챙여 집을 나섰다.
비오는 창가 앞에 자리를 잡고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자
오래전 발표한 단편소설
'오후의 마지막 잔디'를 읽는다.
너무 얇아서 읽는게 아깝다.
읽는 속도를 늦추고 집중한다.
잔디깎고 나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게도 오는 듯 하다.
'멀리멀리 가는게 좋았다.
먼 곳의 정원에서 먼 곳의 잔디를 깎는게 좋았다.
먼곳의 길에서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는게 좋았다.'
안자이 미즈마루가 한땀 한땀 그렸을 잔디위에
남자와 테이블, 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멀리멀리 가서 안쓰고 보관중인 라이너펜을 꺼내
이렇게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불안과 우울과 작별하고
좀 신나는 일상을 꿈꾸는 나...
4월에 이어 5월도 잔인한 날이 반복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