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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평점 :
우리 삶에서 ‘번역’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영화관이다. 도서에도 번역은 존재하지만, 표기는 대체로 ‘옮김’이고 저자 이름의 옆 또는 하단에 적혀 있어 부러 찾아야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만나는 ‘번역’ 글자는 엔딩크레디트 중에서도 맨 마지막, 그것도 크레디트와 다른 위치에 대체로 큰 글자로 튀어나온다. 우리가 찾지 않아도 저절로 눈앞에 나타나는 거다. 물론 상영관 불이 켜질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면 말이다.
스크린 속 ‘번역’이란 글자 옆에 자연스럽게 떠올릴 이름 석 자가 있다면 ‘황석희’일 것이다. 그 이름이 뜨는 순간 좌석 곳곳에서 “역시 황석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번역가로서 잘 알려진 황석희가 이번엔 ‘작가 황석희’로, 관객이 아닌 독자를 찾아왔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구인 ‘번역 황석희’라는 제목의 책으로.
<인터넷 알라딘 제공>
결과가 없어서 당장 어떤 큰 불이익을 겪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매번 벼안끝에 서 있는 것처럼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건 노력은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를 늘 남겨준다. 모든 결과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프리랜서에게도 실패로 이어진 노력은 반드시 재산으로 쌓인다. 당장은 기회를 잃더라도 근육처럼 몸에 밴 노력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다음 기회에는 실패에서 얻은 요령까지 더해져 더 효율적인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실패하고 배우기를 반복하며 굳은살이 박이는 성실함. 이런 미련한 성실함은 단순해 보여도 아무나 쉬이 가질 수 없는 재능이다. p29~30
이렇게 보면 직업 세계라는게 부당해 보이겠지만 한편으론 조금은 안심해도 되는 주먹구구식 허술한 시스템이다. 차분히 경력만 쌓으면 어떻게든 저 구석에서라도 자기 자리를 찾을 방법은 있다는 거니까. 특별한 사람들처럼 대단한 가치관이나 천재적인 재능이 없어도 그 업을 할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 나처럼 별생각 없이 일을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생각보다 멀리 떠내려오는 경우도 있고.
미디어에 노출된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사연에(정말로 특별한지는 모르겠지만) 부러움이나 자괴감 느낄 것 없이 내 자리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으면 될 일이다. “어쩌다보니 이 일을 하게 됐어요”라는 말은 어찌 보면 그 어떤 사연보다도 훨씬 운명적이다. p91~92
내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할 수 있는 몇 가지 중 하나는, 나는 어머니에게 최선의 것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 최고의 것은 아닐지언정 당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받으며 자랐다. 그 최선은 최고 못지않은 것이며 어떤 면에선 최고를 능가하는 값진 것이다. … 당신이 준 것은 분명 최선의 것이었지만 외견 이렇게 늘 초라했고 한편으론 촌스럽고 구질구질했다. 자식 눈에도 그랬으니 남들 눈엔 어떠했을지. 하지만 그 기억은 구질구질하지 않고 늘 고마움의 상징처럼 남아 있다. 당신은 분명 당신 최선의 것을 주었다. p225
처음엔 잘 되지 않고 불편했지만 하다보니 생각보다 좋은 점이 많다. 일단 말을 뱉는 속도가 느려지니 단어를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게 됐고, 내 의도를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 것같은 느낌이 든다. 게다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내 이런 말투가 신중하고 진중한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고 한다. 궁여지책이 푼수끼까지 커버해주다니 이쯤하면 궁여지책이 아니라 기책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보니 썩 나쁘지 않다. 굳이 전처럼 말을 빨리 할 필요가 있나 싶고. 말이 조금 느려졌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게 사실상 전혀 없더라. 나는 이게 병목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꾀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이듦이 준 조언 같다는 생각도 든다. ‘너의 속도는 지금이 딱 좋아’라고 하는 것처럼. p238
빵을 먹는데 그 싫은 사람이 자꾸만 가엽게 느껴지는 게,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불편한게 죄스럽다고 해야 하나, 왜 이런 걸 알게 돼서 심경이 복잡해지는지, 화가 나기도 도해 차라리 몰랐으면 했다. 마음껏 미워하기라도 하게. 모순덩어리. 싱숭생숭.
지금도 그 버터크림빵을 먹을 때마다 싱숭생숭하다. 딱히 맛있지도 않고 느끼하고 촌스러운 옛날 빵. 그런데도 빵집에서 눈에 띌 때면 나도 모르게 하나씩 집는다. 그런데 집에 와서 한입 물면 곧장 또 괜히 샀나 후회스럽다. 역시나 맛있진 않구나. 그때만큼. P249
재밌게 관람한 <데드풀> <스파이더맨> <작은 아씨들> 들을 번역한
황석희의 첫번째 에세이 출간 소식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을 구입했다.
한 번도 그를 본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해 유퀴즈에 출연한 그를 스치듯 본 것 같기도...
번역된 자막을 보며 막연히 위트있는 사람일꺼라 짐작했었는데
이번에 책을 읽다보니 세상에 존재하는 유머와 밈을 모으고
영화에 최적화된 대사를 만들어내는 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관련된 에피소드 뿐만 아니라 개인 일상사도 좋았는데
그중 어머님과 아버님 관련 이야기에선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부분인데도
코킅이 찡해졌다. ㅠ.ㅠ
"I don't know why it is that i find it so very difficult, just being here on this earth."
_루이스 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은 문장이
"그저 이땅에 존재하는게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그의 손을 거치면 이렇게 바뀐다.
"숨만 쉬어도 살아지는 삶인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어."
오래전 영어를 꽤나 잘하는 친구가
미국 방문시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우리식의 '배가 살살 아프다'는 표현을 어찌해야 할찌 몰라
한참을 고민하고 더듬더듬 본인의 상태를 말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저자는 자연스러운 번역이 의역이 아니라
번역가들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쓰는 이런식의 번역이 의역이라고 말한다.
원문을 해체하고 관객들에게 가장 잘 다가갈 수 있는 재구성을 하는 일 번역...
영화 좋아하는 1인으로 다음 번역작품도 기대하며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