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두 할머니가 집에서 맞닥트렸다. 그들은 각자 이름대로 말싸움을 했다. 강도귀달 씨는 귀신 두령처럼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가며 당신 아들이 내 딸을 고생시킨다고 퍼부었다. 그러자 조조간 씨는 조곤조곤 당신 딸의 팔자가 박복해서 내 아들이 더 고생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나는 두 할머니의 언쟁을 감동으로 바라보았다. 위대한 면서기들이 할머니들에게 주술을 건 것이었다. - P139
비록 크다 말았지만 쪼깐이는 총명하고 바지런했다. 허우대만 멀쩡하고 생활력 없는 한량 남편을 비웃었다. 조조간 씨는 첫날밤 혼인이 ‘나가리‘란 느낌에 어금니를 물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붙들고 사내놈에게 기대하면 안 된다는 대남성관을 주입시켰다. 우리 집안 여자들의 금과옥조인 ‘그놈이 그놈이다‘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인물 뜯어먹고 살지 못한다는 말씀도 부록으로 첨부되었다. - P141
진주 강씨 강도귀달 씨와 풍양 조씨 조조간 씨의 격돌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투쟁과 다름없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모두 할 말이 가득했다. 두 할머니 는 그때의 투쟁이 어떻게 격돌하고 소멸하였는지 다 내게 쏟았다. 왜냐면 두 할머니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조손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뒤에는 이름에 주술을 걸어준 진주와 밀양의 두 위대한 면서기가 있었다! - P150
‘불신의 힘‘으로 자수성가한 외증조부는 딸 둘에게 아무도 믿지 말 것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나라가 망한다는 의미는 권력이 바뀐다는 것에 불과했다. 어떤 놈이 권력을 잡든 자기 좋자고 하는 거지 국민을 위한다는 말은 개소리였다. 없는 놈은 있는 놈 걸 뺏으려 들고 있는 놈은 더 가지려 든다고 가르쳤다. 철저한 경제관념과 불신 교육 속에서 성장한 강또귀딸 씨는 냉소적이 되었다. 딸들에게 남긴 부친의 유언은 ‘목숨은 내놓아도 땅문서는 내놓지 말라‘였다. 거지로 빌어먹고 능멸당하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말씀이었다. - P151
강또귀딸 할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냉정했는데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 뒤를 따라다녔다. 성가셔하는데도 꽁무니에 붙은 나를 하루는 물끄러미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꾸준한 데가 있구나. 갑자기 다가와서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을 믿지 말거라. 그런 사람이 등에 칼을 꽂는 사람이다.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사람이란다." - P154
조쪼깐 할머니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던 밤 옆에 누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애비를 닮아 의리가 있고 외할미를 닮아 영악하구나.똑똑하면 사는 게 고달프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내가 두 할머니에게 배운 것은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절망도 없었다. 단지 힘이 들고 힘이 들지 않고의 차이였다. 두 할머니는 속으로 서로를 인정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두 여자 다 그 힘든 세상을 당차게 살아 낸 사람들이었다.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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