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뭔가 놓치고 있다거나 뒤처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보통 그런 느낌은 곧 사라졌다. 가끔 클레어몬트에 사는 부모님이 전화를 걸어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지 정했느냐고. 혹은 내면의 진취성을 북돋아줄 수 있는 책을 보냈는데 잘 받았느냐고 물어도 쉬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내 일을 좋아했다. 내 삶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마야와 함께 있는 한 그저 그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다른 사람의 예술에 소소 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도 자신이 가는 길의 일부라고, 마야는 언젠가 내게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 P52

나는 잔을 내려놓고 마야를 바라보았다. 벌써 마야가 떠나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빛이 어딘가 달랐다. 아마도 그때가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내 인생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 P58

이런 점진적인 멀어짐은 그해 여름 내내 일어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그것을 물리적으로 감지했다. 이제 방안에는 다른 기운이, 다른 분위기가 흘렀다. 마야는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뒤쪽 배경 어딘가에서, 멀리 기차역 플랫폼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그날 밤 침대에 함께 누워 있을 때 마야가 내게 말했다. "내 말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이라도 해봤냐는 거야."
"해봤지." 나는 말했다.
"했다고? 정말?"
"당연하지." 나는 말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어." - P58

해가 지나는 동안 우리가 서로에게 자주 편지를 쓰던 시기도, 몇 달간, 때로는 일 년 넘게 아무런 연락 없이 지낸 시기도 있었다. 그 세월 내내 마야는 자신의 작품을 거론하거나 그림을 그만둔 이유를 말한 적이 없고 나도 묻지 않았다. 마야에게 그 시절은 단지 인생의 다른 부분인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나와 함께한 인생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현재의 인생과 다른 거라고. - P64

요즘은 예전처럼 마야를 자주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다가도 생각이 날 때는 라이어널의 스튜디오에서 그 수채화들을 발견한 날이 떠오르며, 그날 밤에 그랬듯이 지금도 그 누드화 속 인물이 정말로 마야였을까 궁금해진다.
그게 정말 마야였다면, 라이어널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직장에서 일찍 돌아온 마야가 그의 스튜디오에 들러 작은 목제 이젤 뒤에 앉은 라이어널 앞에서 옷을 벗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카페에서 일하던 그 오후에 그들은 무슨 대화를 했을까? 수채화 속 여자가 정말로 마야였다면, 아마도 라이어널이 주지 못했을 그 무엇을 그녀는 그에게서 얻고자 했던 것일까?
그리고 내게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이어널에게서 원했던 것과 같은 것일까? 마야와 나는 우리 인생의 두 해에 가까운 나날을 밤마다 나란히 누워 함께 잤는데 지금도 나는 내가 마야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궁금하다. 혹은 마야가 나를 진정으로 알았는지. - P64

"아까 강연에서 그 여자가 했던 말이 자꾸 생각나. 그거 있잖아,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그것이 진정한 자아와 맺는 관계를 기준으로 판단된다는 말, 그리고 진정한 자아와 조응하 는 행동이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는 말. 하지만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더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어떡하지? 자기 몸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면?" - P87

"그러니까, 내 몸이 더는 내 것이 아닐 때 진정한 자아는 어떻게 되느냐고." 내털리는 말을 이었다. "내가 옷을 입을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머리를 스스로 빗을 수 없게 되면?"
"당신,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나는 말했다.
"난 지금 굉장히 진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거야, 데이비드."
그런데 당신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잖아."
"듣고 있어." 나는 대답하며 아내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두려운 거야. 이해해. 나도 두려우니까."
"그런데 요점은 바로 그거야." 내털리가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나는 전혀 두렵지 않거든." - P88

그 모든 이후의 일들보다 더 생생히 기억나는 것은, 음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무대 위의 내털리를 보면서 위대함이란,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이란 이런 것임을 깨닫던 순간이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마치 몸의 연장인 양, 팔의 일부인 양 움직이던 활을 바라보던 기억, 공연중 이따금 눈을 감고 자기 안으로 사라지는 듯하던 내털리, 오르내리는 박자에 맞춰 호흡도 빨라졌다가 느려지고, 어떤 순간에는 꿈이나 무아지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환히 밝아지던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 내밀하고 황홀한 느낌에 취해 나는 내털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공연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공연장에 불이 켜지고 객석의 청중 모두가 기립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모두가 계속 선 채로 몇 분 내내 박수를 치던 장면이 기억난다. - P90

나는 최근에 내털리가 겪는 증상—어지럼증과 균형감각 이상—을 생각했다. 두 가지 다 파킨슨병과 연관된 증상이라는 사실을 우리 둘 다 알고 있고 의사도 ‘염려스럽다‘고 인정했다. 주초에 의사는 검사—혈액 검사 몇 가지와 MRI—를 더 해보자며 내털리를 불렀고 이제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달을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계속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이 회색 지대를 부유하면서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채로 모든 결과를 조마조마 걱정하고, 혼자 있는 순간에는 요즘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어떤 느낌을 견디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몸이 엄청나게 허약하며, 갑작스럽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우리를 배반할 수도 있다는 느낌이었다. - P92

그때 나는 스튜디오로 조금 더 가까이, 하지만 내털리는 나를 볼 수 없을 만큼만 가까이 다가갔다. 맨발 아래 시원한 땅이, 등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당에 짙은 어둠이 깔려 강렬하게 빛나는 스튜디오의 조명 외에는 온통 캄캄했다. 나는 더 다가갔다. 내털리가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어깨를 늘어뜨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손을 흔들거나 이름을 부르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털리가 나를 볼지, 이번 한 번만이라도 문으로 다가와 나를 안으로 들여줄지.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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