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불행으로 인한 술꾼‘이 되는 게 두려웠다. 그러니까 우리 현에서 많이 보이던 그 구제불능의 술꾼 말이다. 내 주변에는 두서넛의 구제불능의 술꾼 말고는 이웃사촌 조차 없었는데, 주정뱅이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부분이 딸꾹질과 한숨 소리로 채워졌다. 혼자 있는 편이 차라리 더 견딜 만했다. - P37
남편 분은 늘 장난을 칩니다, 백작 부인. 실비오가 그녀에게 대답했소. 한번은 장난삼아 제 따귀를 치더니, 여기 이 모자엔 장난삼아 총알 자국을 냈고, 지금도 장난삼아 저를 비껴 쏘았습니다. 이쯤 되니 저도 장난을 치고 싶어집니다만... 이 말을 하면서 그는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려고 했지요... 그녀의 눈앞에서 말입니다! 마샤는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일어나요. 마샤, 부끄럽지도 않소! 나는 격분해 소리쳤지요. 이 양반아. 가엾은 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쏠 건가 말 건가? 쏘지 않겠네. 실비오가 대답했소. 나는 만족하오. 당신이 당황하고 겁먹는 모습을 본 걸로 만족해. 당신이 나를 쏘게 만들었으니 이걸로 되었소. 나를 기억할 테지. 당신의 양심에 당신을 맡기겠소. - P48
준비는 끝났다. 삼십 분 후면 마샤는 부모님 집과 자기 방, 고요한 처녀 시절의 삶을 뒤로 남긴 채 떠난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바람은 울부짖고, 덧창은 흔들리며 덜컹거렸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협박처럼, 슬픈 전조처럼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 전체가 조용해졌고 모두 잠이 들었다. - P58
교훈적인 경구는 우리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마땅한 근거를 생각해내지 못할 때 놀라울 정도로 유익한 법이다. - P68
마리야 가브릴로브나는 그에게 각별했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는 생각에 잠기는 평소 모습 대신 생기가 돌았다. 마샤가 그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시인은 아마 이렇게 말했으리라.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P72
"댁의 장사는 어떻습니까?" 아드리얀이 물었다. "허, 그게 참" 슐츠가 대답했다.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하다고 해두겠습니다. 물론 제가 파는 물건은 선생님의 것과 다르지만 말입니다. 산 사람은 장화 없이도 산다지만 죽은 사람은 관 없이는 살지 못하잖습니까." "딱 맞는 말이군요." 아드리얀이 한 마디 거들었다. "하지만 산 사람이야 장화 살 돈이 없으면 맨발로 다닐 테니 댁이 화가 날 일은 없지요. 그런데 죽은 거지는 공짜로 관을 가져간다오." - P89
"날 모르겠나, 프로호로프?" 해골이 말했다. "퇴역 근위 중사 표트르 페트로비치 쿠릴킨을 기억 못하나? 1799년 자네가 처음으로 관을 판 사람 말일세. 게다가 그때 소나무 관을 참나무 관이라고 속였잖나?" 이렇게 말하면서 망자는 그를 포옹하려고 뼈만 남은 팔을 활짝 벌렸다. 그러나 아드리얀은 비명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해 해골을 밀어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 쿠릴킨의 해골은 휘청거리다 쓰러져 산산조각이 났다. 망자들 사이에서 분노와 불평이 일었다. 모두들 동료의 명예를 위해 들고 일어나서 욕설과 비난을 퍼부으며 아드리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고함 소리 에 귀가 먹먹해지고 압사당하기 일보 직전에 처한 가엾은 집주인은 넋을 잃고 퇴역 근위 중사 쿠릴킨의 뼈 무더기 위로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 P99
지금에 와서는 이도 저도 다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계급순‘이라는 모두에게 편리한 법칙 대신, 가령 ‘세상은 지혜순‘과 같은 다른 법칙을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별의별 꼴같잖은 말다툼이 벌어질 게 뻔하지! 게다가 하인들은 어떤 분부터 먼저 음식 접시를 날라야 하겠는가? - P109
나는 초라하지만 말끔히 정돈된 그의 거처를 장식하고 있는 여러 장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돌아온 탕자에 관한 그림이었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실내모와 실내복을 입은 덕망 있는 노인이 들떠 있는 청년을 배웅하고 있었는데, 청년은 부친이 주는 축복의 말과 돈 꾸러미를 급하게 챙기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에는 젊은이의 방탕한 행동이 생생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는 거짓 친구들과 수치를 모르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다음 그림에는 돈을 탕진한 청년이 돼지치기가 되어 삼각 모자와 누더기를 걸친 채 돼지 밥을 같이 먹고 있었는데, 얼굴에 깊은 수심과 후회가 가득했다. 종국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똑같은 실내모에 실내복을 입은 선량한 노인이 아들을 마중하러 뛰어간다. 탕아는 무릎을 꿇고 있다. 저 멀리 요리사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있고 장남은 하인에게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이유를 묻는다. 그림에 어울리는 독일어 시구가 밑에 적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모조리 다 읽었다. - P110
겉모습만 보고 던진 농담 몇 마디가 그들의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가장 중요한 ‘성격의 특징‘ 즉 ‘개성(individualite)‘ 같은 것 말이다. 장 폴(독일 낭만주의 작가로 본명은 프리드리히 리히터)은 이것이 없다면 인간 존재의 위대함 또한 없다고 말했다. 수도의 여인들은 어쩌면 최상의 교육을 받았겠지만, 사교계의 관습이 곧 그들의 개성을 말끔히 다림질하며 마치 모자처럼 그들의 영혼을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런 말로 타인을 재단하고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어느 고대의 주석가가 썼듯이 Nota nostra manet(우리의 주석은 유효하다)인 것이다. - P141
리자는 조용히 농노 아가씨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나스챠에게 귓속말로 미스 잭슨에게 전할 말을 일러두고는 뒷문으로 나가 텃밭을 가로질러 들판으로 뛰어갔다.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며 환하게 밝았고 황금빛 구름 행렬은 마치 군주의 알현을 대기 중인 신하들처럼 태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청명한 하늘, 신선한 아침 공기, 이슬방울, 한 줄기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가 리자의 마음에 어린애다운 명랑한 기운을 가득 불어넣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그녀의 행보는 걷는다기보다 날아가는 듯 보였다. 아버지 영지 경계에 있는 숲 가까이 이르렀을 때, 리자는 소리를 더 죽여가며 걸었다. 그녀는 여기서 알렉세이를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심장은 세차게 뛰었는데 왜 그런지는 본인도 몰랐다. 하지만 젊은 시절 우리들의 철부지 장난에 수반되기 마련인 두려움이야말로 그 장난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한 것을. - P148
늙은 지주 베레스토프는 제복을 입은 무롬스키 집안의 하인 둘의 부축을 받으며 현관 계단을 올랐다. 뒤이어 말을 타고 도착한 그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식사가 이미 다 차려져 있는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리 이바노비치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하게 이웃 지주를 대접했고, 식사 전에 정원과 사육장을 구경하자면서 정성껏 쓸고 닦아 모래로 덮은 오솔길로 안내했다. 늙은 지주 베레스토프는 속으로 이다지도 쓸모없는 취미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생각 했지만 예의상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아들은 구두쇠 지주의 불만에도, 허영기 많은 영국광의 열의에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소문으로만 숱하게 접한 집주인의 딸이 등장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비록 그의 마음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미 꽉 차 있었지만, 젊은 미녀는 언제나 그의 상상력을 자극할 권리를 가진 법.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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