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피에트라달바의 뭔가를, 8월이니만큼 만약 창문이 열려 있다면 가지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 소리라도 포착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기다렸다. 하지만 종소리, 차임벨 소리, 포스타가(街)에서 경적을 울려 대는 자동차 소리 등 바깥의 소음이 나를 로마에 굳건히 묶어 두었다. 부스 안에서 사람들의,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서 우아하게 춤추듯 움직이는 속인과 성직자의 오고 감을 관찰하고 있자니 숨이 막혀 왔고, 수화기에 갖다 댄 귀가 축축해 졌다. - P346

「여보세요?」
살짝 쉰 듯하고 어쩌면 조금 더 낮은 듯하나, 어쨌든 그 목소리에 비올라가 통째로 들어 있어서, 피에트라달바가 여름의 열기와 태양 아래에서 지글거리는 들판의 향기를 몰고 전화 부스를 덮쳤다. 나는 부스 벽을 따라 몸을 미끄러뜨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올라, 나야.」
「알아.」
송진과 강렬한 기쁨과 두려움으로 묵직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 P347

여러 차례, 어머니를 보러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는 오만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고서 계속 그 계획을 미뤘는데, 일이 있어서, 거리가 멀어서, 그러다가 결국엔 이런 변명까지 했다. 모든 비용을 다 대주면서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제안까지 하지 않았던가. 진짜 이유는 빼놓은 온갖 그럴듯한 이유. 어머니가 우리 사이에 만들어 놓은 그 구렁, 1916년 이래로 삐죽삐죽한 가장자리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그 갈라진 땅을 건너기 위한 첫걸음을 먼저 내디뎌야 하는 건 어머니라는 생각이었다. - P352

피렌체에서 보낸 세월을 후회한다고 주장할 수 있으리라. 로마에서 보낸 세월은 더더욱 그러하다고. 내 영혼의 짐을 덜고, 스틱스강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능숙한 늙은 사공 카론을 구슬려서 보다 편안한 저승길을 보장받기 위해 그런 척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무가 나이테를 떨쳐 낼 수 없듯이, 나는 내 과거를 떨쳐 낼 수 없다. 피렌체와 로마는 여기, 기우는 햇살을 받으며 네 명의 수도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열에 들떠 투덜거리는 이 몸뚱어리 안에 들어 있다. 피렌체와 로마는 이 안에 있고, 나의 심장이나 신장 혹은 보나 마나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을 간이나 마찬가지로 뽑아낼 수가 없다. - P353

나는 평생을 본능에 따라 행동해 왔다. 그러니까 이성이 내 삶의 훌륭한 가늠자는 아니었다.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었고,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 P361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흘러간 8년이라는 긴 세월. 비올라는 더는 청소년이 아니었고 완전한 여자였다. 얼굴 윤곽이 더 확실해졌다. 그녀를 창조한 조물주의 둥근 끌이 몇 번 더 오가면서 아직도 드러나게 될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조차 없이, 비올라의 열여섯 살 적 얼굴이 완성된 형태에 도달한 거라고 맹세할 뻔했다. 비올라는 조각 교본이었고, 그런 만큼 멀리 떨어져서 지낸 8년 세월을 더욱더 후회했다. 한 해 한 해 드러나는 그러한 변화를 지켜보고, 어느 날 변화를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분석해 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 P362

비올라를 위해 조각했던 곰은 여전히 분수대 근처에 군림하고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면서 열여섯 살 미모의 선택 몇 가지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움직임은 생생히 드러났지만 과장됐다. 이제 나는 더 적게 보여 주면서 더 풍부하게 말할 수 있었다. - P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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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게 그랬듯이 내 친구들에게도 피렌체 시절을 미화해서 소개했다. 그러니까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발치사 저리 가라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 두 해를 담은 사진에서 비차로와 사라와 다른 친구들을 긁어냈다. 그들에 대한 기억을 잘라 내면서 내가 상처 입히고 있는 건 나 자신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벼운 자책감만 느꼈다.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열여덟 살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기를 원하지 않는 법이다. - P317

