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야 뭐라 할지 모르겠으나 열두 살의 슬픔이 아주 오래 가는 법은 없다. 내가 탄 기차가 무엇을 향해 덜컹거리며 나아가는지는 몰랐지만 내가 기차를 타본 적이 없다는 건 알았다—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든가.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전나무든 집이든, 뭔가를 응시하려고 하자마자 곧 사라져 버렸다. 풍경, 그건 움직이기 위해 생겨난 건 아니지 않은가. - P21
다행히도 나비가 있었다. 나비는 생미셸드모리엔에서 들어왔고, 줄지어 지나가는 산들과 나를 갈라놓은 유리창에 내려앉았다. 나비는 유리창을 상대로 잠깐 투쟁하다가 포기하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훗날 봄철이면 보게 될, 화려한 색채와 황금빛이 어우러진 영광스러운 자태를 지닌 아름다운 나비는 아니었다. 그저 회색빛에, 눈을 잔뜩 찌푸리고 보면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보잘것없는 나비, 햇살에 지친 자벌레나방이었다. 내 나이 또래 남자애들이 그러듯이 나비를 괴롭혀 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고, 그러다가 날뛰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차분한 요소인 나비를 응시하고 있으면 울렁거림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어떤 우호적인 힘이 보내 준 나비는 여러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그 덕분에 그 무엇도 정말이지 보이는 그대로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비는 나비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웅크린 거대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러한 깨달음은 몇 십 년 뒤에 최초의 원자 폭탄에 의해 확인될 테고, 어쩌면 그보다도, 죽어 가는 내가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의 지하 공간에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리라. - P21
고향에 전기가 들어오기를 꿈꿨던 인제니에레 카르모네가 우리 동네 분위기가 얼마나 찌릿찌릿한지 보았더라면 황홀해했을 텐데. 두 사람만 스쳐도 매번 벼락이 내려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무슨 결과를 촉발할지 결코 알 수 없는 전자의 이동인 셈이었다. 우리는 독일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인, 우리 자신의 정부, 우리의 이웃과 전쟁 중이었고,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전쟁 중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쪽이 전쟁을 원하면 다른 쪽은 평화를 원했고, 그러다 보면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 평화를 원하는 쪽에서 먼저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 P38
하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오페라 가수들과 축구 선수들까지도 포함하게 될 나만의 우상들을 모신 만신전에 기도를 올리면서 저녁마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 - P42
일꾼들이 벌써 감귤밭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내가 방문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대서양 저편의 나라에서는, 대지가 뱉어 내는 검은 기름, 전쟁을 촉발하여 돈을 벌게 해줄 끈적이는 원유 덕분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피에트라달바에서 재물은 태양과 함께 바뀌어 가는 색채에서, 달콤 쌉싸름한 맛 혹은 추운 아침 날 느껴지는 달콤함에서 왔다. 나는 그런 오렌지 세상이 그립다. 그 누구도 오렌지를 놓고 싸운 적은 없었으니까. - P78
나는 높은 곳에서 일할 때면 늘 안전을 확인했다. 아버지 덕분에 갖게 된 신중함인데, 그 내용은 다음의 격언으로 요약되었다. 성당이 올라갈 때면 조각가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 P84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관습과 계급의 장벽이 파놓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한 걸음에 건너뛰면서.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 누구도 말한 적 없는 위업이자 말 없는 혁명.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에 나는 조각가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러한 변화를 의식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낮은 초목들과 올빼미가 공모하는 가운데 우리의 손바닥이 합쳐지자 뭔가 조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본능적 깨달음이 생겼다. - P103
나는 그 애가 내게 시범을 보이는 동안 가까운 벤치에 앉아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 애는 거의 반 시간 동안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꼼짝을 안 했다. 비올라의 톡톡 튀는 말과 생각들이 앞다퉈 쏟아질 때면 비올라의 존재로 포화 상태였던 나의 상상의 세계가 이제는 새로운 소리들로 밤의 어둠을 채웠다. 무덤 사이로 기어가는 소리, 내 시야의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무도. 마을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꺼풀이 없는 눈들이 나뭇가지 뒤에서 나를 지켜본다. - P112
「다른 책도 가져다줄게. 그러다가 들키면 재수 없는 거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읽어. 그런데, 넌 몇 살이니?」 「열셋.」 「나도. 몇 월인데?」 「1904년 11월.」 「오, 나도! 혹시 우리가 한날에 태어났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적 쌍둥이일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우리를 능가하며 그 무엇도 절대 부술 수 없는 힘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을 거란 말이지. 자, 셋까지 센다, 셋에 다 같이 자신의 생일을 말하는 거야. 하나, 둘, 셋」 - P113
멀어져 가면서, 나는 아주 신경 써서 세 번 뒤돌아봤다. 한 번은 저번에 못 한 것, 또 한 번은 이번 것, 그리고 마지막은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 P114
여명의 빛이 진종일 지속되는 피에트라달바의 봄만큼이나 감미로운 건 다시 만나 보지 못했다. 마을의 돌들은 여명의 장밋빛을 낚아채어 반사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타일, 금속, 암석 노출지에 끼어든 운석, 신비의 샘, 심지어 주민들의 눈에까지 그 색채를 넘겨주었다. 여명의 장밋빛은 마지막 사람이 잠이 들어야만 진정되었으니, 가끔은 어둠이 내리고 나서도 초롱 불빛 아래에서 여자애를 바라보는 사내애의 시선 속에 살아남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피에트라달바, 여명의 돌. - P124
