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무엇을 하는지는 상관없어." 칼리는 언젠가 내게 말했다. "하지만 뭐든 하긴 해야 해. 그러지 않는다면 이게 다 무슨 의미야?" - P268
가끔 나는 칼리도 나와 같은 이유로 히메나에게 끌린 건지, 아니면 그녀에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마도 더 내밀하고 더 개인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건 히메나 얘기를 꺼내거나, 그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칼리는 대답을 얼버무리며 방어적이다시피 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둘이 가까워지고 있고, 우정이 쌓여가고 있고, 그 우정이 나와는, 혹은 히메나와 나의 우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 칼리와 내가 같은 사람과 독특한 우정을 맺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평행하면서도 별개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 P268
그날 밤에 발코니에 나가 앉아 있는 칼리를 보며 우리가 처음 여기로 이사했을 무렵 거의 밤마다 발코니에 앉아 있던 삼층의 나이 많은 부부가 생각났다. 그때는 우리 둘 다 삼십 대 초반으로 이 건물의 젊은 부부에 속했지만, 이제 칠 년이 지났으니 바로 우리가 그런 인간 화석으로 보일 게 분명했다. 당시에는 우리가 이렇게 긴 시간 뒤에도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도 번듯한 집 하나 없이 제자리에 정체되어 있으리라고는, 아이도 낳지 않고 안정적인 직업도 없이 살고 있으리라고는. - P270
"뭐, 이름은 에벌린이야." 칼리는 술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알아? 걔는 이제 그 망할 놈의 인턴이 아니란 말이지." 가끔 나는 칼리가 이러는 모습을 보면 슬퍼졌다. 따지고 보면 사실 진짜 문제는 그 여자가 아님을 나는 알기 때문이었다. 칼리를 정말로 괴롭히는 건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고, 그것을 그 여자에 대한 온갖 미움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 P273
"내가 이미 한 번 해고된 적이 있어서 그래." 칼리는 나중에 소파에 함께 앉아 있을 때 말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아니까, 내게 무슨 얼룩이 묻은 것만 같아. 회사가 날 다시 채용하긴 했지만, 작년에 봉급도 아주 조금 올려주긴 했지만, 아직도 그건 빌어먹을 얼룩이라고." - P273
그날 밤에 칼리는 딱히 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우리는 함께 조용히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언제 쯤인가 밖에서 개 짖는 소리에 잠이 깼는데, 칼리가 측면 발코니에 혼자 나가 달빛에 몸이 은색으로 물든 채 앉아 있었 다. 칼리는 헤드폰을 끼고 제 몸을 팔로 감싼 채 앞뒤로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한참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를 모으고 앞으로 웅크린 뒷모습이 얼핏 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 P276
칼리는 그날 오후에 남부 지역의 소규모 미술관에서 열리는 자선 행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나는 칼리가 돌아오기 전에 둘이 먹을 저녁을 준비하고 아파트를 청소해놓기로 약속했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은 오로지 히메나가 떠나고 여기에 있지 않게 된다는 생각,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에 대한 생각으로만 가득차 있었다. 나는 복도에 선 채 내 두 손을 내려다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 P280
〈아랴야〉의 다른 특징. 다큐멘터리이지만 다큐멘터리 같지 않다. 허구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 든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생겨나는 것과 비슷한 시적인 느낌, 분위기가 있다. 지역의 소금 광부들이 연기하는 등장인물이 있고, 실험적인 형식과 구조를 사용한다. 베나세라프는 이 영화를 완성한 뒤 베네수엘라의 여러 영화 및 문화 기관에서 수장을 맡았으나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베나세라프가 이후에 그 걸작을 촬영했던 섬으로 다시 돌아간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히메나는 그렇다고, 여러 해가 지난 뒤 다시 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는 거기 살면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라진 후였어요. 남은 건 유령 도시뿐이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난 그런 생각은 하기 싫어요." 히메나가 말했다. "그냥 영화 속 모습 그대로 기억하고 싶어요." " 왜?" "왜냐면," 그녀는 말했다. "영화의 끝부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은 모른다고요. 그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을 찾을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잖아." 나는 말했다. "알아요." 히메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영화 끝부분에서는, 그러니까 아직 아무도 그걸 모르잖아요." - P281
나중에 우리는 그것을 우리 인생에 불쑥 끼어든 막간극이라 불렀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가지 이름을 붙였다. ‘히메나가 아래층에서 살던 그 엉망진창 시절‘ 혹은 ‘그 아무개가 늘 옆에 있었던 이상한 날들‘과 같은. 하지만 한동안 우리는 히메나가 그리웠다. 대학 신입생이 처음 몇 주 동안 부모를 그리워하듯이 히메나를 그리워했다. 히메나가 우리 옆에 있다는 것, 우리 둘만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 때 느꼈던 위안을 그리워했다. - P285