나는 거울을 좋아하지 않았고—내 외모 때문에—면도를 할 때조차도 가능한 한 거울과는 덜 마주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옳았다. 나는 잘 생겨서, 뜻밖에도 내 용모는 균형 잡힌 반듯함을 보였으며 눈에는 어머니가 내게 물려준 그 빛깔이, 거의 보랏빛 도는 푸른빛이 담겼다. 강인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체념을 배우지 못한 남자의 얼굴. 그것은 또한 우스꽝스러운 남자의 얼굴이기도 했으니, 체념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우리의 꿈들을 살해하는 수많은 죽음을 체념이 감내하게 하지 않는가. 뼛속까지 비에 젖고 험상궂은 모습으로, 오래전부터 시끄럽게 알려 대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나머지 이제는 그러한 패배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남은 남자. 나는 순진하지 않았다. - P324

나는 우리의 이야기에 이런 빈 구멍들을 만들어 냈다고 비올라를 원망했다. 티끌 한 톨 지나갈 틈 없을 정도로 우리 사이가 가까웠는데, 나를 밀쳐 내고 멀리 보내 버렸다고, 나는 그녀를 원망했고, 그렇다는 것을 그녀에게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떠나는 것 말고 다른 수단을 찾아내지 못했다. […] 비올라는 나의 그림자가 되었다. 나는 비올라에게 욕하고 격노했고, 그 애도 그곳에서, 겨울의 차갑고 짙은 안개가 밀려들면 오렌지에 서리가 내리는 그녀의 고원에서 똑같이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똑같은 격분한 몸짓, 똑같은 쓸데없는 비난. 우리는 둘 다 옳았고, 우리는 누가 누구의 거울인지 더는 알지 못했다. 스스로를 탓할수록 내가 스스로를 탓하게끔 만든 비올라를 더더욱 원망했다. 그 애가 사과하지 않는 한 다시 보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착실한 그림자로서, 그 애도 그쪽에서 나만큼 그러고 있을 터였고,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서로의 삶에서 빠져나왔다. 이 끔찍한 악순환, 이 희비극적 우로보로스가 그 뒤로 이어진 여러 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P330

나는 그 표정의 강렬함을 포착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나 역시 소중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예전에 본 적이 있으니까. - P335

드디어 나는 탐나는 존재가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침을 뱉으며 무시했고, 나는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평생 간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꼭 소유해야만 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말을 하나 배웠기 때문이었다. 아니요. 이 세 음절의 말이 갖는 권력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거절할수록, 심지어 차갑게 거절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의, 즉 오르시니 가문의 조각가가 만드는 작품을 더더욱 원했다. - P336

갑자기 모든 것이 전과 같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서약, 맞잡은 손, 불타는 화주를 조금씩 할짝거리듯이 차가운 공기를 받아들이던 그 겨울밤들, 그 밖의 모든 것. - P342

나는 곧 스물 한 살이 될 터였고, 이는 이전이 더 좋았다고 생각할 나이는 아니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리워하게 될 그 이전을 지금 살아 가고 있었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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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선로를 건너온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채 마흔 살이 안 된 아직 젊은 남자였지만, 나이보다 몇십 년은 더 되는 세월이 눈 속에 켜켜이 쌓였다. 이전에는 옷소매 안에 들어 있었을 튼튼하고 건강한 팔뚝은 사라지고 오른쪽 소매가 텅 비어 덜렁거렸다. 그는 전선에서 돌아왔고, 전쟁은 그의 육신에, 그 나이대의 남자에게는 뜻밖이라고 할 주름 속에, 그가 깨어 있을 때조차 몰려와 소용돌이치면서 그가 아주 미세하게라도 목을 움츠리게 만드는 악몽들 속에 깊이 박혔다. - P233

우리는 추위를 뚫고서 전차들과 애처로운 눈빛의 말이 끄는 마차들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걸으며 도시를 가로질렀다. 건물 하나하나가, 골목 하나하나가, 건물들이 일렬로 들어선 거리 하나하나가 나를 빨아들이는 바람에 갈지자가 된 나의 걸음걸이에 메티의 나무라는 시선이 꽂혔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열 가지의 아름다움의 형식과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서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교차로 하나하나는 매번 쾌락의 포기였다. 도시가 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이제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 로마의 위대함도, 베네치아의 마법도, 혹은 나폴리의 격정도 절대로 피렌체를 잊게 하지 못했다. 그곳은 이탈리아의 도시들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그냥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비올라는 더더욱. - P234

