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은 힘들었다. 같이 나동그라져 누워 있기도 했다. 추수가 끝난 벌판도 하얗고 먼 산도 하얗고 하얀데 길은 멀었다. 아버지는 가끔 정신이 들면 물었다.
"힘들지?"
나는 대답했다.
"아니."
아버지가 빚쟁이들에게 멱살을 잡히는 것을 본 후로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 P83

내 업무는 분석하고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가끔 학술 자료가 필요하면 미리 전화를 하고 학교로 찾아갔다. 친구가 강사로 있는 대학에 자료를 구하러 갔다가 남자를 만났다. 남자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어졌다. 그와 휴일에 만나서 북한강을 보러 갔다. 차를 길가에 세우고 강물을 보면서 웃었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커다란 느티나무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팔랑이며 우우 노래를 불렀다. 그가 휘파람을 불자 바람이 강 위로 달아났다.
[…]
피로연에서 술을 마셨는데 얼굴만 창백해졌다. 그의 말이 기억났다.
‘꿈이 뭡니까?‘
신랑 신부가 여행을 떠나고 2차 피로연에서 처음으로 혀가 꼬였다. 친구들이 술주정을 하는 내가 귀엽다고 웃어댔다.
돌아오는 길에 술이 깼다. 소주를 사서 집으로 들고 갔다. 늦었지만 그의 질문에 혼자 대답했다.
‘내 꿈은 평범해지는 겁니다.‘
아버지의 꿈도 평범해지는 것이었다. 아버지처럼 길에 쓰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없어야 한다. - P84

오전 강의만 있는 날은 일찍 돌아와 가끔 그의 방에 들어갔다. 방문이 닫혀 있었지만 잠근 상태는 아니었다. 그의 책장에서 책을 집어 방으로 갖고 와서 읽었다. 연필로 밑줄 친 문장은 더 유심히 보았다.
‘진실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선 진실에다가 반드시 거짓말을 덧대야 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이었다.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밑줄도 기억한다.
‘사랑해서 하는 결혼은 불행하다.‘
책을 다 읽고 그가 줄을 친 까닭을 이해했다.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에 없는 그가 가끔 궁금했다. 경영학 전공이라는데 문학과 사상집이 많았다. 무엇을 꿈꾸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타인의 사유가 거기 있었다. - P86

망설였던 책 몇 권이 또 생각나서 한밤중에 그의 방으로 갔다. 낮에 보았던 방과 어딘지 달랐다. 까치발로 맨 위 책장의 책을 꺼내는데 책이 움직였다. 누군가의 손이 내가 책을 잡기 편하도록 밀어주고 있었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흐느껴 울면서 책을 집어들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 P87

베토벤은 수녀원의 사택에서 나를 기다렸고 봄날의 버스 안에서 흐르던 나훈아의 노래는 담요처럼 따뜻했다. 파블로 카잘스는 술 취한 내 가슴에 구멍을 뚫었고 피아졸라는 한때 내게 있었던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꼬집힌 풋사랑‘은 주정뱅이 아버지였지만, 그리웠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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