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남자가 빌랭 거리 24번지 앞에 서 있다. 남자의 이름은 조르주 페렉. 페렉은 남다른 실험 정신과 감수성, 독창적인 언어감각으로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빌랭 거리 24번지 앞을 서성였지만, 차마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아버지는 그가 네 살 때 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아우슈비츠에 끌려가 생을 마감했다. 빌랭 거리 24번지는 부모님과 함께 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장소였음에도, 그 기억은 대부분 잊혀졌다는 것이 페렉에게는 큰 트라우마였다.

빌랭 거리는 파리 도시정비사업에 의해 철거가 결정되었기에 페렉의 어린 시절 집이었던 24번지 또한 몇 년 후에는 완전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마주하기 쉽지 않았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소들(Les Lieux)’이라 명명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위해 빌랭 거리를 다시 찾았다.

페렉은 ‘장소들’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장소 열두 곳을 골라 약 12년간 기록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빌랭 거리’를 주기적으로 기록하는 건 당연히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그는 매달 열두 장소 중 두 곳을 골라 묘사한 다음, 해당 장소와 관련된 지하철 티켓, 영화관 티켓, 팸플릿 등을 원고와 함께 봉투에 넣어 봉인했다. 기억들을 파괴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기에, 친숙한 장소들과 사물들을 기록하는 행위는 시간의 횡포에 맞서는 것이라고 페렉은 믿고 있었다.

이번에 녹색광선에서 출간 예정인 조르주 페렉의 『보통 이하의 것들』에는 「빌랭 거리」 텍스트를 포함하여 서로 다른 스타일의 아홉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아홉 편의 텍스트 모두 평범한 것들을 다루는 ‘일상의 글쓰기’ 라는 테마를 조금씩 다른 양식으로 관통한다. 페렉이 살아 생전 시도했던 글쓰기 스타일이 이 한 권에 모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항상 사건들, 기이한 것들, 비일상적인 것들만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신문 1면에 실리는 5단 표제 기사나 굵은 글씨의 헤드라인처럼 말이다. 기차는 탈선하는 순간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고, 더 많은 승객이 사망할수록 더 많은 기차가 존재한다. 비행기 또한 납치되는 순간 비로소 존재감을드러내고, 자동차는 오로지 플라타너스 나무에 충돌하는 운명만을 지닌다. 일 년에 52번의 주말이 있고, 52번의 결산이있다. 사망자가 많을수록 뉴스에는 좋은 일이고, 숫자가 계속증가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마치 삶이 스펙터클한 것들을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의미심장하거나 중요한것은 항상 비정상적인 것처럼, 하나의 사건 뒤에는 어떤 스캔들, 균열, 위험이 있어야만 한다. 대(大) 자연재해나 역사적 격변, 사회적 갈등, 정치적 추문 등..… p15

익숙한 것에 대해 질문해 보자.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익숙한 것에게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익숙한 것 또한 우리에게 질문하지 않으며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지도 않다. 마치 익숙한 것은 어떤 질문이나 답도 전하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지니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조건조차 되지 못하며, 일종의 무감각 상태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생애 동안 꿈도 없는 잠을 자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우리의 육체가 있을까? 어디에 우리의 공간이 있을까? p17

이 글의 일차적 목표는 '언어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종이 그 자체를 묘사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위의 글자들을 마치 현미경을 댄 것처럼 확대해 보여주고, 이를 통해 물리적 요소들(음성과 글자)로 구성되는 언어 자체의 물질성을 지시한다. 나아가 묘사의 글쓰기에 내재된 '주관성'도 강조 한다.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장소와 위치에서 묘사하지만, 시간대에 따라 똑같은 대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파악하거나 다른 형태 태혹은 색상으로 기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p178

페렉은 모든 글쓰기는 결국 이전 글쓰기에 대한 반복적인 차이라고 간주하면서, 일탈의 모순의 요소들을 통해 끝없이 글쓰기를 이어가고 증식할 할수 있다고 보았다. 텍스트 안의 텍스트 형식인 이글은 작가가 원한다면 매번 '그래프용지' 또는 '모눈종이'에서 다시 묘사를 시작하면서 작은 차이들과 함께 무한히 반복될 수 있다. P178~179

