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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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을 쓰려고 새 노트북을 산 사람이 있다. 그는 3년간 초고를 쓰면서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짧은 글들을 이따금 공개했다. 문제적 화두를 던졌고 사회적 울림을 전했고 대중적 공감을 자아냈다. 어느 날부턴가 제법 쌓인 단편들을 수차례 다듬고,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은 미발표작들을 살피며 두 계절을 흘려보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알아챘다. 그가 책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이름 앞에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싱어송라이터이자 타고난 이야기꾼. 이적은 그렇게 생애 첫 산문집을 썼다. 마감 직전 그는 유행을 타지 않고 오래 곁에 머무는 “시간을 견디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적의 단어들》은 어느 단어에서 촉발된 이야기를 엮은 산문집이다. 산문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상 시와 소설을 넘나든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꼬집고 새의 깃털처럼 새로운 세계를 펼치며 “희망이자 구원”을 그린다. 인생의 넓이, 상상의 높이, 언어의 차이, 노래의 깊이, 자신의 길이 등 총 5부로 나뉜 책은 장황하게 에둘러가지 않고 이야기의 핵심으로 파고들며, 날카로운 유머로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우리가 그동안 보던 산문에서 벗어나 일상과 환상의 중간 지점에서 의미를 발산한다.

이적은 언어를 씻기고 씻기며 마땅한 문장과 정직한 수사를 찾았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니와, 섭씨 1,250도 가마 속 불길을 견디는 도자기, 그것을 노려보는 소년의 눈빛과 바라보는 노년의 눈빛이 섞인 눈동자를 닮았다. 그가 써 내려간 글을 묘사하거니와, 펜촉에서 떨어진 벼락 같다. 벼락의 전후 사정을 쓰는 건 서술이지만 벼락이 번뜩이는 순간을 쓰는 건 정신이다. 이 책에는 그런 번쩍이는 정신이 담겨 있다. 잔재주가 없어 군소리로 들리지 않는 단단한 단편들이 기쁨과 슬픔을 깨운다.

<인터넷 알라딘 제공>


“어린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갈 날이 낼모레구나”라고 말하는 할머니를 보며 아이는 “에이, 할머니, 그럼 인생이 다 합해서 닷새라는 말씀이세요?”라고 놀리듯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미소를 머금고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참으로 그러하구나.” p17

한 해 한 해가 갈수록 귀하다.

한 달 한 달이 더 없이 소중하다.

하루하루가 뼈저리게 아쉽다.

그런데 왜 꼭 연말이 되어서야 그걸 깨닫다. p51


우리는 플라톤의 동굴로 걸어 들어가 모닥불에 의해 동굴 벽에 비쳐 일렁이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넋 놓고 바라본다. 누군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하고 누군가 태곳적부터 전해 내려온 부족의 전

설을 읊어 내려가자, 듣는 둥 마는 둥 뛰놀던 꼬마는 손을 모아 작은 새 그림자를 벽에 비추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함께 앉아 숨을 죽이고, 몇 번이고 처음인 양 볼을 붉히며, 이야기가 마술처럼 떠올랐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순간의 기적에 열중하리라. 불이 꺼지고 빛이 들어온 곳, 빛이 비춘 꿈이 빛나는 곳, 우리가 자진해서 들어가는 유일한 암흑, 영화관에서. p55

“10년 앞을 내다보라”라는 말과 “10년 뒤를 내다보라”라는 말은 정확하게 같은 뜻이다. 이상하지 않

은가? ‘앞과 뒤’를, 대체 가능한 한자인 ‘앞 전(前)과 뒤 후(後)’로 바꾸어보면 실감할 수 있다. ‘10년 전’은 과거를, ‘10년 후’는 미래를 뜻한다. 한데 어찌하여 ‘10년 앞’과 ‘10년 뒤’는 둘 다 미래를 의미하게 되었을까. 시간의 앞과 뒤는 같다는 뜻일까. 우리는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결국 미래로 흘러간다는 뜻일까. 시간의 ‘앞뒤’를 바라볼 때와 ‘전후’를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쪽과 우리가 등진 쪽은 어디인가. p113

이석증이 생긴 지 10년이 되었다. 내 경우 찬 바람 부는 계절에 특히 신호가 오는데, 이런저런 경험 끝에 왼쪽으로 누우면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 오른쪽으로만 누워 잔 지 오래다. 자다가 살짝 왼쪽으로 뒤척이면 어지럼증이 비집고 들어올 때가 있다.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에서처럼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회전성 현기증’의 전조. 아찔한 낭떠러지 끝에서 발을 빼듯 급히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그제야 진정되는 가느다란 요동. 있는지도 몰랐던 귓속 작은 돌의 위치가 미세하게 바뀌는 것만으로 세상의 안정감이 완전히 흔들린다. 인간이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가. p189

지난주,

서울 모임에 다녀온 후

알수없는 어지럼증으로 일주일 남짓 고생중이다.


그동안의 어지럼증은 대부분 누우면 그 증상이 완화되곤 했는데

이번엔 누워도, 눈을 감아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는 이석증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기력이 쇠해서라고도 하고...

병원에선 비염외엔 딱히 진단명없이 무리하지 말고 쉬라는 말과 함께

약을 처방 받았다.

주말에 오겠다는 꼬맹이도 담주에 오라고 하고

아픈언니 맛있는 거 사주겠다는 동생도 담에 만나자고 했다.


안그래도 부실한 몸이 앞자리가 6자로 바뀌더니

자꾸 알아봐 달라고 한다.

영화관에 갈 체력도 아니어서

인터넷 알라딘에서 북카트에 담아 두었던 책들중

몇권을 주문했다.

읽기 편할 것 같은 놈(?)으로...

가장 먼저 집어든 책

'이적의 단어들'

내 계획에 맞게 술술 책이 넘어간다.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단어들이다보니

나라면 이 단어들로 어떤 이야기들을 풀어 냈을까 상상해 보기도 하고

공감가는 글귀엔 '맞아맞아~ ' 맞장구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마음엔 근심의 방이 있지.

늘 무엇으로든 꽉 차 있어.

한두가지 근심을 겨우 떠나보낸 뒤,

혹시나 들여다보면 새 근심이 차오르고.

방을 없앨 수 없단 건 나도 알아.

방문을 열지 않으려 애쓸뿐.

다만 얄궂게도 잠기질 않아서 매일 밤 삐거덕 소리와 함께 근심은 또 슬그머니 흘러나오네.

오늘도 우리 모두, 건투를 빈다. p219


거위의 꿈

달팽이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하늘을 달리다

말하는 대로

다행이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던 오랜 팬으로

오늘은 그의 응원 같은 한 구절에 힘을 내어 본다.

'오늘도 우리 모두,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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