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두어 달만 머물면서 두 친구가 식당을 궤도에 올릴 때까지 도울 계획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두어 달이 두어 해가 되고, 두어 해는 이십 년이 되고 말았다. 그 생각을 되도록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어쩌다 생각에 빠져버리면 이따금 무서워진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 P95

그때 리베카는 아직 버티고 있었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믿으려 했다. 여러 해가 흐른 뒤에도 가끔 그녀의 눈 속에 얼핏 스치는 그 시절의 다른 자아는 라인벡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는 순간 희미해지기 시작해 소도시를 하나씩 지날 때마 다 점점 더 흐릿하게 멀어지곤 했다. - P111

내 침대 밑에 있는 앨범에는 대학 시절부터 뉴욕 생활 초기 몇 해 동안 우리 셋을 찍은 오래된 사진들이 가득하다. […] 이삼 년 전이었나, 마지막으로 앨범을 봤을 때 우리가 너무 달라 보여서, 그때는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진을 넘겨볼수록 점점 슬퍼지다가 어느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었고, 그래서 앨범을 치워야 했다. 그뒤로는 한 번도 들춰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앨범에는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맥두걸 스트리트에 있던 내 아파트에서 셋이 함께 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진이다. […] 모두가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얼마나 추운지 보여주려고 입김을 불고 있고, 우리의 숨결은 안개처럼 공기 중에 서린 채 멈춰 있다. 그 사진의 재미있는 점은 맥두걸 스트리트의 그 오래된 아파트가 겨울에 얼마나 추웠는지는 기억이 나지만—난방장치가 늘 고장났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그 사진을 누가 찍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궁금해진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을지, 그런 사소한 기억들이 얼마나 많이 지워져버렸을지. - P125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지—오스틴 이주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지—두 주가 지났고, 때로는 이 시간의 기억 역시 지워질지 궁금해진다. 라인벡에서 보내는 우리의 마지막 날들의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지. - P126

잠자리에 들기 전에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새로운 음성메시지 두 통이 와 있다—하나는 리베카에게서, 다른 하나는 데이비드에게서. 지금 확인할 수도 있고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지워버리고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P127

하지만 그래도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 예전에 뉴욕에서 우리 모두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청춘이던 그때, 나는 늦은 저녁에 대개는 다른 친구들과 저녁 내내 술을 마신 뒤 둘의 아파트에 들르곤 했다. 86번가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그들의 아파트 건물 가장자리가 보이면, 두 사람이 아직 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늘 어떤 긴장된 설렘을 느꼈다가, 아파트 이층의 불 켜진 창문이 마침내 보이면서 그들이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찾아오던 그 편안함. 그 때는 그저 소박한 일상 같았지만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건물 아래쪽 입구로 걸어올라가 초인종을 울리면 몇 초 뒤 둘중 하나의 얼굴이 창문에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고 웃으며 올라 오라고 손짓할 때의 그 기대감을, 그런 다음에는 인터컴으로 방금 와인을 땄다고, 빨리 들어오라고, 바깥은 너무 춥지 않냐고 말하던 둘 중 하나의, 대개는 리베카의, 그 목소리를. - P127

흐릿한 조명으로 밝힌 방안에는 스파이더맨 포스터, 이언이 어린이집에서 그린 아름다운 그림,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힌 삼촌과 이모, 고모, 조부모가 보낸 엽서 등이 가득했다. 이 아이는 좋은 삶을, 내 유년기보다 훨씬 수월한 삶을 살아왔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두 부모가 있었다. 친구도 많았다. 너른 뒷마당도 있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교육도 받았다. 그런데도 아이에겐 어쩐지 슬픔이, 불행이, 불만족이 있었다.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 P153

어쩌면 이언은 이런 불행을 내게만 내보였는지도 모른다. 내 잘못이라고, 나 때문에 자기가 이렇다고 알려주기 위해. 아니면 그보다 훨씬 단순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저 자기가 뽑은 패에, 자신에게 주어진 아버지에게 실망한 건지도. 아이가 가장 원한 건 그저 다른 삶이었는지도. - P154