절단 작업, 그것은 지옥, 배의 화물창과 마찬가지여서 가장 보람 없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건물 전면에 사용될 대리석 외장재들을 다시 자르고 짜 맞췄다. 가끔은, 채석장에서 작업이 미리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조각에 쓰일 원자재들을 대강 다듬기도 했다. 메티는 그 지역의 가장 근사한 계약 중 하나를, 그러니까 두오모 성당 일부의 개보수 작업을 막 따낸 참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 그는 외지에서까지 사람을 고용했다. 구내식당에서는 정예 조각가들, 음식을 놓고 기꺼이 다툼을 벌이는 쾌활한 그들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절단 작업자들〉 사이의 대조가 선명했다. 조각가들이 아무리 오만하더라도, 실제로 오만했지만,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고 들지는 않았다. 절단 작업장은 거친 사내들, 전과자, 탈영병, 징집 회피자 등의 소굴이었고, 세상은 그런 모든 것을 하찮은 비열함이라고 여겼지만 사실 그런 비열함을 안고 살자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 P240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조각하는가가 아니야. 왜 그것을 하는가이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니? 그게 뭘까. 조각한다는 게?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돌을 쫀다〉라는 답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잖니.」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고, 나는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조각을 한다는 게 뭔지 깨닫는 날, 넌 단순한 분수대만으로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할 거다. 그동안, 미모, 충고 하나 하지. 인내해라. 이 강, 변함없이 고요한 이 강처럼 말이야. 이 강, 아르노 강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 P258

술이 잔뜩 오르면 그들 가운데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장엄하게 일어서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면 좌중은 조용해졌고, 드높이 솟아오른 오페라 아리아가 귀에 들려오면 우리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남자들은 노래를 불렀는데, 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런 밤이면, 바닥이 끈적이고 해적판 카루소의 노래에 취한 그 장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 그곳의 팔리아치오들은 진정 미치광이들이었고 돈 조반니들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노래하는 사람들 전부가 쉼 없이 사랑하고 살인을 저질렀으니까. - P260

나는 그에게 고갯짓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 사람도 나도 감정의 분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핍, 조여 맨 허리 띠와 함께 태어난 사람들로, 이런 환경에서는 감정조차 아끼기 마련이었다. - P270

우리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고, 으레 그러듯이 다시 보자는 약속을 했고, 그러고 나서 나는 역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이 벽 저 벽 부딪혀 가며 쌀쌀한 밤공기 속을 배회했다. 미래가 더는 그렇게 암울해 보이지 않았다. 술에 취한 자 특유의 낙관주의가 불안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새벽이 속살대기 마련인 저주에 재갈을 물렸다. - P271

그 순간 익숙한 향내를, 빵 반죽과 장미 와 땀이 뒤섞인 내음을 맡았다.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내가 엄마를 보지 못해도 자신은 나를 보고 있다고 속삭였다. 정향, 제라늄, 백단, 에델바이스, 아니스, 걱정과 슬픔 등 다른 향내도, 격노한 수많은 어머니, 혼령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어머니들의 향내도 떠돌았는데, 자신의 새끼가 학대당하는 일을 겪었던 그들이 내 곁으로 왔다. 잠시 뒤 의식을 되찾은 나는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
그래서 나는 내가 세상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가르쳐 줬던 가장 소중한 행위를 했다. 나는 일어섰고, 걸었다. - P272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쉰 살인데도 얼굴에는 태양과 추위와 다양한 방식의 학대에 의해 1백 년 치 모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에서 길어 올려 신선했다. - P274

「태어난 뒤로 우리가 하는 단 하나의 일이 바로 죽는 거란다. 아니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늦추려고 하거나.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온단다, 미모. 표현 방식이야 제각각일지라도, 그들 모두 겁에 질렸기 때문이지. 나는 카드를 뽑고 위로할 말들을 지어내. 그들 모두 올 때보다는 조금 더 고개를 쳐들고 돌아가고,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조금은 덜 두려워해. 그들은 그걸 믿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 P281