나는 칼리와 함께 발코니에 앉아서 히메나가 자신의 예술에 대해 말하는 오디오 파일을 재생했다. 히메나는 아직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실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그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소리가 왜곡되고 지직거렸지만 여전히 분명한 히메나였다. 난 타인이 내 예술작품과 교감하기를 희망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히메나는 말했다. 난 무언가를 만들 때마다 나를 둘러싼 가까운 공동체를 생각해요······ 내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은 자기 작품을 지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심지어 작품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히메나는 조용히 말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 P286
"있잖아." 얼마 후 나는 칼리와 손가락을 엮은 채 먼 곳의 건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끔 난 우리가 어디로 갔었나 의문이 들어, 칼리." "무슨 뜻이야?" " 모르겠어." "우린 아무데도 안 갔어." 칼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 나는 칼리를 보았다. "하지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잖아." 내가 말했다. "가끔은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매달려 너무 애쓰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어. 알아? 그걸 놓아버리기가 너무 힘들어." 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사실 넌 그다지 다르지 않아." 칼리가 말했다. "우리 둘 다 그래." - P287
"정말로 네가 예전과 그렇게 다르다 고 생각해?" "모르겠어." 나는 말했다. "어쩌면 참을성이 더 많아졌겠지. 나 자신에게 거는 기대는 확실히 낮아졌고." "자신에게 더 관대해졌다고 생각해?" "아니." 나는 말했다. "그냥 기대가 낮아진 것뿐이야." 칼리는 빙긋 웃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어떻게 우리 둘 다 히메나에게 그리도 이끌렸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사실도. - P288
히메나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는 정말로 모르겠다. 우리가 함께한 그 시간에서. 자신의 아파트에서 보낸 그 길고 나른한 날들에서. 어쩌면 딴생각을 하게 해줄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거실에 타인의 몸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는지 모른다. 나는 너무도 오래 칼리와 함께 지냈기에 가끔 잊고는 했다. 독신일 때는 그것만으로도, 같은 공간에 누군가가, 타인의 몸이, 얘기를 나눌 다른 인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 P288
"그럼 당신은 여태 여기서 지냈어요?" 답이 자명한 질문이겠지만 한 번도 정식으로 물은 적이 없다는 것을, 그녀가 집에서 나갔는지 아닌지 내가 모른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네." 앙투아네트는 말했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 있는다고 더 슬프진 않아요. 그럴 것 같았는데 아니에요. 오히려 대니얼과 더 가까이 있는 기분이 들어요. 아직도 그이 옷을 입고 잘 때도 있어요." - P300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저 슬픔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정신적 외상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나는 성격상 그것에 대해 말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편이었지만 타냐는 훨씬 더 내향적이고 안으로 숨어드는 사람이었다. 타냐의 성정은 주위에 벽을 쌓고 담요를 누에고치처럼 둘둘 감은 채 소파 위에 누워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니얼의 실종 이전에도 우리 사이는 이미 벌어지고 있었기에 나는 문제가 더 악화될까봐 걱정스러웠다. - P304
내 나이 사람들은 그 시절을, 1990년대 초반의 오스틴을 향수에 젖어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마치 1920년대의 파리나 1960년대의 버클리를 얘기할 때처럼. 하지만 때로는 정말로 그런 곳들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우리는 우리가 매우 특별한 곳에서, 이 지역 역사의 매우 특별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그리고 그 시기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그 시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오스틴은 우리 유년기의 오스틴, 혹은 대학과 대학원 시절의 오스틴과도 닮은 데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곳에 갈 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니얼이 말하던 ‘4월의 마지막 나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니얼이 읽었다는 어떤 시의 구절인데 시인의 이름은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 P310
"대니얼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뇌가 끝없는 생각의 고리에 걸려버린 것 같은데, 그걸 끊어낼 수가 없어." "책을 좀 읽어보면 어때?" 내가 물었다. "텔레비전을 보는 건?" "텔레비전에 죽음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줄 알아? 아는 사람이 죽기 전까지는 그걸 깨닫지 못하지. 그러다 누군가를 잃고 나면 사방이 온통 죽음이야. 잊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것을 일깨우지 않는 방송을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어." - P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