나는 좋아한다 : 공원들, 정원들, 그래프 종이, 만년필들, 신선한 파스타, 샤르댕, 재즈, 기차들, 일찍 도착하기, 바질, 파리에서 걸어 다니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 호수들, 섬들, 고양이들, 씨를 제거하고 껍질을 벗긴 토마토 샐러드, 퍼즐들, 미국영화, 클레, 베른, 타자기들, 팔각형, 비시 생수, 보드카, 폭풍우, 안젤리카, 압지들, 기네스북, 스타인버그, 안토넬로 다 메시나, 베데커 시리즈, 엘제비르 총서, 어스름 가득한 공기 속으로, 무당벨레들, 에블레 장군, 로버트의 스키피온의 십자말풀이, 베르디, 말러, 장소의 이름들, 슬레이크 지붕들, 이카루스의 추락, 구름들, 초콜릿, 목록들, 퐁루아얄 바, 지리적 감정, 오래된 사전들 ,캘리그래피, 지도와 교통지도들, 시드 챠리시, 돌멩이들, 텍스 에이버리, 척 존스, 물로 가득 찬 풍경들, 비버, 보리 라푸앵트, 사물의 감정, 씨 없는 묑스테르 치즈, 충분한 시간을 갖기, 동시에 혹은 거의 동시에 서로 다른 일 하기, 로렐과 하디, 중이층, 낯선 도시에서의 표류하기, 지붕이 있는 아케이드들, 치즈, 베네치아, 장 그레미용, 자크 드미, 가염 버터, 나무들, 수스 고고학 박물관, 에펠탑, 상자들, 롤리타, 딸기, 페쉬 드 비뉴, 미셸 래리스, 참을 수 없는 웃음, 지도책들, 필리핀 게임 하기, 아듀 필리핀, 부바르와 페퀴셰, 막스 형제, 축제의 끝, 커피, 호두, 007 살인번호, 초상화들, 역설들, 잠자기, 글쓰기, 로베르 우댕, 숫자들의 합이 9사 되는 모든 수를 9로 나눌 수 있는 지 확인 하기, 대부분의 하이든 교향곡, 세이 쇼나곤, 멜론과 수박, P183~185

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이렇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수있도록 말이다.

_보통 이하의 것들

편입을 결정하고 부터는 출판사리뷰를 줄이고 있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이 북카트 가득인데

다른 곳에 마음 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조르주 페레의 '보통 이하의 것들'은 사실 충동적인 구매였는데

회색 양장의 표지에 내가 좋아하는 우산 사진과 핑크색 글씨가

제목과 함께 모두 내 취향이라 처음 접하는 작가지만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생마르탱 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센 강변에 다다르게 된다.

바로 그 근처에 새시장과 꽃 시장이 있고,

너무나 아름다운 도핀 광장이 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고,

생루이 섬과 선착장들,

고서적 상인들 그리고 바토-무슈들이 있다. p120

무심히 찍은 듯 하지만 강력한 흑백 사진들...

내가 걷고 싶은 파리의 묘사...

작가는 내게 '익숙한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라'고 화두를 던진다.

'우리의 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디에 우리의 육체가 있을까?

어디에 우리의 공간이 있을까? '

나도 작가를 따라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보기로 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딱히 가늠하기 어려운

무채색의 빛으로 시들어 가는 듯 하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몇가지는 내 삶에 때때로 작은 위안이 되리라 믿는다.

나는 좋아한다 : 책읽기, 무라카미 하루키, 커피, 아이스 아메리카노, 텀블러, 아이스크림, 체리쥬빌레, 딸기, 사과, 향수, 에스티로더 플레져, 갓구운 빵, 다크 초콜릿, 비오는 날, 우산, 청바지, 에코백, 쇼팽, 팬텀싱어, 영화, 인디아나 존스, 엔니오 모리꼬네, 미술관, 뭉크, 여행, 파리, 부산, 제주, 군산,필기구, 그림그리기, 블루, 그린, 귀여운소품 그러나 누군가에겐 귀여운 쓰레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

나머지인 것, 모든 나머지 것,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되돌아오는 것,

흔한 것, 일상적인 것, 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의 것, 보통-이하의 것,

잡음 같은 것, 익숙한 것.

어떻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 p16~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