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한 연구에서 동화책을 많이 읽는 아이(아이보다는 부모의 선택이다)가 타인의 감정을 더 잘 읽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이 결과는 이야기 경험이 실제로 공감 능력을 확장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 P137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분명히 개별 단어와 문장에 집중하지만, 정신의 작은 일부는 언제나 배회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단어들이 자기 삶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한다. 이 문장들이 내가 앞 장에서 말한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한다. 내가 다음에 말할지 모를 내용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하는 말이 모순으로 가득한지, 또는 결국 한 점으로 모일지 궁금해한다.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이나 지난주에 텔레비전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기도 한다. 조너선은 "사람들은 핵심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책의 여러 다른 부분을 하나로 합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독서에서의 결함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독서다. 지금 정신이 배회하게 두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방황할 정신적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 P147

딴생각은 상황을 이해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조너선은 내게 "딴생각을 하지 못하면 다른 수많은 것들이 사라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딴생각을 많이 할수록 더욱 체계적인 목표를 세우고 더 창의적이며, 끈기 있는 장기적 결정을 더 잘 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신이 표류하면서 천천히 무의식적으로 삶을 이해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더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 P147

"창의력은 뇌에서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이선이 말했다. "창의력은 이미 그곳에 있었던 두 가지를 새롭게 연결하는 거예요." 딴생각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더욱 활짝 펼쳐지게 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연결이 이뤄"진다. 계속 자신이 풀고자 했던 수학 문제에만 초점을 두었거나 정신이 완전히 산만했다면 앙리 푸앵카레는 해결책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답을 떠올리는 데는 딴생각이 필요했다. - P148

딴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의 정신은 (네이선의 표현에 따르면) "머릿속 시간 여행"을 떠나 과거를 더듬고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정신은 눈앞의 사안만 생각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로워지면 다음에 일어날지 모를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며, 이는 미래를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 - P148

두 과학자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딴생각(내가 프로빈스타운에서 너무나도 많이, 너무나도 즐겁게 했던 것)이 주의 집중의 정반대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이유로 딴생각을 하면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실제로 딴생각은 다른 형태이자 반드시 필요한 형태의 집중이다. 네이선은 우리가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로 주의를 좁혀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 "일정량의 에너지" 가 필요하고, 그 스포트라이트를 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에너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저 다른 사고방식에 "에너지를 더 많이 할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의력이 꼭 낮아지는 것은 아니며, 다른 중요한 형태의 사고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뿐"이다. - P149

이 모든 것을 연구한 네이선은 생산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저 가능한 한 스포트라이트를 좁히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저는 매일 산책을 나가서 정신이 일종의 정리를 하게끔 내버려둡니다··· 의식에서 생각을 온전히 통제하는 방식이 꼭 생산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느슨한 연상 패턴이 독특한 통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마커스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내게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소화해야 할 원재료"를 제공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거기서 한 발짝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고했다. "오로지 외부 세계에만 정신없이 바쁘게 초점을 맞추면 뇌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소화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 P150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디지털 방해는 "자기 생각에서 주의를 멀어지게 하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를 억압"한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처럼 끊임없이 유발된 자극에 얽매이는 환경에서 여러 방해 요소 사이를 쉼 없이 오간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생각의 흐름이 모조리 억압될 것"이다. - P151

마술은 사실 집중력의 한계에 관한 겁니다." 마술사의 일은 (본질적으로는) 우리 주의의 초점을 조종하는 것이다. 사실 그 동전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의 관심이 다른 데 쏠렸을 때 마술사가 동전을 옮겼기 때문에 우리의 초점이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마술을 배우는 일은 곧 다른 사람의 주의를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트리스탄은 일단 마술사가 관객의 초점을 통제할 수 있으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캠프에서 배운 내용 중 하나는 마술에 얼마나 잘 넘어가느냐가 지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훗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보다는 더 미묘한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약점과 한계, 맹점, 또는 우리가 갇힌 편견 같은 것들이요." - P165

"그게 제 안의 마술을 일깨웠어요." 트리스탄이 말했다. "이렇게 생각했죠. 우와, 정말로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들이 있구나. 사람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규칙이 있다면, 그게 바로 권력이에요. 마치 아이작 뉴턴이 물리법칙을 발견한 것 같았어요. 누군가가 내게 코드를 보여준 것 같았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 관한 코드요. 주말에 학교 도서관에 앉아 이 책들을 읽으며 격하게 밑줄을 치던 생각이 나요.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맙소사, 정말로 이럴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아." 트리스탄은 자신이 완전히 흥분에 도취되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제 머릿속에서는 아직 윤리의 경종이 울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 P169