"아빠는 뭘 하고 있었어?" 이언은 말했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자기가 물에 빠진 순간, 혹은 그전 오 분이나 십 분 동안, 자신이 튜브나 다른 구명 장비 하나 없이 에어매트 위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육아 블로그를 드나들며 헛소리나 지껄이는 나. 육아 지침과 육아 조언 칼럼을 집착적으로 읽는 나. 그 순간 나는 미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 일 말고 무엇을 하고 있었나? 나는 식음료 테이블 앞에 있었지만 내 정신은 어디에 있었나? 대체 무엇에 집착하고 있었기에 바로 그 특정한 순간에 부모로서 단 하나의 주요한 책임, 내 아이를 살린다는 책임을 잊어버렸나? 그때를 돌아보려 했지만—바로 그 순간에 내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해봤지만—솔직히 기억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물 위의 햇빛, 순간적인 번뜩임, 밝은 섬광뿐,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 P158

가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삶의 이런저런 불안 때문에 뒤척일 때면 내 바로 밑에 있는 그 상자를 생각했다. 폴과 일레인의 삶을 이루던,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서 빼앗은 그 작은 조각들, 그 하찮은 상징물들, 그 기묘하게 개인적인 장신구와 증표들, 시기나 분노 때문에, 혹은 두 가지가 뒤섞인 감정으로 말미암아 무단으로 취해 내 것으로 만든 그 사소한 기념품과 정표를 생각했다. 그 상자를 떠올리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내가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 P168

"부모가 되면 사람이 바뀐다 어쩐다. 다들 얘기하잖아요." 린지가 말했다. "뭐, 물론 그렇긴 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흔히 떠올리는 변화와는 다를 뿐이죠. 뻥 뚫린 마음이 채워진다거나 하진 않아요. 무언가를 해결해주진 않죠. 그저 달라질 뿐이랄까요? 때로는 더 좋게, 때로는 더 나쁘게.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전과 다르게." - P181

"어쨌거나," 린지가 물잔을 들며 마침내 말했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을 하자면, 이 연구 결과가 진실이라 해도 —진실이라는 말이 아니에요—만약 그렇다 해도 중요하진 않아요. 일단 아이를 갖게 되면 그 아이가 없는 상황은 상상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행복이라는 논제는 뭐랄까, 좀 무관하죠." - P183

그날 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노래를 몇 곡 들은 뒤 리아가 다시 〈Thirteen〉을 틀어달라고 했다.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내용인지 알아?" 내가 물었다.
"우리에 관한 거야."
"우리?"
"아빠가 날 학교로 데리러 올 때, 우리가 함께 수영장에 갈 때, 그런 얘기."
나는 내 아버지가 내게 했을 법한 방식으로 리아의 오류를 바로잡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노래가 리아에게 그런 의미라면 그 의미가 맞았다. 내가 뭐라고 그걸 망가뜨리나? - P215

"난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알렉시스가 말했다.
"뭘?"
"이거." 알렉시스는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당신이 나와 결혼한 이유라는 걸 알아. 당신은 이걸 좋아해."
나는 아내를 밀어내고 부엌으로 물을 가지러 갔지만, 그 순간의 기억은 내내 나를 떠나지 않았다. 마치 아내가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았던 우리 사이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정통으로 찌른 것 같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녀의 어떤 측면에 나는 또한 이끌린다는 사실을. - P226

그때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우리가 다른 단계로, 좀더 깊은 단계로, 끝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저멀리 마당 끝자락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그곳 어둠 속 어딘가로 그들이 돌아 왔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세탁실 벽 주위를 느린 동작으로 선회하며 아마도 그 숫자를 점점 불려가고 있을 그들이. - P230

다른 모든 면에서 히메나는 무척 확신이 강하고 침착한 사람 같았지만, 예술에 관해 얘기할 때는 갑자기 모호해지고 작아지고 수줍어졌다. - P249

그해 봄에는 나이들어간다는 것을 한층 실감했다. 물론 거울을 보면 바로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도 느꼈다. 예컨대 슈퍼마켓에서 젊은이들 사이를 걷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의식하거나 쳐다보지 않았다. 가장 큰 슬픔은 바로 그런 인정의 부재에서 왔던 것 같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 현실, 유령이 되어 세상을 살아나가는 현실이었다. - P267

히메나는 젊었고,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고, 나를 바라봐주었다. 아마도 그 눈길에 연애 감정은 없었겠지만—나 역시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진 않았다—같은 인간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두려움과 후회에 휩싸인 채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 애쓰며 이 땅 위를 걷는 사람으로서 나를 바라보았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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