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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 - 박연준 산문
박연준 지음 / 난다 / 2025년 11월
평점 :
사랑의 속성이 속절없음이라고 말하는 시인 박연준의 첫 산문 『소란』 개정판이 난다에서 출간된다. 2014년 초판 출간 후 받아온 꾸준한 사랑을 옷감 삼아 새 옷을 입게 되었다. 『소란』은 ‘어림’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여림, 맑음, 유치, 투명, 슬픔, 위험, 열렬, 치졸, 두려움, 그리고 맹목의 사랑 따위가 쉽게 들러붙는(10~11쪽) 어림의 시절. 어른이 되는 과정 속에 우리는 누구나 그 어림을 경험하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어림의 시절은 꿈처럼 따라붙어 우리의 약한 부분을 헤집는다. 시인에게 그 시절은 감정 과잉과 열망이 엉켜 소란하고, 걱정과 불안이 고약하게 활개를 치는 시기였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데도 우는 것처럼 보이던 때, 시인은 슬픔이 그를 침범하도록 그대로 두었다. 슬픔이 활활 타오르는 죽은 나무(191~192쪽)인 채로 시를 쓰고, 또 시를 버렸다.
가장 격렬한 슬픔과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 껴안았던 이십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슬픔은 이미 폭죽이 터지듯 사라졌으나 그렇게 한철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196쪽)을 시인은 믿는다. 그리하여 시인이 어림을 아끼고 늙어 죽을 때까지도 몸 한구석에 어림이 붙어 있길 원하는 것(11쪽)은 곧 연약한 어림의 날들을 꽉 끌어안고 발버둥치며 살아가겠다는 어떤 약속과도 같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여전히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 평정을 잃고 방방 뛸때가 많지만 서른이 넘었으므로 이내 괜찮은 척, 기다리는 척 한다. 마흔이 넘어서는 뭘 하는 척해야 하나? 쉰이 넘고 예순이 넘어서는? 중요한 건 생각은 갑자기 해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어른인 '척'도 하고, 잘 사는 '척'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척'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아무쪼록 잘 사는 일이란 마음이 머물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순간의 시간을 온전히 할애해주는 것일지 모른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삶이라면 될 수 있는 한 ' 잘 대접해서' 보내주고 싶다. P86~87
마음이 고단할 때, 어디 내장 기관 깊숙한 곳에 구멍이라도 하나 뚫린 것처럼 몸속에서 자꾸 휘파람 소리가 들릴 때,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가서 속에 고여 있는 온갖 찌꺼기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휙, 던지고 싶다. 바다는 넙죽넙죽 폐기된 마음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투정하지 않을 것이다. 엎질러진 머리칼들이 시원하게 뺨을 때려줄 때, 뺨이 투명한 생채기로 물들 때,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때론 말없이 그저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정말 고마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P92
때때로 계단은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였는데 꿇어앉은 무릎이 몇 개나 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세워놓은 내 무릎의 둥근 모양이나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창백한 무릎이 한없이 펼쳐진 밤이었다. 조용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P169
무용수가 점프를 할 때 그의 몸을 타고 뛰어오르는 두려움이나 슬픔, 격정과 환희의 감정은 몸을 통해 실제 높이를 입는다. 무용수가 사랑을 연기할 때, 그는 발가락 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사랑을 소용돌이처럼 이끌고 돈다. 관객에게 알린다. 사랑이라고, 내가 사랑이라고! P181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을 때, 구멍으로 찬바람이 들어와 배꼽이 저릿저릿할 때 노라 존슨의 <12월 December>이란 노래를 반복해서 듣는다. 책상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시간이 뭉개지며 흐를 때까지. 공책에 음표나 화살표 따위를 그리며 낙서에서 낙서로 이어지는 달리기에 빠진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아주 먼 곳으로 잠깐 다녀온 기분이 든다. 무언가를 끼적이다 별안간 떠오르는 당신 생각. 허공에 매달아놓은 달덩이 같은 옛 생각, 눈발에 묻어둔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바람에 날아가기도 흩어지기도 하는 상념들을 무방비 상태로 흘러다니게 두어도 좋다. 별것 아닌 기억들로 인해 눈물이 핑 돌아도 좋다. P224
풀어준다고 받은 안마가 말썽이었을까?
안마 받은 다음날부터 몸살처럼 온몸이 아프더니
아직까지 왼쪽 어깨가 너무 아프다.
이 나에도 침을 맞기가 무섭지만,
내일도 차도가 없으면 한의원에 들려봐야겠다.
오늘도 거센바람에 노란 융단처럼 깔린 은행잎을
밟으며 별다방에 와있다.
"그러나 누구도
너무 많이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란
박연준 시인의 문장들을 좋아한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다섯편 남짓되는 책을 읽었고,
이번에 '소란'이 개정판으로 나온다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예약했다가 얼마전에 받았다.
바람이 부는 스산한 오늘 같은 겨울날 읽기 딱좋은 책...
잠시 기말고사 걱정도 내려놓고
집에 쌓아논 일들도 잠시 잊고
작가의 이야기에만 귀기울이는 시간이다.
전혀 닮지 않은 우리인데도
아버지, 고모, 할머니이야기가 나오면 자꾸 눈물을 찔끔거리게 된다. ㅠ.ㅠ
바다에 가고 싶은 날이다.
파도의 위로를 듣고 싶은 날...
집으로 돌아가면 노라 존스의 12월을 나도 들을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