「네 차례가 되면, 물론 그때가 아직 멀었기를 바라지만, 내 말을 믿어, 너도 겁이 날 거야. 누구나 그러듯이, 겁이 날 거라고.」 - P282

그 시절에는 누군가를 신뢰하기가 힘들었지만, 특이한 명예 코드를 지닌 그 무뢰한들 사이에서만큼 편안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이제껏 없었다. 당신이 파시스트든 볼셰비키든, 가톨릭교도이든 무신론자이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경화에 딸기코에 불콰해진 얼굴의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었고, 밤이 출렁이는 한 새벽까지 서로를 붙잡고 그 시절의 풍랑에서 피신해 있었다. - P283

한 시간 뒤, 우리는 거리에 있었다. 눈은 이미 그쳤다. 달빛 아래 도시가 대낮처럼 반짝였다. 은밀한 슬픔으로 뱃속이 따끔거렸고, 우리의 걱정 없던 시절에서 솟아난 유령이 조롱하듯 자신의 쇠사슬을 흔들어 댔다. - P293

그 늙은 개자식이 왜 그런 행동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숙취와 숙취 사이에 솟구치는 딸꾹질처럼 올라온 인정의 찌꺼기일지도. 그런데 그를 닮은 주제에 그를 비난하다니, 나는 누구인가? - P305

바로 어둠 속에서 흥분이 끓어오르는 법이니까.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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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야 뭐라 할지 모르겠으나 열두 살의 슬픔이 아주 오래 가는 법은 없다. 내가 탄 기차가 무엇을 향해 덜컹거리며 나아가는지는 몰랐지만 내가 기차를 타본 적이 없다는 건 알았다—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든가.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전나무든 집이든, 뭔가를 응시하려고 하자마자 곧 사라져 버렸다. 풍경, 그건 움직이기 위해 생겨난 건 아니지 않은가. - P21

다행히도 나비가 있었다. 나비는 생미셸드모리엔에서 들어왔고, 줄지어 지나가는 산들과 나를 갈라놓은 유리창에 내려앉았다. 나비는 유리창을 상대로 잠깐 투쟁하다가 포기하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훗날 봄철이면 보게 될, 화려한 색채와 황금빛이 어우러진 영광스러운 자태를 지닌 아름다운 나비는 아니었다. 그저 회색빛에, 눈을 잔뜩 찌푸리고 보면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보잘것없는 나비, 햇살에 지친 자벌레나방이었다. 내 나이 또래 남자애들이 그러듯이 나비를 괴롭혀 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고, 그러다가 날뛰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차분한 요소인 나비를 응시하고 있으면 울렁거림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어떤 우호적인 힘이 보내 준 나비는 여러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그 덕분에 그 무엇도 정말이지 보이는 그대로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비는 나비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웅크린 거대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러한 깨달음은 몇 십 년 뒤에 최초의 원자 폭탄에 의해 확인될 테고, 어쩌면 그보다도, 죽어 가는 내가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의 지하 공간에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리라. - P21

원석 한가운데 숨어 있던 균열을 때리는 바람에 몇 주 동안 해온 작업이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았을 때처럼 말이다. 돌을 원망할 수는 없지 않은가. - P31

고향에 전기가 들어오기를 꿈꿨던 인제니에레 카르모네가 우리 동네 분위기가 얼마나 찌릿찌릿한지 보았더라면 황홀해했을 텐데. 두 사람만 스쳐도 매번 벼락이 내려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무슨 결과를 촉발할지 결코 알 수 없는 전자의 이동인 셈이었다. 우리는 독일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인, 우리 자신의 정부, 우리의 이웃과 전쟁 중이었고,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전쟁 중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쪽이 전쟁을 원하면 다른 쪽은 평화를 원했고, 그러다 보면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 평화를 원하는 쪽에서 먼저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 P38

하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오페라 가수들과 축구 선수들까지도 포함하게 될 나만의 우상들을 모신 만신전에 기도를 올리면서 저녁마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 - P42

나의 삼촌 알베르토는 위대한 조각가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내가 그다지도 오랜 시간 동안 형편없었던 이유죠. 삼촌 때문에, 좋은 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유일한 목소리에는 귀를 막은 채, 그런 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좋은 돌은 없답니다. 제가 잘 알아요. 그런 돌을 찾느라고 수많은 세월을 보내 봤으니까. 몸을 숙여 내 발치에 있는 돌을 들어 올리는 걸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 P52

