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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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은영이 데뷔 이후 13년 만에 처음으로 산문집을 출간한다. 2024년 가을부터 2025년까지 써내려간 6편의 새로운 원고에 기존에 발표한 4편의 원고를 고치고 더해 완성한 책으로, 한 편 한 편이 단편소설에 가까운 긴 호흡으로 이어지며 최은영 특유의 “정서적 중량감”(문학평론가 서영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로 커다란 주목을 받은 이후 각별한 관심과 기대 속에서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장편소설 『밝은 밤』 등을 선보이며 견결한 소설세계를 만들어온 작가는 자신의 첫 산문집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백지 앞에서』는 작가가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다시 혼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착취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시절에 대한 기록부터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병원을 자주 오가야 했던 지난겨울의 이야기, 어린 시절에 형성되어 짧지 않은 시간 지속되었던 외모에 대한 강박, 동물권과 세월호 참사 등의 사회문제를 아우르며 우리가 서로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목소리까지, 최은영이라는 한 명의 작가이자 개인을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하나씩 꺼내어 보인다. 특히 표제작 「백지 앞에서」는 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여겨온 작가의 뜻밖의 고백을 통해 삶을 추동하고 치유하는 글쓰기의 의미를 헤아리게 한다.

최은영의 글쓰기는 ‘순백’을 닮았다. 이때의 순백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을 가리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깨끗하고 맑은 내용을 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편에 놓인, 얼룩과 그림자가 새겨진 상태를 숨김없이 전부 보여주고자 하는 결기에 가까운 태도를 뜻한다. 우리 각자의 내밀한 비밀과 상처는 남몰래 숨겨둔 일기장에,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인터넷 검색창에, 조용히 내뱉는 혼잣말 속에 흘려보내는 게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속에서 최은영의 진실은 바로 여기 이 산문집에 온전히 담겨 있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감정은 본능적인 반응이다. 슬프면 슬픈 것이고 화가나면 화가나는 것이지. 거기에 이상적인 이유를 달 필요는 없다. 자기 감정을 변명할 필요도,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일기장 위에서 나는 머뭇거리고 멈추면서 내 감정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거나 '내가 이엃게 느껴도 되는거야?'라고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감정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p15

글쓰기는 나 자신을 계속 대면하게 하여 나의 취약성을 인정하게 했다. 그리고 언어로 그 취약성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은 나의 가면을 깨뜨리기를 원했다. 그건 내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 호감과 비호감의 대상을 넘어선 나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진짜가 되고 싶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p64

사람들의 말처럼 상처를 잘 극복하여 성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타격을 받더라도 잘 맞서 싸우고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같은 말이 옳다고 여길 수 있다면. 내가 경험한 고통은 나를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나를 강하게 하지도 않았다. 어떤 상처는 내 마음의 구조를 비틀어 내가 원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꿔놓았고, 사람을 덜 믿게 만들었다. 마음의 힘을 고갈시켜서 나를, 타인을 사랑하는 힘을 앗아가기도 했다. p92

언제쯤 삶은 결코 통제할 수 없으며 삶의 사건들은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제쯤 모든 규칙을 깨고 펼쳐지는 삶의 불규칙성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연약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제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p125

내가 나의 고통을 입에 올릴때 '너는 고작 그까짓 일로 엄살이야?' 같은 대답을 들었던 기억은 나를 침묵하게 했다. 나는 고통스러우면서도 내 고통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나 '진짜 고통'이 따로 있다고 여겼으며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에 마음이 쏠리는 내가 한심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누구보다도 앞서서 내 고통을 검열하고 점수를 를매겼다. 여전히 나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도 없고 소화할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존재 한다는 것도. 하지만 내 고통이 상대적으로 작다고 해서 내가 나서서 상처를 비웃고 냉담하게 대할 할수 있다는 건 아니다. p177

그래서 나는 나의 사소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 이 이야기가 특별하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나의 진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의 상처뿐만 아니라 당신의 상처 또한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p178

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 사회의 인간성에 대한 척도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애도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일이자 동시에 인간의 권리이기도 하다. 애도의 기간과 방식은 오로지 애도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p237

병원에 함께 가 준다던 아이의 방문이 굳게 닫혀 있다.

조용조용 씻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가장 가기 싫은 진료과의 하나인 산부인과를 예약해 두었다.

타목시펜의 부작용이 꽤나 많은데

그중 하나로 자궁내막이 두꺼워지거나 폴립이 생길 수 있는 탓에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다.

검사결과,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근종이 몇개 있지만 지켜보자고...

안도하며 병원 근처 별다방에 자리를 잡았다.

꼬맹이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있다.

유모차를 끌고 손주를 쫓아다니시던 할머니가

떠나자 더 크게 울며 난리가 났다.

미래의 내모습 아닌가 싶다가

나라면 저렇게 뛰어다니게 두진 않을꺼라 다짐한다.

커피를 주문하고

최은영 작가의 신작이자 첫 에세이집인

'백지 앞에서'를 펼쳤다.

책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미루어 짐작하며

부러워하고 동경하는지라 작가가 들려 주는 이야기들이

진지하고 밀도 있게 다가왔다.

아! 작가도 아팠구나.

얼마전 갑상선암 수술을 한 이야기는

더 많이 공감되었던 것 같다.

위로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상처가 되었던 경험과 함께...

일기

혼잣말

글쓰기

조만간 비밀공간을 하나 만들어야겠다.

안전한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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