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집필과 출간에 얽힌 이야기가 특별하다. 1979년 데뷔 이래, 하루키는 각종 문예지에 소설을 비롯한 다양한 글을 발표했고, 대부분 그 글들을 책으로 엮어 공식 출간했다. 그중 유일하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아 팬들 사이에서도 오랜 미스터리로 남은 작품이 문예지 <문학계>에 발표했던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이었다.

코로나19로 사람들 사이에 벽이 세워지기 시작한 2020년, 그는 사십 년간 묻어두었던 작품을 새로 다듬어 완성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삼 년간의 집필 끝에 총 3부 구성의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세상에 내놓았다. 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하루키 신드롬’을 일으키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70대의 작가가 청년 시절에 그렸던 세계를 43년 만에 마침내 완성한 것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자신의 작가 인생과 작품세계를 수확하는 뜻깊은 완성이자 하나의 매듭이며, 이후의 하루키를 기대하게 하는 또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다채롭게 넘나드는 하루키적 상상력을 더욱 원숙한 세계로 만나볼 수 있는 이번 장편은 그의 신작을 기다려온 팬들에게 ‘하루키 세계를 집약한 결정적 작품’으로, 이제 막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하루키 세계로 들어가는 완벽한 입문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 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p15

내가 찾는 것은 '오래된 꿈'이다.

"'오래된 꿈'말이군요." 너는 작고 얇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나를 본다. 물론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시겠지만," 너는 말한다. "'오래된 꿈'은 '꿈 읽는 이'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없이 진녹색 안경을 벗고 눈꺼풀을 들어올려 네게 보여준다. 누가 봐도 명백히 꿈 읽는 이의 눈이다. p37

"마음이 굳어 버려."

나는 여전히 침묵한다. 무슨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너는 말한다. "그러면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어딘가에 매달려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나는 네가 하려는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쓴다. p104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p111

안녕, 잘 지내? 계절이 바뀌고 있어. 주위 풍경이 전과 다르게 보이고 공기의 감촉이 바뀌어가. 아마 나도 조금은 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디가 변했는지 그그로 알 수 없어. 자신에게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거울에 비춰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p156

쓸쓸한 외톨이로 보낸 여름이었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이면 지구의 중심에 닿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내려간다. 주위 공기의 밀도와 중력이 점점 바끼어가는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고작해야 공기 아닌가. 고작해야 중력 아닌가.

그렇게 나는 더욱 고독해진다. p172

나는 그 슬픔을 무척 잘 기억했다.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또한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지도 않는 종류의 깊은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남기고 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 p280

세계와 또다른 세계의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각인. 나는 아마도 그것을 내 존재의 일부로 간직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p667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p684

이웃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한건 꽤 오래전부터이다.

'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먼북소리', '태엽감는 새' 등 단일작가로써는 가장 많은 책을 구입했고

한 때 열광하며 그의 책을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변잡기(?) 같은 에세이 등만 출간되거나

1Q84처럼 내가 읽고 즐기기엔 부담스러운 작품들이 발목을 잡는다.

그나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나

다시 읽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등은

좋았지만 예전 첫사랑(?) 같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늦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이번에도 혹시하는 기대감을 안고 구입한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다섯시간이라는 큰 수술을 한 탓도 있고

지레 벽돌같은 두꺼운 책이 부담으로 다가와

시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겨울비 내리는

별다방 창가에서

이른 캐롤을 들으며 읽기 시작한 책은

두께가 무색하게 이틀동안 집중해서 다 읽어냈다.

꿈틀꿈틀 그를 처음 좋아했던 첫사랑의 마음과 함께

때론 아프고 미련이 남는

'오래된 꿈'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던 것도 같다.

좋아했지만

한동안 대면대면 지내던 옛친구가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다.

'안녕, 잘지내?'

잘지내고 있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눈물이 먼저 난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도시에서 한나절을 머무는 동안

염치없게도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것만 듣고 읽으며

열일곱,열여덟이었던 나와 조우했고 누군가의 그림자와 이별을 했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만한...

다시 그와 사랑에 빠졌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 = 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 p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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