무언가가 트리스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이 이메일을 강박적으로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메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 들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하던 이메일 앱이 "수많은 장치 위에서 작동하고, 매우 강력하고, 짜증 나고, 심한 스트레스를 주고, 사람들 삶의 엄청난 시간을 망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설득적 기술 연구소에서 사람들을 조종하는 방법을 배웠지만, 나도 다른 기술 설계자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걸까?‘ 라는 난처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설계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이 상황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B.J.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힘을 선한 목적으로만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학기 내내 학생들이 이런 윤리적 문제로 토론을 벌이게 했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비밀, 이 코드가, 현실에서 정말 윤리적으로 사용되고 있을까? - P170

그의 아버지는 스티브 잡스Stere Jobs 와 함께 애플 매킨토시를 개발한 제프 래스킨Jef Raskin 이었는데, 그가 매킨토시를 만들 때 중심에 둔 원칙은 사용자의 주의력이 신성하다는 점이었다. 제프는 기술의 책무가 사람들을 고양해 더 높은 목표를 성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기술의 목적이 뭘까? 우리는 왜 기술을 만들까? 우리가 기술을 만드는 이유는 기술이 우리 안의 가장 인간적인 면을 끌어내 확장하기 때문이야. 그게 붓의 목적이야. 첼로도 그렇고, 언어도 그래. 이 기술들은 전부 우리 안의 어떤 면을 넓혀줘. 기술은 우리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냐. 우리를 더욱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주는 거지." - P183

아자는 […] 20대 초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최전선에서 최초의 인터넷 브라우저를 설계하고 있었고, 파이어폭스Firefox의 크리에이티브 책임자였다. 그는 업무의 일환으로 웹의 작동 방식을 뚜렷하게 바꿔놓은 기능을 설계했다. 그 기능의 이름은 ‘무한 스크롤‘이었다. […]
아자는 자신의 설계가 자랑스러웠다. "처음에는 정말 좋은 발명처럼 보여요." 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이 모두의 삶을 더 손쉽게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접근의 속도와 효율이 높아지는 일은 늘 진보라고 배워왔다. 그의 발명은 순식간에 인터넷 전체로 퍼졌다. 오늘날 모든 소셜미디어와 수많은 웹사이트가 무한 스크롤의 한 형태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때 아자는 주위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화면을 내리며 전자기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그가 설계한 코드 때문이었다. 아자 본인도 끝없이 스크롤을 내리다 나중에야 자신이 본 내용이 쓸데없는 정보임을 깨닫곤 했고, 자신이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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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 어딘가에, 닭이 있다는 걸 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냄새를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 있을 테니까. 내 인생의 냄새, 내 아버지의 냄새. 피, 남자, 똥, 싸구려 술, 시큼한 땀, 공업용 기름 냄새가 난다.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곳이 비밀 장소라는 것,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는 감옥 같은 곳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완전히, 아주 완전히 좆됐다는 것도. - P12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여자가 울고 있는데, 아까 울었던 여자와 같은 여자인지는 모르겠다. 뚱뚱한 남자가 총을 쏘았고 우리는 모두 바닥에 최대한 납작 엎드린다. 우리에게 쏜 것은 아니지만, 총을 쏘았다. 마찬가지다. 공포가 우리를 반으로 갈랐다. 뚱뚱한 남자와 그의 패거리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우리를 이 공간 한가운데로 몬다. - P16

나르시사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믿지 않았다. 공포영화에서 무서운 존재란 언제나 죽은 자들, 되살아난 자들, 뭐에 씐 자들이었으니까. - P25

낮에는 아무래도 괜찮았다. 우리들은 용감했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나르시사에게 우리 방으로 올라와 함께 있어달라고 떼를 썼다. 아빠는 나르시사 — 아빠는 그녀를 가사도우미라고 불렀다 — 가 우리 방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르시사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르시사가 오지 않으면 우리가 내려가서 가사도우미의 방에서 자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바로 그게 나르시사는 무서웠나 보다. 악마나 뱀파이어보다 더. 한 열네 살쯤 되었을 나르시사는 우리랑 자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마지못해 우리 방으로 오면서 그 얘기를 하곤 했다. 죽은 것들보다 살아 있는 것들을 더 무서워해야 한다고. 우리는 그런 멍청한 말이 어디 있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나르시사를, 예를 들어 「엑소시스트」의 소녀 리건보다, 우리 집 정원사 페페 아저씨를 살렘의 뱀파이어나 악마의 자식 데미안보다 더 무서워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럼 늑대인간보다 아빠를 더 무서워해야 한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 - P26

