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빛을 따라서
권여름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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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으로 가는 길목에서 ‘필성슈퍼’를 운영하는 가족의 이야기다. 여섯 식구를 책임지고 있는 슈퍼는 주변에 입점한 대형마트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빠는 손님의 발걸음을 되돌리기 위해 ‘두부 한 모라도 배달’을 중심으로 여러 방안을 마련해보지만 돌아선 발걸음은 꿈쩍없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은동은 할머니와 비밀스러운 한글 수업을 통해 자신의 오랜 꿈, 배우가 되기 위한 첫발이 되어줄 ‘연기 아카데미’의 학원비를 모으고 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매출이 나아지기보다 더 악화된 슈퍼는 급기야 공과금을 비롯해 급식비, 학원비까지 밀리게 되며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간다. 필성슈퍼 가족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인터넷 알라딘 제공>

그 누구보다 나는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친구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말로만 떠들 때, 나는 움직였다. 가끔 온몸이 너무 뜨거워져서 열정이 조금은 사라져도 좋겠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그런 아이라는 것을 선생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p24

늘 이 말만 듣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곳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걸 확인하느라 한 달에 한 번은 전화를 걸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갑니다’ 속으로 이렇게 비장하게 외치다, 어떤 날은 입 밖으로 뱉으며 수화기를 딸깍 내려놓기도 했다. 누군가에게는 장난전화처럼 보이겠지만, 곧 합류할 세계의 안부를 묻는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은 한발 더 나아갈 생각이다. 나는 닭이 되고 싶지 않다. p51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문을 여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새벽 여섯시 차가운 셔터 끝을 잡아 힘차게 올리는 아빠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여는 시간 여섯시, 닫는 시간 열두시는 법으로 정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시간이었고, 우리 슈퍼만의 신성한 약속이었다. p170

엄마와 아빠는 슈퍼가 심란한 일을 겪을 때마다 청소를 하고 뭔가를 궁리했다. 지금도 그렇다. 다시 이기기 위해 전략을 짜고, 때론 종목을 바꾸며 변신했다. 외부의 파도에 쉽게 흔들렸지만 마냥 휩쓸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p243

선우정 언니의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예전의 나라면 자기 추천은 민망해서 더더욱 싫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방식이 더 멋지다고 느껴졌다. 폐허 오은동은 선책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선택하는 걸 더 좋아하는게 분명했다. p249

‘알어야 면장이라도 혀’ 할머니가 습관처럼 뱉던 이 말을 떠올렸다. 알아야 면장이 담장을 면하는 거였구나. 알면 눈앞의 벽이 없어지는 것. 나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르르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가 담을 넘으려는 순간, 눈앞의 벽이 허물어지는 상상을 했다. 고운 가루로, 빛으로 부서져 흩날리는 것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p253

경험에서 출발해 처음엔 비교적 쉽게 풀어나갔지만, 경험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공들이는 과정이 필요했다. 마치 내 경험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누가 이겼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완성했다. 구상해준 다음 소설을 얼른 쓰고 싶다. p263

실패라고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는 자라고 있다.

'작은 빛'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삶의 작은 변화들...

'작은 빛을 따라서'

그림에세이나 심리학 또는 인문학 책만 주로 있다가

오랜만에 한국소설을 한 권 읽었다.

한때는 소설을 좋아했지만 요즈음엔 한호흡으로 읽지 않으면

내용이 이어지는 것 같지 않아 읽다말다를 반복하다보면

재미가 반감되는 경험을 종종했기에 어느 순간부턴

두었다가 다시 읽어도 크게 지장 없는 에세이류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다르다.

젊은 작가의 책이라 내겐 좀 가벼울꺼라는(?) 걱정도

보기 좋게 한방에 날려버리고 다음이 그 다음이 궁금해 속도를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군산 살 때 자주 가던 내장산의 풍경을 어찌 그리 잘 그려내나 했더니

작가가 정읍에서 자랐구나...

자신의 오랜 꿈, 배우가 되기 위한 준비로 ‘연기 아카데미’의 학원비를 모으고 있는 은동...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하고 한평생 답답하고 서럽게 살아왔을 문맹의 할머니...

손님이 찾아오지 않아도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필성슈퍼에 붉을 밝히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부모님..

꿈을 위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은동이의 모습도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봤지만

일단 할머니얘길 안 할 수 없다.

아들이름으로 헌금을 하며 목사님 모시고 예배드리는 첫장면부터

자연스레 할머니 생각을 떠올렸던 것 같다.

물론 우리 할머니는 은동이의 할머님와는 많이 달랐다.

그 옛날 연세간호학당을 다니셨고 오래도록 산파로 일하셨고

울동네 아이들은 할머니가 다 받으셨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권사님이시자 여성교회 회장님이셨던 할머니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글은 몰라도 굴하지 않고

때론 여장부처럼 가족을 하나로 만드는 은동이의 할머니의 모습과

누구보다 날 사랑하셨던 나의 할머니가 오버랩되며 추억속에 빠져있다가

할머니와 은동이와의 비밀수업이후 할머니이름과 아버지이름을 쓰던 그 날

내마음도 이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 없었다.


작은 빛을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앞만보고 달렸던 내가

재수술에 대한 얘기를 들은 후부터

좀 지치고, 마음이 힘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간당간당...

나또한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어떻게든 희망의 문을 다시 열고 나서는 내모습을 꿈꾸어 본다.

간당간당. 엄마의 입에서 최근에 많이 나온 단어가 머릿속에에서 울렸다.

이 단어는 마치 치종소리 같았다. 간당간당...

간당간당. 위태로운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 종소리를 들으며 확신했다.

내일도 우리 필성슈퍼는 망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문 열기를 선택 할 거라고 말이다.

세상을 향해 용감하게 양팔을 벌린 것처럼 슈퍼의 양쪽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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