일꾼들이 벌써 감귤밭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내가 방문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대서양 저편의 나라에서는, 대지가 뱉어 내는 검은 기름, 전쟁을 촉발하여 돈을 벌게 해줄 끈적이는 원유 덕분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피에트라달바에서 재물은 태양과 함께 바뀌어 가는 색채에서, 달콤 쌉싸름한 맛 혹은 추운 아침 날 느껴지는 달콤함에서 왔다. 나는 그런 오렌지 세상이 그립다. 그 누구도 오렌지를 놓고 싸운 적은 없었으니까. - P78

나는 높은 곳에서 일할 때면 늘 안전을 확인했다. 아버지 덕분에 갖게 된 신중함인데, 그 내용은 다음의 격언으로 요약되었다. 성당이 올라갈 때면 조각가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 P84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관습과 계급의 장벽이 파놓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한 걸음에 건너뛰면서.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 누구도 말한 적 없는 위업이자 말 없는 혁명.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에 나는 조각가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러한 변화를 의식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낮은 초목들과 올빼미가 공모하는 가운데 우리의 손바닥이 합쳐지자 뭔가 조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본능적 깨달음이 생겼다. - P103

나는 그 애가 내게 시범을 보이는 동안 가까운 벤치에 앉아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 애는 거의 반 시간 동안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꼼짝을 안 했다. 비올라의 톡톡 튀는 말과 생각들이 앞다퉈 쏟아질 때면 비올라의 존재로 포화 상태였던 나의 상상의 세계가 이제는 새로운 소리들로 밤의 어둠을 채웠다. 무덤 사이로 기어가는 소리, 내 시야의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무도. 마을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꺼풀이 없는 눈들이 나뭇가지 뒤에서 나를 지켜본다. - P112

「다른 책도 가져다줄게. 그러다가 들키면 재수 없는 거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읽어. 그런데, 넌 몇 살이니?」
「열셋.」
「나도. 몇 월인데?」
「1904년 11월.」
「오, 나도! 혹시 우리가 한날에 태어났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적 쌍둥이일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우리를 능가하며 그 무엇도 절대 부술 수 없는 힘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을 거란 말이지. 자, 셋까지 센다, 셋에 다 같이 자신의 생일을 말하는 거야. 하나, 둘, 셋」 - P113

멀어져 가면서, 나는 아주 신경 써서 세 번 뒤돌아봤다. 한 번은 저번에 못 한 것, 또 한 번은 이번 것, 그리고 마지막은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 P114

여명의 빛이 진종일 지속되는 피에트라달바의 봄만큼이나 감미로운 건 다시 만나 보지 못했다. 마을의 돌들은 여명의 장밋빛을 낚아채어 반사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타일, 금속, 암석 노출지에 끼어든 운석, 신비의 샘, 심지어 주민들의 눈에까지 그 색채를 넘겨주었다. 여명의 장밋빛은 마지막 사람이 잠이 들어야만 진정되었으니, 가끔은 어둠이 내리고 나서도 초롱 불빛 아래에서 여자애를 바라보는 사내애의 시선 속에 살아남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피에트라달바, 여명의 돌. - P124

하지만 책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책들과 함께 우주가 확장되었다. 조각을 하다가 어느 결엔가 나의 행위가 외톨이의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을 평생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행위는 내 이전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련되었듯이, 내 뒤에 올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리되리라. 망치질 하나하나는 먼 곳에서부터 왔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 - P140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 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너져.」 - P145

찰나 동안, 비올라와 나는 키가 같아진다. 우리는 거의 열네 살이다. 정확히, 똑같은 키. 이 상태는 지속되지 않을 테고, 그 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나도 그러니,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나는 우리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니까. 이 순간이 지나면, 비올라는 계속해서 키가 자라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겠지. 나는 여기, 땅바닥에 붙어 있을 테고. 그 순간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묘지의 밤, 대낮의 열기에 그을린 색채로 가득한 밤에, 이러한 만남, 예기치 못한 동등함에 거의 놀라다시피 하며. 찰나 동안, 나는 어느 결엔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애를 쑥쑥 크게 하는 힘들이, 그러니까 쌓여 가는 세포들과 늘어나는 뼈들이 작동하고 있고, 분자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수록 비올라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 P148