메르세데스는 정말 겁이 많았다. 새하얀 얼굴에 약골이었다. 엄마는 탯줄을 통해 들어오는 영양분을 내가 다 먹어버려서 메르세데스가 그렇게 조그맣게 태어났다고 했다. 콩알만 하게. 나는 반대로 황소처럼 태어났다고 했다. 딱 그 단어를 썼다. 황소. 그러니 황소는 콩알을 책임져야 했다. 걔한테 뭘 해줘야 하지? 나는 가끔 콩알이 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나는 황소였고 메르세데스가 콩알이었다. 분명 메르세데스도 가끔은 황소가 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맨날 내 뒤에서만 걷지 않고 내 그림자에 숨지 않고 내가 말하길 기다렸 다가 내 말에 그냥 동의만 하지 않고 말이다.
"나도."
한 번도 ‘나는‘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항상 ‘나도‘. - P28

형제자매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형제자매가 있다는 건 형벌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배운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는 꼭 자기 형제자매를 구해낸다는 것도. - P29

나는 그들의 위선이 정말 싫었다. 못됐으면서 착한 척하고 다녔다. 그들은 학교의 모든 칠판을 나더러 지우라고 시켰고 예배당 청소를 하라고 했고 원장 수녀님의 자선 사업을 도우라고 했다. 자선 사업이란 다만 우리 부모님 같은 사람들이 준 것을 다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나눠준다기보다 그것들을 중간에서 빼돌려, 자기들이 좋은 생선 요리를 먹고 자기들이 푹신한 깃털 이불을 덮고 잔다고 해야겠다. 나는 계속해서 벌을 받고 또 벌을 받았다. 수녀님들은 민어 요리를 먹으면서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밥만 주냐고 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거라고, 그분이 물고기를 만드신 건 모두를 위해서였다고도 말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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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외투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오면서 어떤 안도감을 느꼈다. 밖으로 나와서, 강을 보고, 바깥공기를 마시니 얼마나 좋은지. 부두로 가니 거대한 갈매기 떼가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들었다가 펄롱을 지나쳐 줄줄이 떠나갔다. 문 닫아버린 조선소로 먹이를 구하러 헛걸음을 하는지도 몰랐다. 마음 한편에는 오늘이 월요일 아침이어서 다른 건 다 잊고 그냥 도로로 나가 평일 일상의 노동에 기계적으로 빠져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 너무나 공허하고 힘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펄롱은 다른 남자들처럼 미사 마치고 맥주 한두 잔 마시면서 쉬고 즐기고 저녁 배부르게 먹고 불가에서 신문을 보다가 잠들 수 없는 걸까? - P92

펄롱이 가기 전에 네드가 차를 끓였고 ‘콘서티나‘를 꺼내 몇 곡을 연주했고 다음에는 콘서티나를 내려놓고 눈을 감더니 「까까머리 소년」을 불렀다. 네드가 부르는 노래가 하도 처연해서 펄롱은 목덜미에서 털이 쭈뼛 솟는 느낌이었고 네드에게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청해 듣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 P95

여자가 문을 닫자, 펄롱은 표면이 반들반들 닳은 화강암 디딤돌을 내려다보며 신발 바닥을 갈듯 그 위를 가로지르고는 고개를 돌려 어둑한 마당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둘러보았다. 마구간과 건초 헛간, 외양간, 말 여물통, 어릴 때 펄롱이 놀던 과수원으로 나가는 연철 대문, 곡물창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머니가 쓰러져 세상을 뜬 돌길.
펄롱이 트럭에 올라타 문을 닫기 전에 마당 불이 꺼졌고 공허함이 펄롱을 덮쳤다. 한동안 펄롱은 그대로 앉아 굴뚝 통풍관보다 더 높이 솟은 헐벗은 나무 우듬지, 바람에 움찔 거리는 나뭇가지를 지켜보다가, 갈색 종이로 손을 뻗어 민스파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거의 반 시간 정도, 어쩌면 더 오래 그렇게 앉아서 여자가 한 말, 닮았다는 말을 곱씹어 보며 생각 속에서 불을 지폈다. 생판 남을 통해서 알게 되다니. - P98

다시 길로 나와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를 생각했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 P99

펄롱이 지금까지 데리고 있었던 일 꾼들은 다 괜찮은 사람들이었고 게으름 피우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사람한테서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한다고, 미시즈 윌슨이 말하곤 했다. 해마다 크리스마스에 딸들을 두 군데 무덤에 데려가 펄롱의 어머니뿐 아니라 미시즈 윌슨의 무덤에도 꽃을 놓게 하길 잘했다, 딸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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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장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타일이 깔린 복도를 따라 계속 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원장님, 저희 때문에 바닥에 발자국이 남았습니다." 펄롱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수녀원장이 말했다. "더러움이 있는 곳에 복도 있다는 말도 있죠." - P74

