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는 폴을 침대로 데려갔고, 그는 3분 만에 잠들었다. 의식이 회색 구름에서 벗어난 후 처음으로 밤새도록 깊이 잠들었고, 처음으로 꿈을 전혀 꾸지 않았다. 꿈은 깨어 있는 동안 실컷 꿨으니까. - P218
‘깜빡했구나, 그렇지? 깜빡한 거야. 저기 저 빌어먹을 2월 달 달력을 넘기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분기별 재산세 납부를 잊어 먹은 것은 달력 넘기는 거 잊어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고, 너는 지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어. 이런 큰일을 잊어 먹은 것은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애니, 사실 너는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그렇지? 매일같이 조금씩 나빠지지. 정신병자들은 세상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어. 너도 잘 알테지만 때로는 아주 지저분한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지. 그러나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정신병과 통제 불가능한 정신병 사이엔 경계선이 있단다. 너는 매일매일 그 경계선에 가까워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너도 마음속으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어.‘ - P259
"지금 우는 거야, 폴?" 손으로 뺨을 훑어보니, 물기가 있었다. 폴은 웃으면서 돈을 건넸다. "약간.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 음, 많은 사람들이 너의 진면목을 오해하지만······ 나는 잘 알아." 애니가 눈을 반짝거리고 몸을 앞으로 숙여 부드럽게 폴의 입술을 만졌다. 폴은 애니의 숨결에 들어 있는 어떤 냄새를 맡았다. 내면의 어둡고 음산한 방에서 새어 나오는 냄새, 죽은 생선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 걸레의 맛과 냄새보다 1000배는 더 끔찍했다. 그 냄새는 애니의 음산한 숨결이
[…]!
지옥에서 불어 온 더러운 바람처럼 목구멍 속으로 불어 닥쳤던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렇지만 폴은 웃어 보였다. - P266
하지만 그 무엇도 글쓰기를 망쳐 놓지 못했다. 창작 활동이라는 것이 으레 상처받기 쉽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그도 지금 기분으로는 글쓰기를 망치게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온 인생에서 글쓰기는 항상 가장 강인한 일이었고, 가장 끈질긴 일이었다. 그 무엇도 꿈으로 가득한 열정의 우물을 오염시킬 수는 없었다. 술도, 마약도, 고통도. 이제 폴은 황혼녘이 되어서야 물웅덩이를 발견한 목마른 짐승처럼 꿈의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 물을 들이켰다. 물을 마시고 종이에서 구멍을 찾아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멍 속을 탐험했다. - P271
매일 오후가 되면 애니는 폴을 커다란 파란 담요로 둘둘 말아 머리에 녹색 사냥 모자를 푹 눌러 씌우고 휠체어를 밀어 뒤쪽 현관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럴 때마다 폴은 몸의 소설을 들고 갔는데, 거의 읽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운 경험이어서 다른 데 별로 신경 쓸 수 없었다. 뒤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폴은 솔직히 말해 병실이나 다름없는 침실의 퀴퀴한 실내 공기 대신 달콤하고 상쾌한 공기를 맘껏 마셨고, 고드름이 녹아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구름이 만든 그림자가 눈이 녹는 벌판을 천천히 흘러가는 광경을 감상했다. 그중에서 구름 벌판 구경이 제일 좋았다. - P280
폴은 작가 에드먼드 윌슨이 어떤 수필에서 그만의 투덜대는 어투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인 워즈워스가 내세운 좋은 시를 판단하는 기준, 곧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중에 일어난 강력한 감정의 폭발이라는 기준이 대부분의 극적 소설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옳은 말이지 싶었다. 폴은 결혼 생활의 위기 같은 일을 겪고 난 다음에 글 쓸 능력을 상실한 작가들을 알고 있었고, 그 자신도 기분이 엉망일 때는 대개 글을 써 내려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반대 결과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 직업인 탓에 의무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기분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쓰기에 몰입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은 대개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원인을 폴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일어났다. - P283
"쥐 심장 뛰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도망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이렇게 처절해! 우리랑 똑같아, 폴. 이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야. 우리는 스스로 아주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쥐덫에 걸린 쥐만큼이나 아는 게 없어. 등이 부러진 쥐가 살고 싶어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것 좀 봐." - P288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본격적으로 축제를 즐기기 사오 년 전의 불안한 정세 속에서 독일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유태인 대학살에서 할아버지와 고모를 잃은 번스타인에게 폴이 말했다. 독일에 살던 유태인들이. 유럽 다른 데도 아니고 특별히 독일에 살던 유태인들이,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왜 해외로 도피하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은 대체로 바보가 아니었고, 대다수가 독일 사회에서 직접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분명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독일에 그대로 머물렀을까? 번스타인의 대답은 폴에게 하찮고 잔인하며 이해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들 대부분이 피아노를 갖고 있었어. 우리 유태인에게 피아노는 꼭 필요한 생활의 일부야. 피아노를 가지고 있으면, 이사를 결심하기가 힘들지."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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