나는 옷가지를 벗어 던지면서 달리기 시작했고, 태어날 때 부터 끌고 다니는 이 평범하지 않은 몸뚱어리에 마음 쓰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 물, 기적의 샘물은 기적을 낳는 게 틀림없었다. 일단 물에 잠기자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으니까. 머리 하나만 물 밖으로 나온 나도 물 아래에서는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우람했다. - P156

웃어라, 팔리아치오, 그러면 모두가 박수를 치리라. - P160

비올라가 옳았다. 이 세계는 이미 죽었다. 나의 복수는 20세기의 것, 나의 복수는 현대적이리라. 나는 나를 내몰았던 사람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리라.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자가 되리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넘어서리라. 나의 복수는 그들을 살해하는 데 있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는 데, 오늘 그들이 내게 보여 줬던 내려다보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데 있으리라. - P161

처음에 경계하던 별은 곧 비올리에게 애정을 갖게 되어서 한 달 뒤에는 곰 사건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노라고 털어 놓았다. 「저 애는 너무 작고 저토록 연약한데, 어떻게 곰을 품고 있을 수 있겠어?」 나는 비올라를 잘 알았고, 나는 그 애가 곰 여러 마리, 동물원 전체, 서커스단과 그 천막까지, 그리고 화약고도, 여러 대의 비행기도, 넓은 바다와 산도 전부 다 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올라는 우리의 삶을 만드는 조물주였고, 손가락 한 번 튕기거나 미소 한 번 짓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 P171

「아니야, 미모. 나는 네게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위로도 아래로도, 큰 걸로도 작은 걸로도. 모든 경계는 만들어 낸 거야. 그 점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걸,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고, 나아가 그걸 믿는 사람들은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불편해진다고 할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내 가족조차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난 상관 안 해. 모두가 네게 반대하면 네가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임을 알게 될 거야.」 - P199

거닐다. 나는 보통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해서, 뭔가를 갖다 놓거나 가져오기 위해서 걸었다. 나의 걸음은 실용적이었다. 거닌다는 것은 사회적 특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의 예술이었다. - P210

나는 그 결합이 미칠 영향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결혼하게 되면 비올라가 대학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날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더는 죽은 자들의 말을 들으러 가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우리를 왕처럼 열렬히 맞아 줄 그런 강변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가 계속 머리를 물 밖에 내놓고 헤엄치게, 조금 더 헤엄쳐 나가게 격려해 주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벌써, 나는 가라앉는 중이었다. - P218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이 특종감이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다가, 그러한 유혹의 공격을—정말이지 악마는 일을 쉬는 법이 없다—얼른 물리친다. 그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거다. 비탈리아니의 생명이 저녁 미풍에 가물거리다가 자신의 비밀을 품고 조용히 꺼지게 내버려둘 터이다. 신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평생을 모든 비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비밀에 바친 파드레 빈첸초야말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 만한 위치에 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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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썩게 하리라.
다 썩어 문드러지게 하리라.
내가 지표 위로 전부 덮일 것이다. 불비처럼 세상에 흩뿌려질 것이다. 내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내 포자와 씨앗을 지상 가득히 뿌릴 것이다. 나는 빌딩을 썩게 하고 철근을 으스러뜨리고 콘크리트를 부술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을 다 집어삼킨 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는 지구 위를 죄다 뒤집어씌우며 무성하게 번식할 것이다. 내 귀신 들린 숲이 너희를 남김없이 잡아먹고 자라나리라. 모든 죽은 것들이 살아서 들뛰고 생동하게 하리라.
그렇게 화산처럼 폭발하며 증식하다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져 스스로를 먹을 것이며, 그러다 소멸해갈 것이다. 그렇게 내가 다 으스러져 사라진 자리에 새 숲이 자라나리라. - P257

친구가 새벽 무렵에 말했다. 얘, 전에 내가 재미있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누가 우주비행사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대.만약에 당신이 화성에 갈 수 있다면, 그런데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면, 아니, 가다가 죽거나 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다면, 그래도 화성에 갈 기회가 온다면 가겠느냐고 물었대. 그런데 비행사들이 다 가겠다고 답했다지 뭐니. 왜냐면 자신의 인생은 애초에 우주에 있었으니까. 제 삶이 거기서 끝난다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나는 늘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늘 알겠더라고······.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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