"딸이 다섯인가요, 여섯인가요?"
"다섯입니다, 원장님."
그때 수녀원장이 일어나 찻주전자 뚜껑을 열고 찻잎을 저었다. "그렇긴 해도 섭섭하겠지요."
수녀원장은 펄롱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섭섭하다고요?" 필롱이 물었다."어떤 게요?"
"이름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거요." 수녀원장이 심각하게 말했지만 펄롱은 그런 말을 오래 전부터 늘 들어와서 익숙했다. 펄롱은 몸을 살짝 뻗으며 신발 끝을 반들거리는 놋쇠 벽난로 펜더에 댔다.
"저는 제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았는데요. 그래서 안 좋았던 건 전혀 없습니다."
"그랬나요?"
"딸이라고 섭섭할 이유가 있나요?" 펄롱은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딸이었죠. 감히 말씀드리지만 원장님도, 또 원장님 식구, 제 식구들도 전부 마찬가지고요." - P76

"펄롱 씨 선원들이 이번 주에 시내에 왔었나요?"
"제 선원은 아니지만요, 저 부두에 화물이 들어왔었지요, 네."
"외국인들을 들이는 게 신경 쓰이지 않나 보네요."
"누구나 어딘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겠습니까." 펄롱이 말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요." - P80

그날 미사는 길게 느껴졌다. 펄롱은 딱히 열심히 참여하지 않고 멍하니 한 귀로 들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보았다. 강론 동안에는 눈으로 「십자가의 길」 성화를 훑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성모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나고, 두 번 넘어지고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히는 그림들. 축성이 끝나고 앞으로 나가 영성체를 받아야 할 때가 되었으나 펄롱은 벽에 붙어 서서 고집스럽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P89

펄롱은 벌떡 일어나 석탄통을 광으로 가져가 무연탄을 채우고 장작을 가지고 들어왔고 빗자루를 집어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그거 지금 해야 해?" 아일린이 말했다."이제 케이크 장식하려는데."
펄롱이 바닥에서 쓸어 담은 먼지, 흙, 호랑가시나무 잎, 솔잎을 스토브에 쏟아붓자 불이 확 타오르며 타다닥 소리를 냈다. 방이 사방에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뜻 모를 무늬가 반복되는 벽지가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펄롱을 사로잡았고 펄롱은 홀로 낡은 옷을 입고 어두운 들판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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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여기저기 기운 기다란 천 모양으로 내려앉았다. 구불구불한 도로에 차를 돌릴 만한 공간이 없어서 펄롱은 우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다. 그 길로 가다가 또 우회전 했더니 길이 더 좁아졌다. 또 한 번 우회전을 해서 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은 건초 창고를 지나다가 짧은 목끈을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숫염소 한 마리를 보았고 곧이어 조끼를 입은 노인이 길가에 죽은 엉겅퀴를 낫으로 쳐내는 모습이 보였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 P53

"오늘 뭣 때문에 화난 거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무슨 어려움 말야?"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강한 타격은 아니었으나, 그때까지 아일린과 같이 살면서 그런 말을 들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 P56

다음 날 아침 펄롱이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을 때 하늘이 이상하게 가까워 보였고 흐릿한 별 몇 개가 떠 있었다. 거리에서 개 한 마리가 깡통을 핥으며 코로 밀었고 얼어붙은 보도 위로 구르는 깡통이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벌써 까마귀들이 나와 줄줄이 앉아서 쉰 목소리로 짧게 악악거리거나 길고 유려하게 까아아아 울며 세상이 못마땅하다는 티를 냈다. 한 마리는 피자 상자를 뜯고 있었다. 종이 상자를 한 발로 누르고 미심쩍은 듯 쪼아대더니 피자 테두리를 부리로 물고 날개를 퍼덕여 후다닥 날아갔다. 어떤 녀석들은 말쑥하게 보였다. 날개를 접고 성큼성큼 돌아다니면서 땅 바닥과 주위를 살피는 모습이 뒷짐을 지고 시내를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젊은 보좌신부와 닮아 보였다. - P61

펄롱은 소박한 방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은 채 잠시 서서 머릿속 한편이 여기 이 집에서 저 사람을 아내로 삼아 사는 삶은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흘러가도록 두었다. 최근에 펄롱은 가끔 다른 삶, 다른 곳을 상상했고 혹시 그런 기질이 자기 핏속에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아버지도, 갑자기 불쑥 영국행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건 아니었을까? 삶에서 그토록 많은 부분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게 그럴 만하면서도 동시에 심히 부당하게 느껴졌다. - P64

이 위는 이렇게 고요한데 왜 평화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걸까?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 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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