하지만 책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책들과 함께 우주가 확장되었다. 조각을 하다가 어느 결엔가 나의 행위가 외톨이의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을 평생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행위는 내 이전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련되었듯이, 내 뒤에 올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리되리라. 망치질 하나하나는 먼 곳에서부터 왔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 - P140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 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너져.」 - P145
찰나 동안, 비올라와 나는 키가 같아진다. 우리는 거의 열네 살이다. 정확히, 똑같은 키. 이 상태는 지속되지 않을 테고, 그 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나도 그러니,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나는 우리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니까. 이 순간이 지나면, 비올라는 계속해서 키가 자라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겠지. 나는 여기, 땅바닥에 붙어 있을 테고. 그 순간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묘지의 밤, 대낮의 열기에 그을린 색채로 가득한 밤에, 이러한 만남, 예기치 못한 동등함에 거의 놀라다시피 하며. 찰나 동안, 나는 어느 결엔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애를 쑥쑥 크게 하는 힘들이, 그러니까 쌓여 가는 세포들과 늘어나는 뼈들이 작동하고 있고, 분자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수록 비올라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 P148
나는 옷가지를 벗어 던지면서 달리기 시작했고, 태어날 때 부터 끌고 다니는 이 평범하지 않은 몸뚱어리에 마음 쓰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 물, 기적의 샘물은 기적을 낳는 게 틀림없었다. 일단 물에 잠기자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으니까. 머리 하나만 물 밖으로 나온 나도 물 아래에서는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우람했다. - P156
웃어라, 팔리아치오, 그러면 모두가 박수를 치리라. - P160
비올라가 옳았다. 이 세계는 이미 죽었다. 나의 복수는 20세기의 것, 나의 복수는 현대적이리라. 나는 나를 내몰았던 사람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리라.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자가 되리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넘어서리라. 나의 복수는 그들을 살해하는 데 있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는 데, 오늘 그들이 내게 보여 줬던 내려다보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데 있으리라. - P161
처음에 경계하던 별은 곧 비올리에게 애정을 갖게 되어서 한 달 뒤에는 곰 사건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노라고 털어 놓았다. 「저 애는 너무 작고 저토록 연약한데, 어떻게 곰을 품고 있을 수 있겠어?」 나는 비올라를 잘 알았고, 나는 그 애가 곰 여러 마리, 동물원 전체, 서커스단과 그 천막까지, 그리고 화약고도, 여러 대의 비행기도, 넓은 바다와 산도 전부 다 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올라는 우리의 삶을 만드는 조물주였고, 손가락 한 번 튕기거나 미소 한 번 짓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 P171
「아니야, 미모. 나는 네게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위로도 아래로도, 큰 걸로도 작은 걸로도. 모든 경계는 만들어 낸 거야. 그 점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걸,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고, 나아가 그걸 믿는 사람들은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불편해진다고 할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내 가족조차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난 상관 안 해. 모두가 네게 반대하면 네가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임을 알게 될 거야.」 - P199
거닐다. 나는 보통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해서, 뭔가를 갖다 놓거나 가져오기 위해서 걸었다. 나의 걸음은 실용적이었다. 거닌다는 것은 사회적 특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의 예술이었다. - P210
나는 그 결합이 미칠 영향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결혼하게 되면 비올라가 대학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날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더는 죽은 자들의 말을 들으러 가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우리를 왕처럼 열렬히 맞아 줄 그런 강변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가 계속 머리를 물 밖에 내놓고 헤엄치게, 조금 더 헤엄쳐 나가게 격려해 주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벌써, 나는 가라앉는 중이었다. - P218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이 특종감이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다가, 그러한 유혹의 공격을—정말이지 악마는 일을 쉬는 법이 없다—얼른 물리친다. 그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거다. 비탈리아니의 생명이 저녁 미풍에 가물거리다가 자신의 비밀을 품고 조용히 꺼지게 내버려둘 터이다. 신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평생을 모든 비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비밀에 바친 파드레 빈첸초야말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 만한 위치에 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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